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6화 (207/527)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2)

피어나기 시작한 생명이 담긴 연두색 눈.

이미 떠나간 생명을 이어가는 붉은색 눈.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남은 잿더미처럼 빛을 잃어가는 붉은색 눈. 그새 또 시커멓게 죽어버린 듯한 그 붉은 눈에서 비린내가 난다.

채 갈무리 되지도 않은 화를 담아 플란츠를 노려보던 그날에 느꼈던 것처럼, 돌아가지 못할 누군가의 모습을 미처 다 감추지 못하던 그날에 느꼈던 것처럼, 그 붉은 눈에서 바다 비린내 말고 피 비린내가 나는 기분이 든다.

다시 떠오른 과거의 망령이 만들어낸 찬 감옥에 홀로 갇힌 채로, 그 누구도 듣지 못할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는 동생을 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칼리안."

칼리안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똑같이 생명을 품었으나 완벽히 다른 빛을 내는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것이 누구든.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게.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게.

그래서 아무도 피해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혼자 또 다 끌어안으려는 것임을 안다. 놈은 항상 그랬으니 저 새빨간 눈 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다 들린다.

대답 없이 자신을 향한 칼리안의 눈을 보던 플란츠는 지금 상황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짧은 말을 덧붙였다.

"앉아. 짖지 말고."

제 놈이 시키는대로 장단 좀 맞춰주고 제 고양이랑도 좀 놀아주고 했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졌나보다 싶어서 하는 소리였다. 제멋대로 말을 전해듣고 제멋대로 찾아와선 제멋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제멋대로 화를 내는데, 이 이상 무슨 다른 말을 하겠느냔 말이다.

하다못해 루시에게도 고분고분 져주지는 않는 플란츠가 아니던가. 막돼먹은 동생놈이 그런 플란츠를 한 마리의 얌전한 비둘기인 것처럼 대하니 멍멍이 정도로 봐줄 수 밖에.

그런 플란츠를 보던 앨런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뒤 칼리안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앨런은 르메인과 달랐으니까.

내새끼한테 새 취급받은 내새끼 형이 내새끼를 개 취급하는 이런 상황에 끼어들어서 너네 지금 뭐하냐 물을 만큼 눈치 없는 그런 인사는 아니었다.

- 탁

그렇게 작은 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는 둘 모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제 자리에 가만히 선 칼리안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어디까지 선을 넘을 셈인지 가늠도 안되는 어린 형을 앞에 둔 채로 조용히 눈을 내리 떴다.

-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내 아우님의 옛 모습을 정말 기억해서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데블란은 실리케가 아니다.

지금 데블란은 거리낄 것이 없다.

서서히 죽어갈 독을 건네며 웃던 실리케와 데블란은 다르다. 그는 진짜 뱀이다. 더 다가가면 독기 가득한 그 이빨에 죽고 만다. 순식간에, 한 순간에 죽고 만다. 스스로도 알지 못할 독니에 물려 어느새 죽고 만다.

"멋대로 굴지 마십시오. 제 일입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앨런도, 아르센도, 아리안느도, 체이스도, 그리고 플란츠도. 거기까지만 해야 했다.

칼리안의 속내를 또 한 번 고스란히 들어버린 플란츠가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아우님께서 만들어 둔 새장 속에서 얌전히 날개 접고 숨만 쉬는 새 노릇이나 하는 취미는 없는데."

그런 놈 필요하면 체르밀 5층을 가보시든가 아니면 세크리티아 왕세자를 다시 불러오시든가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아니니까.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대꾸했다.

"제 목줄 쥐여드린 적 없습니다, 저는."

그러는 형님 너는 방금 전까지 멀쩡한 동생 개 취급하셨던 생각이 안나시냐고. 아무리 그래도 개보단 새가 나은 것 같지 않느냐고. 그런 소리였다.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꼰 플란츠가 칼리안을 비딱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아우님께서 내 말이 사람 말로 안들려서 안 들으시는지, 안 믿겨서 안 들으시는지 몰라도."

제 손으로 쌓아올린 하등 쓸모 없는 차디찬 그 벽이 하도 두꺼워서 말이 안들리는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은 무조건 나약하리라는 자만심 때문에 말을 안듣는지 몰라도.

