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4화 (205/527)

제35장. 유령(5)

확실히 미친 것이 맞다.

얼음 마법사인데 왜 그렇게 폭발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모르겠지만 그냥 좋다 했었다.

"그때 말씀 안 드렸지만, 왕자님은 참 좋은 사람이십니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이유가 늘어난 것인지, 본래부터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왕자님이 좋은 사람이라서 따릅니다."

그러더니, 언젠가 칼리안이 나를 왜 따르는지를 물었을 때 하지 않았던 그 대답을 '내 자리 지켜달라'는 부탁을 들은 뒤에 이렇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칼리안을 따르는 정확한 이유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단다. 그냥 사람 좋아 보여서 따르고 있다는데 대체 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아르센은 제 앞에 놓인 배 향 가득한 녹차를 쭉 들이켰다. 꼭 잔뜩 긴장해서 목이 타는 사람처럼 시원하고 단 향을 음미할 새도 없이 그렇게 한 입에 차를 마신 뒤에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얼굴로 똑같이 웃다 말을 이었다.

"왕자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싸움에 앞서 상대방에게 항상 제 이름을 알려줍니다.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지키며 살다 보니 버릇이 됐습니다."

칼리안은 그 말에 대해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말인지 되묻지도 않았다. 잊히지 않는 기억의 편린 사이로, '발칸의 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를 말해주던 아르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그날' 제가 누군가의 이름을 먼저 물어본 것은 아마도 왕자님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기억 하나 안 난다 해도 그건 제가 확신합니다."

플란츠와는 극명하게 다른 반응이 아닌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날을 입에 담는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조금 아파서, 칼리안이 실소하며 물었다.

"경에게 내 목숨 내어 준 것에 자부심이라도 가지라는 소리입니까."

이 말을 들은 아르센은 칼리안이 짐작한 그 의미가 정말 맞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이렇게 굳이 저를 앞에 앉혀 놓으셨는데, 왕자님의 선택이 최선이라 믿으실 수 있을 이유 하나쯤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을 써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머리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정말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신용을 가지며 부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칼리안이나 아르센은 모르겠지만 언젠가의 플란츠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러니 지금 아르센은, 굳이 아르센을 곁에 두겠다 결정한 칼리안이 스스로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 여길 만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고자 그 아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아르센을 앞에 두고 보는 칼리안이 더 돌지 않게 막아 줄 자기 위로, 그것을 칼리안의 손에 쥐여주기 위해서.

분명 아르센은 과거의 베른을 존중했으리라고. 그 목숨을 앗은 것을 아깝다 여겼으리라고. 그러니 더 이상 심장이 식는 기분은 느끼지 말아달라는, 그런 말이기도 했다.

"하여튼 경은 이상한 사람이야."

아르센의 말 뜻을 모두 이해한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고, 그것을 가지고 위안을 삼으라 알려주고 있으니 확실히 어딘가 이상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렇게 굴 수 있을까.

"이미 알고 있어요. 그 때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이라고 모를까."

조롱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지 않고, 분명한 예의를 담아 베른을 상대했음을 여전히 기억한다. 차라리 그 날의 플란츠를 원망했을지언정 아르센을 원망한 적은 없었지 않나. 그냥 좀 엄하게 대했을 뿐이지.

"이미 알고 계신다 하니 다행입니다."

앉을 자리 지켜달라는 말과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알쏭달쏭한 그런 말을 툭툭 내려놓듯 꺼낸 아르센이,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빛의 두 눈으로 칼리안을 보며 조금 늦은 진짜 대답을 건넸다.

"그런 분의 숨 한 번을 빼앗았으니, 이번에는 지키는 것으로 갚겠습니다. 제가 마음 먹고 누구 죽여본 적은 많았어도 마음 먹고 지켜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아니. 나 말고 내 자리 지키라니까."

"사양도 마시고 걱정도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든 왕자님 한 분을 제가 못지키겠습니까."

미친놈아.

사람 말을 좀 들으라고.

"아······ 진짜 괜히 살려놨나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뀐다.

