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5화 (206/527)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1)

플란츠가 잠시 발을 멈췄다.

하얀 띠 자수와 단추로 장식된 옅은 하늘색의 얇은 재킷에 팔을 끼워 제대로 입기 위해서였다. 뒤따라와 그것을 도운 레릭이 그 사이 언제 붙었는지 모를 루시의 털 두 가닥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얼른 떼냈다.

그렇게 차림새를 가다듬은 플란츠가 다시 발을 옮겨 아르피아 궁에 들어섰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곳에 올 때면 혹시나 마주치지는 않을까 항상 긴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거리감이 컸으니까.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카에라의 기사들을 뒤로한 채 뚜벅뚜벅, 아르피아 궁 가장 윗층의 긴 복도에 들어선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플란츠."

만나고 싶다가도 마주하기 꺼려지고, 반갑다가도 머뭇거리게 되고, 이해가 되면서도 원망스럽고, 안타깝다가도 답답한 그런 사람이 플란츠를 불렀다.

세뉴 관에서의 일정을 위해 이제 막 집무실에서 나오던 르메인이었다.

그러게 왜 집무실을 마주보게 둔 탓에 이 곳에 올 때마다 이렇게 상념거리를 만들게 했는지, 하여튼 뭐 하나 썩 마음에 들게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애써 접어넣은 플란츠가 우선 예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우습지 않은가.

귀족들이 모여 사는 에이난샤 거리에서 가장 거대한 저택에 사는 공작의 자식도, 내성 밖 빈민촌에 살고 있을 이름 모를 이들의 자식도 제 아비를 아버지라 부를 텐데. 오로지 이 사람만은 절대로 그렇게 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것이 숨이 막히는 것이다.

사람을 그냥 한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이 왕궁이, 제아무리 크고 화려하다 해도 답답하고 비좁게 느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귀족 회의에 들었어야 할 시간인데."

끝도 없이 의식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참 많은 생각들 중 가장 쓸데 없고 비효율적인 상념을 떠올리던 플란츠가 자신을 걱정하듯 건네오는 말에 고개를 들어 르메인을 쳐다봤다.

윗층 사는, 딱 싫어하는 것만 모아서 만들어다 놓은 듯한 누구를 빼닮은 빛의 짙푸른 눈이 플란츠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

내려다보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살펴보고 있었다.

걱정하는 빛이 역력한 그런 시선에 익숙해질 날이 요원한 플란츠가 무슨 대답을 해야할까 잠시 고민했다. 내 동생이 또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것 같아서 그 일 막아줄 마법사 새아빠 만나러 왔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

때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플란츠를 보며 잠깐 무언가를 떠올린 르메인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따로 언질하지 않고 찾아왔기에 혹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이니라. 바쁘고 난처해서가 아니라, 급한 일이라면 일정을 잠시 미룰까 해서 물은 것이니······."

지금은 바쁘다, 당장은 어렵겠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스스로도 잘 아는 듯 했다. 오죽하면 지레짐작으로 저런 소리를 덧붙이겠나.

당연하겠지만 그것을 알아서 배운 것은 아닐 터였다.

르메인이 내뱉는 말 한 마디, 내뱉는 숨 소리 하나까지 란델과 플란츠에게는 모두 다 가시로 들릴 수 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은 앨런이 알려주었겠지.

이래서야.

앨런이 키운 것이 칼리안의 세력인지 르메인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급한 일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회의에는 오늘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덕분에 플란츠는 더더욱 '당신 보러 온 것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적당히만 대답을 했다. 그런 아들을 조금 더 바라보던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혹 이 자리에서 이야기 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말하려무나."

그러니까 나는 당신 말고 당신 맞은편 집무실에 있는 마법사 만나러 온 것이라고 굳이 이야기를 꺼내놓게 하려는지.

눈치가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 습관처럼 흘러나오는 한숨을 참은 플란츠가, 말했다.

"······ 생일에는 생명 없는 꽃을 선물하지 않습니다, 전하."

그냥 되는대로.

기어코 플란츠가 앨런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믿고 있는, 혹은 믿고 싶어하는 저 소같은 남자한테 그냥 되는대로 생각해낸 용건을 말했다.

당신 또 실수했다고.

소 뒷걸음질에 이상한 것 잡는 재주는 도대체 어디에서 배워서 그렇게 잘 써먹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엉뚱한 것을 잡으셨다고.

"저를 생각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칼리안에게는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플란츠가 참아낸 한숨이 르메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안그래도 이미 진작에 또 한 소리를 들었던 탓이다.