"오늘 내 아우님이 여러 번 짖으시는데."

그리고 플란츠는 칼리안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말 잘 듣는 동생 노릇 때려친 칼리안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뒤에 말 잘 듣는 형 노릇 때려친지 오래였지 않나.

뭣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너 진짜 내 말 더럽게 안 듣는다고. 그런 생각을 한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이 짜증나고 맘에 안들기로는 플란츠 역시 칼리안 못지 않았으니까.

"앉아. 내려다보지 말고. 짜증나니까."

자신을 어린 놈, 약한 놈 취급하면서 꼿꼿이 서 있는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내리뜨고 있던 눈을 꾹 감은 칼리안이 애써 화를 삭였다.

살려놓고 보살피고 가르치며 이제껏 잘 키워낸 완두콩이 또 말을 안 들어 처먹고 선을 넘는 것을 지극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손만 대도 툭 끊어질 저 버릇없는 놈의 풀대가리를 일단 없애버리고 일을 시작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잠시 집어넣은 칼리안이 앨런이 앉았던 자리로 와 앉았다.

은은한 딸기 향이 난다.

커피와 민트밖에 없던 앨런의 집무실에, 언제든지 우려내어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었을 말린 딸기를 넣은 차의 향이었다.

앨런의 몫으로 놓여 있던 투명한 붉은 빛의 차를 잠시 쳐다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듣겠습니다."

앉으라고 했으니 앉았다. 마주 앉아 한가롭게 티 타임이나 즐기자고 한 소리는 아닐 테고, 짖지 말라 했으니 듣기나 하겠다고.

"왜 그것을 열어보셨는지. 왜 이곳으로 오셨는지."

그러니 무슨 말이든 할 말을 해보라는 소리였다. 얌전히 편지나 물어나르는 전서구 노릇이나 했으면 되었을 것을, 왜 굳이 이런 사달을 만드는지. 그 이유는 일단 듣겠노라고.

기어코 칼리안을 꺾어놓은 플란츠가 말을 시작했다.

세크리티아의 세작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 그 편지에 적힌 글자를 의심하게 된 일, 그리하여 편지를 뜯어보게 된 이유, 그것을 칼리안에게 알려봐야 또 혼자 처리하겠다 하다 다 죽은 낯짝이나 하게 될 것이 뻔하니 그냥 앨런에게 알린 일, 그것을 확인한 앨런이 당장 세크리티아에 가겠다 한 일까지 알렸다.

데블란이 보낸 것으로 여겨지는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플란츠가 그것을 일부러 빼고 이야기했다는 생각을 한 칼리안이 말했다.

"······ 편지 내용도."

저 자식이 왜 자꾸 은근슬쩍 말을 내리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그것까지 따지고 들면 밖에 있을 앨런이 들어와 뜯어말릴 상황이 올 때까지 싸울 것 같아서, 마음 넓은 플란츠는 짧은 한숨만 쉬며 화를 삭였다.

"그것까지 알아서 뭐하게."

"저에게 보낸 편지 아닙니까. 그것은 제 일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카이리스 왕실과 얽혀서 좋은 꼴 나기 힘드니 조용히 처리할 방법이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빠짐없이 말해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플란츠는 그 짧은 편지 내용을 빠짐없이 일러줬다. 앨런이 그것을 없애버렸으나 플란츠는 편지에 적힌 글자 하나 잊지 않고 전부 전했다.

그 의뭉스러운 내용.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인지조차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그런 내용을 들은 칼리안이 주먹을 꼭 쥐었다.

잊고 살던 유령. 그 망령이 제게 다시 손을 뻗은 것을 알기가 무섭게 가늘게 떨려오는 손을 플란츠로부터 감추려고 주먹을 쥐었다.