정말 죽여버릴 걸 그랬나보다 싶기도 하고 살려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아르센은 그런 사람이었다.

울고 싶은지 웃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 칼리안을 본 아르센이 신의로 가득한 눈을 한 채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꾹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동상 만들게 해주시든가 저 반성문 태워주시든가 둘 중 하나만 허락해주면 안되겠느냐고.

그래서 칼리안은 예쁘게 웃으며 꺼지라고 대답했다.

* * *

안색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 해도 분명 겉으로 크게 티를 내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분명히 얼굴 빛이 좋지 않았다.

- 지금, 들어가도 돼요?

우리 꽃 같은 왕자님 어디 편찮으신 것 같다고 말하면 무슨 그런 농담을 하냐고 말해 줄 사람 참 많은 왕궁에서 가타부타 의심 없이 곧장 올라와 준 히나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얀이 대답했다.

"네. 지금 막 일어나셔서 준비 마치셨어요."

어차피 칼리안에게 너 어디 아프니까 히나 불러올게 하고 말해봐야 아무데도 아픈 곳 없다고 말할 칼리안이 아니던가. 괜찮다는 그 말 믿었다가 좋은 꼴 겪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야 그 말을 믿지 않겠나.

"부탁해요, 베른 경."

그래서 얀은 이렇게 그냥 제맘대로 히나를 불렀다.

똑똑, 하고 일정한 두 번의 노크 소리로 자신이 들어감을 알린 얀이 칼리안 방의 문을 열고 히나를 들여보냈다. 테라스 밖을 보며 서 있던 칼리안이 히나를 향해 꽤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을 본 얀은 함께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문을 닫았다.

치료는 히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들어선 히나를 본 칼리안이 문을 닫으며 사라지는 얀을 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봐도 어디 하나 아픈 곳 없는 멀쩡한 얼굴인데, 얀의 눈에만 또 다른 게 보였나보다 싶어서였다.

"히나."

어쩐지 차 두 잔을 가져다 놓더라니.

같이 마시자고 가져온 줄 알았더니 히나를 불러오려고 그랬나보다.

이 더운 날에 어울리지도 않을, 딸기 청까지 넣고 달게 달게 만든 따뜻한 코코아는 그러니까 아픈 칼리안과 단 것 좋아하는 히나 생각에 내 온 모양이다.

- 진짜, 안 좋아 보이네요.

자리에 앉은 칼리안의 옆에 선 히나가 이렇게 말하며, 칼리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그 체온이 싫지 않아서 칼리안은 그냥 웃었다.

"걱정하지 마. 어디 안 좋은 것 아니니까."

누가 보면 곱게 곱게 살고 있는 5층 왕자님인 줄 알겠다. 지금 당장 창 밖으로 뛰어나가 숲까지 달려가도 숨 한 번 안 몰아쉴 사람을 이렇게나 걱정해주니 재미가 있을 수 밖에.

- 그럼, 안 좋은 꿈, 꿨어요?

그렇지만 칼리안의 괜찮다는 말 안 믿기로는 얀에 버금가는지라, 히나는 들려온 대답을 싹 무시한 채 칼리안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다시 물었다.

아. 들켰다.

하고, 칼리안이 또 웃었다.

"오래 전에는 떠나는 게 서러운 사람을 만나는 꿈을 한 번 꿨었고, 그 후에는 이미 떠나서 슬픈 사람을 만나는 꿈을 한 번 꿨었는데."

히나는 여전히 칼리안의 옆에 선 채로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말을 끊은 적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는 히나는 늘 이렇게 가만히, 누군가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은 떠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서운 사람을 만나는 꿈을 꿨어. 유령을 본 것 같은 그런 꿈."

그 말을 들은 히나가 칼리안을 계속 그렇게 쳐다보다가, 소리 없이 손을 움직였다.

- 오빠가, 저 어렸을 적에, 오리들은 '꽥꽥' 운다고, 말을 했어요. 저는 오리를, 못 봐서, 그게 어떤 소리일지, 몰랐어요.