말버릇은 나쁘지만 배울 것도 많고 혼날 것도 많아 멀리 두지도 못하는 마법사로부터, 둘째 생각한답시고 생일 맞은 셋째한테 뭔 짓했는지 알기는 아느냐고 정말 한참을 혼이 났다.

그럼 돌아오는 둘째 생일은 어떻게 해야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불꽃도 꽃이니 불꽃 담은 전등 장식을 해줄까 물었다가 이참에 아예 그냥 그 불꽃 들고 세뉴 강이나 건너가 버리시라는 말도 들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셋째를 찾아가서 제대로 사과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려는데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르메인이 무엇을 고민할지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저는 염려 않으셔도 되니 그냥 주시던대로 주십시오."

플란츠 딴에는 최선을 다해 성의껏 길게 꺼내놓은 말이었고, 르메인은 한참 뒤에 그 말 뜻을 이해했다. 플란츠 자신의 생일에는 그냥 살아있는 꽃 달라는 이야기였음을 말이다.

"세상 모든 꽃이 똑같은 향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으니 괜찮습니다."

세상 모든 꽃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인데다 세상 모든 꽃이 다 르니에리 향을 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히나에게 배웠지 않나. 그러니 돌아오는 봄에 피어오를 꽃향기에서 지나간 상처나 떠올리며 심장 위에 돌덩이 얹어놓는 대신, 비로소 겨울이 지났음에 조금쯤은 반가운 마음을 가져보려 하는 중이었다.

그러려면 생일 축하하는 빨간 꽃부터 기껍게 여겨야 할 테니 조금씩 연습하듯 익숙해져 보겠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해서 당장 라벤더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 그래. 그리하마."

그 뜻을 전부 알아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르메인은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고맙구나. 플란츠."

물론 르메인은 이번에도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고 고맙다는 말만 했다.

* * *

칼리안이 이제 막 히나를 돌려보내고, 플란츠가 르메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간.

얼마 전 지그프리드 관에서 석찬에 들었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귀족들이 세뉴 관을 찾았다.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수의 안건들을 두고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갈 별 볼 일 없는 중앙 귀족 회의 자리에 유래 없이 많은 귀족들이 모인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러니, 드미레아 양. 아무래도 그 날의 일에 대해 내가 3왕자님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겠네. 거절하실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드미레아 양은 3왕자님의 정혼자가 아닌가?"

칼리안의 생일 축하 연회에서 정중히 꼬리 말고 도망간 에반 브리센 후작과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이 세뉴 관에서 있을 귀족 회의에 모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려온 것이다.

좋은 구경거리를 두 번이나 놓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 그러니 오늘 회의가 끝난 뒤에 3왕자님께 한번 얘기를 전해달라 부탁을 하는 것이네."

자신이 산 세월의 반의 반 정도를 산 드미레아에게 나름의 예의를 갖춰가며 이런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무려 에반 브리센 후작이었다.

그런 에반을 잠시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그리하지."

하대였다.

드미레아의 입에서 하대가 나온 순간, 귀족들은 이 자리에 자신이 함께 하고 있음에 대해 또 한번 큰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에반의 눈썹이 쭉 올라갔다.

방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 분명한 항의를 하려던 에반이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의 세력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귀족들도 많은 곳이다. 저 어린 드미레아가 자신에게 하대를 한 이 결례에 대해 똑같이 구는 모습으로 상대하여 좋을 것이 없었다.

"드미레아 양. 공적인 자리에서 어찌 그리 예의 없는 모습을,"

"나는 지그프리드 소공작이다. 그 무례한 호칭은 어디에서 배웠는지 알 수가 없군."

수도에 오지 못하는 슬레이만이 자신의 전권을 잠시 양도하고 내려갔다. 게다가 드미레아는 명백한 지그프리드의 소가주였다.

이 순간, 이 세뉴관 안에서만은 공작 슬레이만의 위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 명백히 이곳에서만은 드미레아가 에반보다 높았다.

"무례한 호칭이라니? 조금 더 사이 좋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존중하는 마음을 더해 부른 것이 마뜩치 않았다면 좋게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 아니겠나? 아무리 어리다지만."

"생각 없이 장식으로 달아 둔 그대의 머릿속에서는 존중인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가리지 않은 살기를 에반에게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또 한 번 그 따위로 날 부르면 나와 내 가문과 지그프리드 공작님, 그리고 내 정혼자인 칼리안 왕자님에 대한 불명예로 간주하고 대응하겠다. 에반, 브리센, 후작."

