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유령(4)
- 달칵
수국을 우려낸 차에서 은은한 향이 올라왔다.
꽃잎이 내려앉아 있는 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시고 또 잠드는 건 아니겠지?"
기억에만 남아있는 낯선 방법으로 취하게 된 휴식을 준 것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리안느가 체이스에게 해가 될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 전 자신이 직접 건네주었던 민트차에 무엇이 들었었는지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아리안느는 평온한 일상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잠 깨라고 주는 거야. 그렇게 잤으면 이제 일 해야지."
"아리안느."
가볍게 대꾸하고 넘기려는 아리안느를 부른 체이스가 아리안느의 눈을 깊이 바라봤다.
"그러지 마."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너무 많이 들어있을 그 말에, 아리안느가 못 알아들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차를 마셨다. 설탕과는 또 다른 깊은 단맛이 입 속을 가득 맴돌았다.
"무리하지 마. 더 나서지 않아도 괜찮고 내 걱정도 안해도 돼."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그 눈에는 곧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나 그렇게 위태롭지 않아.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피할 생각 없어."
찻잔 속의 수국 꽃잎은 모두 하얀 색이었다.
그것이 언제든 보라색으로, 혹은 푸른 색으로, 분홍색으로 변할 수 있을 그런 꽃이라는 것을 체이스는 알았다.
체이스 역시 변했다.
스스로에 대한 면죄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당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명분이란 결국 자기 합리화의 다른 말일 뿐이다.
저깟 꽃송이 하나도 디디고 선 땅이 달라지면 색을 바꾸는데, 사람이라 하여 바뀌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귀가 길었는데 잘랐고, 말을 못하지만 수어로 혼을 내고, 새도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하고. 아이스크림도 잘 먹고. 그리고······ 잘 웃습니다.
찻잔에 띄워져 있던 하얀 꽃잎 하나가 찻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반대로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의 편린 위에 떠올랐다.
- ······ 살아있어요. 그래서 괜찮습니다.
베른이 잃은 것. 그리하여 얻게 된 것.
자신의 생을 모조리 잃어버린 베른이, 모든 것을 잃게 된 대신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단 하나.
그것이 히나였다.
그것이 체이스에게도 정당성이며 명분이었다. 면죄부 따위 필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여겼다. 데블란이 기어코 칼리안과 히나를 이 땅에 불러들이려 한다면 얼마든지 막겠노라고. 무슨 짓을 하든 막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마."
제발.
이미 나락에 든 아이를 더 밀어내지 마. 제발.
"싫어."
아리안느의 답은 빨랐고, 곧았다.
자신이 체이스 몰래 칼리안과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에게 무슨 비밀을 일러주었고 무슨 요구를 했는지 전부 다 꿰뚫어보고 있는 보랏빛 눈을 마주한 아리안느가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 믿어. 당신 이야기도 다 믿어.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어떻게 끝을 맞았는지, 전부 다 믿어. 의심 안 해. 정말이야."
그렇게 말한 아리안느의 손가락이 문 밖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저 사람이 더 오래 살아있게 되면 우리는 결국 같은 처지 밖에 못 된다며. 똑같은 길을 걷고, 똑같이 당신 동생이 만들어 준 그늘 밑에 숨어 있다가 똑같이 죽을 수 밖에 없다며. 그 말도 다 믿어. 그런 말 듣지 않았더라도 저 사람이 이제 사라져줘야 할 백 가지 이유는 내가 찾아낼 수 있어. 그런데 당장 테일란을 데리고 저기에 가지 않는 것은, 오로지 딱 하나. 당신 때문이야."
색깔이 바뀌어도 수국은 수국이다.
그것이 흰색이든 분홍색이든 푸른색이든, 결국은 수국이다. 르니에리가 되거나 아디니아가 되거나 시나스타가 되지는 않는다.
결국 체이스는 체이스다.
"지금 당장 상처 주는 게 뭐 어때서. 그런다고 안 죽어. 악역 한 번 하는 게 뭐 어때서. 사람은 누구나 다 나쁜 짓 하면서 살아. 당신 동생 그 정도로 나약한 사람 아니라며. 당신 동생 옆에 좋은 사람 많다며. 그럼 굳이 당신까지 거기 얽매이지 마. 그 치유사는 당신 동생이 알아서 지키면 돼. 당신은 무리하지 말고 당신 지켜. 나는 툭하면 잠 못 자고 술처먹는 내꺼 지킬거야."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있던 체이스가 한 손을 들어올려 제 얼굴을 덮었다. 낮고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내가 엄청 못미더운가보다 싶었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웃음소리였다.