혹시라도 칼리안이 알아보지 못할까봐 아주 천천히 이렇게 말을 한 히나가 잠시 칼리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모두 알아본 것을 확인한 뒤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날, 꿈을 꿨는데, 이 방보다도 더 큰, 커다란 오리가, 꽥꽥 하면서 저를, 따라왔어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꿈 얘기를 하는데 어찌나 재밌는지.

칼리안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히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히나가 무서운 것을 봤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더니 다시 생긋 웃으며 말했다.

- 그래서 아침이 되서, 오빠 때문에, 무서운 꿈 꿨다고, 엉엉, 울었는데. 그날 오빠가, 호수에 저를, 데려갔어요. 하얀 오리 뒤를, 노란 새끼오리가 따라다니면서, 꽥꽥 소리를 내는데, 너무 귀여워서, 그 날부터는 오리 꿈, 안 무서웠어요.

칼리안이 생각하는 그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알고 보면 이제는 무서운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의 말이 맞다. 그 작자가 아무리 베른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머물고 있었다 한들, 칼리안의 속에서까지 그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히나. 내가 하나 물어볼 게 있어."

가만히 히나의 말을 곱씹어보던 칼리안의 질문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 받으면 오래오래 살지도 모를 사람이 있어.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 사람이 네 도움을 바라게 될 지도 몰라. 와서 고쳐달라고 할 지도 몰라."

어떻게 할거야, 히나?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고개를 돌려달라고 얘기하면, 실망할거야? 화를 낼 거야?

어쩌면 그것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어서, 칼리안이 모두 다 꺼내지 못한 질문이 담긴 눈으로 히나를 쳐다봤다.

아기 오리의 것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그런 맑은 눈으로 칼리안을 보던 히나가 대답했다.

- 안 고쳐 줄게요.

그것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의 병든 곳이 아르센의 멍든 뒷목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히나도 분명히 알 테지만 고쳐주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대답을 했다.

- 저는 누구든, 고쳐주고 싶어 하는, 그런 착한 사람, 아니에요. 왕자님이 싫으면, 저도 싫어할 수, 있어요.

아.

- 많이, 나쁜 사람이에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람이 유령같아서, 언제까지고 나를 따라다닐 것 같아서."

치유사를 앞에 두면 누구나 이런 저런 말을 하게 되니까. 플란츠 뿐 아니라 칼리안도 같으니까.

- 무서워요?

"아니, 그냥. 아파. 생각하면, 그냥. 조금 아파."

그 말을 들은 히나가 물 위의 윤슬처럼 웃었다.

- 다행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아프다는데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몰라도, 오히려 다행이라며 반짝반짝 웃었다.

- 아프면, 제가, 고쳐 줄 수 있으니까. 무서운 사람인데, 무서운 것 아니고, 아파서 다행이에요.

그 무섭다는 사람은 고쳐주지 않더라도 칼리안이 아픈것은 잘 고쳐줄 수 있으니, 언제든지 고쳐주겠노라고. 히나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 아프면, 말해요. 꼭, 고쳐줄게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 말만으로도 이미 다 나았다는 뜻이 담긴 대답이었다.

* * *

덥다.

아무리 카이리스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라는 카이리시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은 덥다.

지그프리드 령에서 또 남쪽으로 보름은 더 내려가야 한다는 케네즈 백작령 인근에서 살았다던 레릭은 이 더운 날이 그리 불쾌하지 않은 듯 보였으나 플란츠는 그렇지 않았다.

덥다. 체르밀 궁에서 나오자마자 덥다.

아침부터 덥고, 더워서 짜증이 난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앞에 서 있는 놈이 신경에 거슬려서 더 짜증난다.

"달라고. 빨리."

머리 좋은 만큼 눈치 빠른 플란츠는 앞에 선 저 놈이 오늘도 뭔가 전할 것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놈이 계속 눈치만 보고 도통 숨긴 것을 내놓을 생각을 않는 것이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부군단장님."

늘 몰래 다가와 편지를 찔러넣고 사라지던 세크리티아의 새는, 갑자기 다가온 플란츠의 밑도 끝도 없는 요구에 내심 당황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발을 뺐다.