거칠 것 없다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할 말 잃은 에반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 * *

- 익숙해졌다 해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니라. 이제는 본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 한심한 작자가 너를 더 궁금해하기 전에.

지키라는 그 문장에 '나로부터, 네 형제를.'이라는 말이 숨겨져 있음은 굳이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내용을 되새길 필요도 없다 여겼는지 앨런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없애버렸다. 종이는 태워지거나 구겨지거나 혹은 찢긴 것이 아니라, 플란츠의 눈 앞에서 말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좀."

정신 나간 것 같은데, 라는 말을 덧붙이려던 플란츠가 중간에 입을 닫았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의 옛 형님의 친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 편지를 정말 체이스가 보냈으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체이스는 저딴 식으로 이야기 할 성품도 되지 못하거니와, 이곳 저곳에서 주워들은 그런 얘기들을 따져봤을 때 칼리안에게 저런 요구를 할 만한 이는 데블란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 천지 그렇게 짜증나게 하는 놈 찾기 힘들만큼 실로 애증해 마지않는 그 동생놈의 알맹이를 만들어낸 부친이 보낸 편지를 가로채 이 곳에 오다가 그 동생놈의 겉모습을 만들어준 부친과 마주쳐서 그 동생놈 이야기를 한 뒤에 그 동생놈을 지켜줄 진짜 부친의 앞에 앉아있는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앨런은 그저 이렇게만 대답을 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눈웃음이나 늘 잔잔하게 띄워올리고 있던 미소는 온데 간데 없는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놈이 무슨 말을 하건 신경 안 쓰면 그만이라는 듯한 태평한 얼굴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지금 당장 세크리티아를 찾아가 누구 하나 갈아버려도 시원치 않아 할 듯한 그런 얼굴로도 보였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플란츠는 담담한 표정을 한 채 앨런을 마주 보고만 있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 아우님의 옛 모습을 정말 기억해서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분명 칼리안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투였다. 다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기억'을 찾았다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안그래도 여기저기 비밀 잘 흘리고 다니는 놈들이지 않나.

그러니 어디서 저도 모르게 새어 나간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맞춰 더 믿기지 않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낸 뒤 칼리안을 슬쩍 떠보려 보낸 편지라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데블란은, 칼리안의 비밀을 르메인에게 알리기 전에 세크리티아에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타국의 왕자를 정말 제 아들로 대하는 듯한 저 뻔뻔한 말투에 치가 떨리는 것을 참아낸 앨런이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조만간 제가 다녀오지요."

죽여버리겠노라고.

이제는 그 어떤 짐승에 빗대기도 어려운 그 악마같은 놈을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 없애버리겠노라고. 죽을 때까지 제대로 죽지 못하게, 그러나 뼛가루 하나 남지 않도록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버리겠노라고.

그런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건 제 일인 것 같은데."

이 곳에서 들리지 않았어야 할 목소리가 앨런의 말에 대해 짧은 대답을 했다.

굳이 앨런에게까지 기척을 숨긴 채 이 곳까지 찾아와 둘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당연히 칼리안이었다.

소리 없이 찾아와 앨런의 집무실에 들어선 칼리안이 플란츠와 앨런을 한 번씩 쳐다봤다.

"아무래도 제 전서구가 길을 잘못 든 듯 하여."

칼리안에게 전해야 할 편지를 플란츠가 그 자리에서 뜯어 읽어본 뒤 아르피아 궁으로 향했다고, 멀찍이서 플란츠를 관찰하다 아무래도 걱정이 된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아르센에게 이런 내용을 전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칼리안의 앞길 잘 치워주기로 한 아르센은 세크리티아의 새가 전해온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런 내용을 들고 찾아온 아르센으로부터 지금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전해들은 뒤 플란츠의 뒤를 좇아 이 곳까지 찾아온 칼리안이 느리게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왔는데······."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

멋대로 자신의 일에 끼어든 것에 대해 그 어느때보다도 화가 나 있는 목소리.

"함께 계시네요. 제 얘기 하시면서."

그 목소리를 들은 플란츠는, 칼리안이 방금 자신을 두고 '제 전서구'라 부른 것에 화를 낼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저 빼고."

북쪽 대사막의 두꺼운 얼음 밑을 소리 없이 흐르는 달빛 닮은 물, 그 물을 떠올린 것 같은 목소리. 제 눈에 담겨있는 불꽃마저 꺼뜨릴 것 같은 그런 차디찬 목소리.

그것이 플란츠에게는 고래 울음으로 들려서.

두꺼운 얼음의 밑에 갇혀 어디로도 갈 곳이 없어져버린 고래의 울음으로 들려서 화를 못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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