"그럼 아리안느 당신은 누가 지키는데."
"우리 엄마."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대답에 체이스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얼마만에 듣게 된 웃음 소리인지 따져보는 대신, 아리안느는 그냥 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웃음을 멈춘 체이스가 그런 아리안느를 따라 같은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럼 린 후작은 누가 지키는데."
"엄마는 누가 지켜 줄 필요 없는 사람이야."
"아."
수국차는 민트차만큼 맛이 좋다.
설탕보다 덜 달지만 설탕보다 더 달달해서 좋았다.
"그런데 나 예전만큼 술 많이 안 마시잖아."
"카이리스 가기 전보다 많이 마시잖아."
"그래봐야 당신이 한 번 마시는 것보다······."
"입."
······ 응.
* * *
루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좋아했다.
창 너머로 흐르는 빗물이나 실체 없는 빛을 좋아했다. 그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으려 들었다.
그렇게나 욕심 많은 것은 도대체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루시의 주인인 칼리안이나 루시를 돌보는 히나, 그리고 루시가 제일 좋아하는 플란츠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려준 적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루시."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를 태우기에 불렀다. 못 잡을 것에 손 내밀다 실망할까봐서.
"애오옹."
왜 이것이 잡히지 않는지 묻는 것도 같고, 잡아달라 부탁을 하는 것도 같고. 그래서 플란츠는 다시 한 번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애옹."
쫓아다닐 땐 참 제멋대로 잘도 쫓아다니면서 오라고 부르면 안 오고 저 멀리서 울음소리를 낸다. 어리광인지 아니면 다른 말이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어서, 플란츠는 그냥 루시에게 걸어가 은백색의 어린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어리다고는 해도 많이 자랐다.
문 틈으로 드나들지 못할 만큼 자랐다. 덕분에 체르밀 궁 1층부터 4층까지의 모든 문에 작은 문을 하나씩 더 만들었다. 빌헬름 관도 한 차례 수리를 마쳤다. 그 작은 아이 하나가 모두에게 봄처럼 반가웠던 탓에 아무도 그것을 번거롭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레릭이 전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 쭈우욱
아무튼 그런 날을 지나 이곳 저곳에서 잘 얻어먹고 무럭무럭 다 자란 루시는 엄청 묵직해졌다. 예전에 들어올릴 때에는 폴짝 들어올려지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이제는 쭈욱 하고 허리가 길게 길게 늘어났다.
대체 어디까지 늘어날 셈인지 궁금해질 때 쯤이 되어서야 뒷다리를 바닥에서 떼는 루시의 엉덩이를 받쳐 든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사실은 고양이가 아니라 하얀 족제비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므에옹!"
그 웃음에 뭐가 들었는지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루시가 짜증내듯 시비를 걸었다.
"늘어나서 웃었는데, 왜."
그래서, 어디 가서 지고 사는 성격이 아닌 플란츠도 나란히 짜증을 냈다. 애옹! 하는 말대꾸에도 같이 말대꾸를 했다.
만약 이런 플란츠를 레릭이 본다면 내일쯤 세상이 망하려나보다 하고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볼 것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란츠는 그렇게 한동안을 루시와 싸우며 보냈다.
플란츠의 무릎 위에 앉아 또 허벅지를 꾹꾹 눌러대다가, 그르릉하는 이상한 소리를 한참 내던 루시가 꾸벅 꾸벅 졸다 기어코 잠에 든 그런 오후.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 루시입니다.'
이름이 생겼지만 오히려 더 길어져버린 이상한 목줄을 한참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루시를 따라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아무것도 가져본 적 없어서 잃어버린 것도 없을 내 형님은.
아마도 여전히 불행하리라 말을 했었는데, 하고. 문득 생각이 났다.
가진 것 없이 지킬 것만 더럽게 많은 그 놈은 지킬 것이 늘어나서 그딴 표정이었을지. 아니면 잃을 것이 생겨서 그딴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그런 생각이 든 플란츠가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잊혀진 이름이나 지나간 나이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주제에 본 적도 없는 고래 얘기만 줄줄이 늘어놓던 동생놈 말에 세대 차이를 벗어나 이제는 범 국가 차원의 지역적 문화 차이까지 느껴야 하나 싶어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커피에서 르니에리 향이 나서 싫어하는걸까 했었는데.
"바다 비린내가 나서 못 마셨나."
