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2화 (203/527)

제35장. 유령(3)

아버지.

그에 대해 애써 생각하지 않았었다.

굳이 생각나는 날에는 굳은살 쯤으로 여겼다. 앓고 나면 더 단단해지는 그런 상처로 여겼다.

그로 인해 잃은 것이 많았지만 덕분에 얻어온 것들도 많았으니, 그렇게 얻어온 것으로 이렇게 살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기로 했고 그렇게 생각해서 살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고 해보려 노력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땅 어딘가에 그 뱀같은 작자가 다시 살아나 숨쉬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역시 굳이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즉위식, 미리 축하드립니다.'

어차피 그는 곧 숨을 놓을 테니까.

그가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왔든 그렇지 못했든, 굳이 그 일에 손을 대어 끼어들지 않더라도 병세는 악화될 테니까. '과거'에서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정말 몰랐던 것일까.

모르고 싶던 것일까.

- 그 과거, 어차피가 아니었어서.

아리안느는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실로 애석하게도 칼리안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알아들었다.

찻잔에 어린 물방울이 또르륵 하고 굴러 떨어졌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 읍!"

구역질이 났다.

토해내야 할 것이 화인지 욕인지 기억인지 미련인지 자책인지 후회인지 알 수도 없고 사실 그 모든 것들을 구분할 수도 없었지만 치미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구역질이 났다.

베른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척 하는 것으로 베른을 지켜온 체이스처럼 체이스의 어둠을 애써 눈치채려 하지 않는 것으로 체이스를 존중한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저 말을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

그러니 베른은,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애써 모르고 싶었던 것인지.

- 세자 저하는 절대로 말 안하려고 했고 나도 끼어들 생각은 없었는데 상황이 좀 묘하게 되어서, 아무래도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았어요. 내 맘대로 잣대를 둬서 미안해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예상했던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아리안느가 이런 말을 건넸다.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계속 비밀로 묻어두려던 것을 아리안느 마음대로 칼리안에게 알렸다고.

- 체이스 왕세자께 다른 일이 생겼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가까스로 침착을 가장하며 이렇게 물었다.

체이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면 테일란이 아리안느의 집에 계속 머무르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불안해진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으니까.

- 아뇨. 아직은 별 일 없어요. 집무실이고, 그냥 자고 있어요. 당신이랑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내가 재웠어요.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 것 같은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반지 너머로 전달되지 않을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아, 또 재웠어······."

칼리안은 생각할 것이 있을 때 잠을 안 잤고 체이스는 생각할 것이 있으면 잠을 못 잤다. 덕분에 체이스는 불면증을 버릇처럼 안고 살았다. 그것을 보다못한 아리안느는 꼬박꼬박 체이스를 재우기 위해 열을 올렸었다.

문제는 아리안느가 쓸 수 있는 마법 중에 '슬립'이 없었다는거다.

- 너무 자주 그러지는 마십시오. 수면제 버릇되면 안 좋으니까.

- 아. 예전에도 내가 그랬어요? 걱정 말아요. 나는 세자 저하랑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 거니까.

그 언젠가와 똑같은 대답.

문득, 키리에의 등에 업혀 이 방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키리에와 술 마신 날이 많았고 때문에 키리에가 베른을 업고 매번 첨탑에서 내려왔던 일을 이야기했던 날.

현실과 과거의 경계를 잊어버린 채 잠에 빠져들었던 그 날.

딱 그 날같은 기분이 들어서 칼리안은 얀이 애써 만들어 준 차디찬 민트차에 시선을 두었다. 그 외의 다른 것에는 눈을 두지 않기 위해서 차 위에 띄워져 흔들거리는 민트잎에만 시선을 두었다.

과거와 지금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실로 애석하게도.

- 아무튼 세자 저하 깨기 전에 얘기 끝내야 하니까 다시 말하자면. 아까 나한테 왜 굳이 내전을 감수하느냐 물었는데, 그건 당신이 오해했어요.

마치 그런 칼리안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리안느가 다시 본래 나눴던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 저하가 나에게 테일란을 보낸 것은 단지 어머니와 우리 집안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전하와 칼을 맞대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저하는 충분히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테일란의 보호를 받아들였을 뿐이지 다른 뜻 없어요. 군사들을 모으고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나는 깨끗하게 딱 한 사람만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에요. 다른 피 흘리지 않고서.

데블란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도록.

다른 누구도 죽을 일 없이 오로지 그것 하나만 하겠다는 소리다.

- '과거'의 전하가 지금보다 더했는지 덜했는지는 내가 아는 게 없지만, 지금 전하는 완전히 개자식이에요. 솔직히 세자 저하가 전하를 밀어내면 귀족들은 좋아하면 좋아했지 반발할 일 없어요. 그걸 바라는 귀족들도 꽤 많고요.