"그는 카이리스의 3왕자가 검술을 수련한 적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한 순간에 각성하듯 검의 길에 오른 것도 알 테고, 지그프리드 공이 저에게 세크리티아 기사들의 버릇이 있다며 알려준 것을 듣고 고치기 전의 제 검술을 보고한 새가 있다면 어딘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체이스 왕세자와의 긴밀한 관계며 서로 돕기 위해 안달내던 것도 전부 보고 받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체이스 왕세자가 누구를 위해 새들을 부리고 있는지도 알았을 수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 두려움과 후회, 죄책감, 통증, 그 모든 것을 감춘 채 작은 목소리를 낸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하지만 '다시 지키라'는 말을 아무 의미 없이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다시 지키라는 말인지 써있지 않았으나 플란츠는 숨겨진 말을 그리 느끼지 않았던가. 데블란으로부터 체이스를 다시 지키라는 뜻이리라고.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데블란이 새들을 통해 정보를 전해듣고 이상한 점을 알아냈다 한들, 칼리안의 정체를 의심한다 한들. 데블란은 칼리안의 과거까지 유추해내지는 못한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처럼 직접 기억을 찾았거나 저를 그냥 단순히 세크리티아의 어느 기사였던 이로 생각을 하거나."

지키라는 것이 체이스였다면 기억을 찾아서 한 말일 테고, 지키라는 것이 세크리티아 왕가 혹은 세크리티아 그 자체였다면 기억을 찾지 못한 채 칼리안을 무작정 들춰보려 한 말일 것이라는 소리였다.

"사실을 알든 모르든, 어쩔건데."

베른에게 누군가를 잡기 위한 이중 삼중의 덫 놓는 법을 가르친 것은 데블란이다. 그런 데블란은 지금 칼리안을 위한 덫을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위험함을 알면서도 목을 들이밀 수 밖에 없을 그런 덫을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데블란의 눈에 한심하게만 보일, 귀족들의 기에 눌려 제 소리 한 번 못 내고 살았던 르메인에게 셋째 아들이 변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리겠다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칼리안에 대한 제대로 된 사실을 알고 있든 아니든, 데블란은 지금 르메인이 칼리안을 의심하는 순간 칼리안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어 보았을 테니, 칼리안으로서 가지고 있던 것만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만든 덫 안으로 서슴없이 달려올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직접 찾아가기라도 할 셈인가."

그러니 플란츠는 어떻게 할 셈이냐고 묻고 있었다.

앨런이 그렇게 하겠다 한 것처럼 직접 가서 데블란 숨통을 끊어놓고 오기라도 할 셈이냐고.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너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이러시는 겁니까."

데블란의 유령에 쫓기는 칼리안이 실리케로부터 등을 돌렸던 플란츠를 보며 물었다.

체이스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않으려 애를 쓰고, 플란츠에게는 실리케의 손을 놓을 수 있겠느냐 물어가며 강요를 했던 칼리안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 우스워서, 칼리안이 결국 웃음을 흘렸다.

"칼을 들지 못할까봐, 아니면 정말 그리 할까봐, 이렇게 제멋대로 구시는 겁니까."

데블란을 없애려 움직이거나 혹은 섣부르게 그 덫에 걸려들까 하여 참견을 하느냐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냥 두십시오. 형님 다칩니다."

웃음의 끝에 이런 말을 하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찻잔 속을 들여다 봤다. 딸기가 담긴 그 안을 말 없이 한참동안 보던 플란츠가 다시 앞을 봤다.

딸기.

좋아하는지를 물어오는 것이 귀찮아서 좋다고만 대답을 했었는지, 정말로 좋아해서 좋다고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잊은 것인지 잊힌 것인지 몰라도 기억이 안 난다.

그 아이는 그 답을 알고 있었을까.

평생을 가도 그 질문 하나를 못 할 것을 아는 플란츠가 죽을 때까지 답을 알려주지 않을 사람을 쳐다봤다. 찻잔 속에 든 찻물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눈을 보던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것이 아니라 형 노릇을 하는 중인데."

그러니까 잘난 척 그만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짓 그만하라고.

"칼리안."

네 놈이 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 다 필요 없고, 나는.

이번에는 후회할 일 안 만들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 짖고 도와주는대로 그냥 있으라고. 짜증나니까."

신경써서 잘 키워낸 브로콜리 줄기 같은 놈이 제대로 된 형님 노릇 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칼리안이 얼마나 복잡한 심정이 됐는지는 모르는 채로,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칼리안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형님이 얼마나 성가시게 굴 수 있는지를 여실히 깨닫고 있는 제 모습에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할 기분이 됐다.

"네."

그래서 그냥 이렇게만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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