'설마 헤르츠 부군단장이 내 정체를 알린걸까.'

이런 생각을 해보던 새는 이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둘이 아무리 같은 집무실을 쓰고 있다고는 하나 절대로 그런 일들을 공유할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의 이런 예상은 정확했다.

확실히 아르센은 세크리티아의 세작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던 일에 대해 플란츠에게 알리지 않았으니까. 칼리안 역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플란츠에게 알리지는 않았었다.

그저 플란츠가 진작부터 놈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나 그냥 두었을 뿐.

그는 오늘도 티나지 않게 행동을 했고 제대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상황을 보아서 플란츠에게 편지를 전할 때를 가늠해보기는 했으나 누군가의 눈에 띄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가 곧장 자신에게 다가와 줄 것이 있으면 빨리 달라 닥달을 하니 놀랄 수 밖에.

"보라색 눈 달고 다니는 놈이 보낸 거 달라고."

순간 그는 플란츠를 향해 살기를 뻗을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물론 그런 그를 보는 플란츠도 정말 열심히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몰랐다.

"지금, 당장."

더운 것도 짜증나고, 체이스가 굳이 서신을 또 보내는 바람에 또 한 번 전서구 노릇 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앞에 선 놈이 끝까지 발뺌하려는 것에도 짜증이 난 '연두색 눈 달고 다니는' 왕자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발뺌하면 저 놈 그냥 발칸에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놈은 날카로워진 눈빛을 감추며 편지 하나를 플란츠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바람 같은 속도로 멀어졌다.

아르센에게 전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를 통해 보낸 편지인지 평소보다 크기가 조금 크다. 뿐만 아니라 항상 돌돌 말려있기만 했던 그것이 오늘은 제대로 접힌 채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 가능한 빠르게.

그리고 겉면에는 이런 짧은 글자만 적혀 있었다.

굳이 그것을 봉인해 둔 이유야 단 한가지다. 칼리안이 아닌 다른 이가 미리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문양 없는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의 겉면에 적힌 그 문장을 잠시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 아닌데."

원치 않게 체이스의 글자를 질리도록 봐온 플란츠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저 글자가 눈에 거슬렸다. 그것도 많이 거슬렸다. 분명 체이스의 필체였으나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러니까 마치, 누군가 체이스의 글씨를 완벽히 흉내내어 써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 미세한 차이를 한 눈에 알아차린 플란츠가 편지를 내려다보며 이것을 그냥 모르는 척 칼리안에게 전할 것인지를 잠시 고민했다.

- 부우욱.

그리고는 과감히 편지 봉투를 찢어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매라 해도 세크리티아에서 카이리스까지 날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칼리안은 바로 어제 체이스 쪽과 대화를 한 뒤 올라와서는 고래 울음이 어쩌고 하며 주절거렸다.

매 편에 편지를 날려보내고 난 이후에 체이스와 칼리안이 소식을 주고 받았다는 소리일테니, 누군가 체이스의 필체를 흉내내어 칼리안에게 말을 전하려 했다는 사실이 체이스의 안위에 이상이 있다는 의미는 아닐 터였다.

'그놈이 커피에서 바다 비린내를 맡은 이유가 적혀 있겠지.'

그래서 플란츠는, 어차피 이 편지를 칼리안에게 전달해봐야 칼리안 표정이 또 한번 거무죽죽하게 변하는 것 말고는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고 그냥 뜯었다. 칼리안은 세크리티아 쪽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절대 알려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또 한 번 말 안듣고 속 잘 썩이는 형님 노릇을 할 수 밖에.

안에 무슨 독이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 레릭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으나, 플란츠는 신경쓰지 않고 편지를 펼쳐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하."

그 후에는 곧바로 어딘가를 향해 발을 옮겼다.

칼리안이 있을 체르밀 궁 말고, 아르피아 궁 쪽을 향해서.

평화로운 남쪽 바닷가 마을에 사는 웬 뱀 한마리가 이상한 짓 벌이려는 것 같다는 사실을 칼리안 말고 칼리안 아빠한테 일러바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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