마시고 싶어서, 혹은 마셔야 해서 앞에 두었을 그 커피를 왜 끝내 손대지 못하고 밥만 엄청나게 처먹었는지.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진 탓에 플란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
편지는 열어보지 않았다.
"사직서는 아니었으면 하는데, 맞습니까."
의상담당자 섀틴을 만나는 동안 벌 삼아서 계속 기다리게 한 아르센을 앞에 둔 칼리안이 뜯지 않은 편지봉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기회만 된다면 루시 다니라고 만들어놓은 저 작은 문을 지나서라도 나가고 싶다는 얼굴을 한 아르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성문입니다, 왕자님. 사직서 가져오면 발칸 말고 이승에서 잘라주실 것 같아서 그냥 반성만 많이 했습니다."
사직서는 사직서라 말하면서 시말서도 아니고 사과문도 아니고 반성문이란다. 그 단어 선택마저 마법사다워서, 그 내용이 한껏 궁금해진 칼리안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편지를 내려다봤다.
"심심할때 볼게요."
그리고는 편지를 열지 않은 채 테이블 한 쪽에 그대로 내려놨다.
그런 칼리안의 태도를 보아하니 당분간 아르센을 위한 안네루시아가 세뉴 강에 뜰 걱정은 없는 것 같아서, 아르센은 일단 안심했다.
그 뒤에는 시스파니안의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체르밀 궁의 3층에 머무는 마법사 겸 소드마스터의 침실에 놓인 마법 금고에 들어갈 편지 하나를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를 고민해봐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금고를 통째로 없애야 하나.'
침투 과정은 고민하지 않고 일단 금고 여는 법부터 고민하던 미친 따까리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바로 그 금고 속에서 나오는 하해와 같은 용돈 덕분에 급여가 사라진 이후 오히려 더 풍족한 주머니를 가지게 되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켜서 줄어든 급여를 대신해, 칼리안이 본래 급여의 두 배를 계속 주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금고를 없애면 안 되는 것이다.
"그냥 지금 읽어보시거나 아니면 없애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왜요. 재밌겠는데."
아르센의 반성문이라니, 이것을 왜 벌써 열어본단 말인가.
언젠가 오늘보다 조금 더 숨막히는 날이 오면 그 때 쯤 열어봐야지. 마법사들의 서신이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해왔으니, 완두콩 사는 윗방에 가도 숨이 안 쉬어지는 그런 날에 열어봐야지.
이런 생각에, 칼리안이 장난기 다분한 얼굴을 했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말린 배가 가득 들어간 녹빛의 차에서 시원하지만 단 향이 가득 느껴졌다. 그것이 아르센과 퍽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 가득한 세크리티아의 밤 바다 생각이 났다가도 빨간 불꽃이 하늘로 떠오르던 어느 밤의 인공 호수가 생각나는 그런 향이라서,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차가 꽤 마음에 든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경은 무엇을 지키면서 살고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아르센이 한동안 칼리안을 보다가, 찻잔 속의 말린 배를 내려다 보다가, 자신이 써온 반성문을 쳐다봤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해할까 하던 아르센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그냥 되는대로 지키면서 삽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 하는 눈이 된 칼리안을 향해 아르센이 퍽 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스승님 말씀도 지키고, 군단장님 앞에서 자존심도 지키고, 부군단장님이신 왕자님 앞에서 소신도 좀 지키고, 협회장님 앞에서는 겁대가리 지킵니다."
자신이 지켜온 것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이야기하던 아르센이 말을 맺었다.
"발칸도 제가 지킵니다."
지켜온 것이 많은 사람이 고작 칼리안 뿐은 아니었던 탓에, 누구나 지킬 것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나 지켜주겠다는 두 번째 따까리 앞에 놓고,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차를 마셨다.
-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맑게 빛나는 붉은 눈을 들어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럼 거기에 하나만 더 넣어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더 지키면 되겠습니까."
그것이 브리센 추종 세력이든, 제온이든, 알 수 없는 적이든.
혹은, 세크리티아의 국왕이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앉을 자리."
네가 가진 그 세력과 힘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 놓인 것 치워가면서 내 앞길 제대로 지키라고. 지켜달라고.
네가 그리하면 나는 에반을 상대하고, 플란츠를 지키고, 카밀론에 들어가고, 제온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엘프들을 만나고, 란델을 지키고, 르메인도 지키고, 어쩌면 세계도 지키고.
그렇게 나는.
"나는 히나 한 명을 지켜낼 테니."
평생을 지켜오던 것에서 자신을 끌어내린 마법사에게 그렇게, 칼리안이 부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