체이스와 아리안느가 내전을 일으킬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했고, 체이스가 왕관을 물려받는 것에 귀족들이 내전을 일으킬 일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 계속 설명하세요. 듣고 있으니.

- 전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을 전하는 몰라요.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들이는 것이 전하라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도 전하는 몰라요. 나는 그저 이번에 나를 습격했다 도망친 그 괴한이 텐실 치유사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말했을 뿐이고, 엄마는 그 말에 화가 나서 텐실인들의 세크리티아 입국을 더 강하게 막고 있을 뿐. 전하와 직접적으로 대치한 적 없어요. 그러니 전하 역시 함부로 군사를 보낼 수는 없을거예요.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그것이 지극히 사적인 이유라 하더라도, 린 후작이 텐실에 대한 태도를 강경하게 바꾸는 것은 충분한 명분을 가진다. 제 딸이 위험할 뻔 했다는데 같은 일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힘을 지닌 어미가 조금쯤 과한 대응을 한다 해서 그 진짜 의도를 의심할 수는 없을 터였다.

- 나는 세자 저하의 칼은 쓰지 않을 거예요. 저하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상관 있어요. 어쨌거나 지금 이 곳에는 당신이 없고, 그런데도 과거와 똑같은 일을 한다는 건 저하가 스스로를 이해시킬 제대로 된 명분 없이 왕관을 뺏어오는 꼴이 난다는 뜻이니까.

과거에는 베른에 대한 복수, 혹은 베른을 보호하기 위해 데블란에게 불려오는 치유사를 죽여 없애버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런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데블란의 가시 가득한 품에서 꺼내 올 베른이 없음에도 데블란의 죽음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면, 체이스는 단지 왕관을 빼앗기 위해 친부의 치료를 방해한 아들이 될 뿐이니까.

- 귀족들이 아무리 지금의 전하에게 불만이 많다 한들, 전하의 방식이 아무리 잘못됐다 한들, 전하의 죽음에 개입하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저하에게 있어 무조건 찬탈이에요. 그런데 내가 아는 세자 저하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나마 당신이 있던 때라면 당신을 이유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베른의 복수를 위해 데블란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 혹은 칼리안을 위해 지금의 칼리안과 아무 상관 없는 데블란을 죽음에 처하게 하는 것. 그것들에는 체이스가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용서할 수 있을 이성적인 명분이 없었다.

데블란을 그토록 증오한 베른조차 데블란을 아버지라 불렀지 않나. 그렇게 해서라도 아비에게 칼을 뻗지 않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체이스라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체이스는 데블란의 아들이니까.

그러니 아리안느의 말은, 지금의 체이스가 과거와 같은 일을 또 하게 된다면 명분도 없이 아비를 해친 아들이라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지낼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뜻이었다.

- 난 내 사람이 스스로를 이해시킬 수 있을 명분도 찾지 못한 채로 피를 묻히고 평생 그 일에 짓눌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의 현명함이 죄책감으로 인해 흐려지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세자 저하는 굳이 그 일을 벌이겠대요. 당신 앞길에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면서. 나는 그런 저하를 이해하기 때문에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해서 저하가 망가지는 것도 못봐요.

마땅한 소리다.

지금의 체이스가 베른으로 인해 데블란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 맞다. 칼리안으로 인해 데블란을 죽게 하는 것은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일이 맞다.

그리고 아리안느는 체이스가 죄의식에 휩싸여 살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체이스는 그 때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아닌가. 있지도 않은 일을 핑계로 일을 벌이지는 말아야 한다고.

-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할거예요. 지금까지 전하가 벌인 일들만으로도 나한테는 충분한 명분이 되니까. 그런데 온전히 나 혼자서만은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도와달라고 연락했어요. 솔직히 나 지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알고 있고 당신에게 무슨 말로 사과해야 할지 모를 만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난 당신보다 내 정혼자가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아리안느는 이렇게 덧붙였다.

체이스가 죄의식에 휩싸여 살지는 않았으면 했고, 자신에게는 데블란을 처벌해도 될 명분이 있으니 체이스를 대신해서 나서겠다고. 그러니 도우라고.

- 미안해 할 필요 없습니다. 이기적인 것 아니니까.

조금 쓰게 웃은 칼리안이 말했다.

어떻게 자신이 아리안느를 이기적이라 하겠는가.

- 얘기해줘요.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인지.

- 텐실의 치유사는 이 곳에 못 와요. 말했지만 절대로 오지 못하게 할 거니까. 그리고 전하는 지금 귀족들과 정면으로 싸울 수 없어요. 그러기엔 너무 병들었어요. 그러니 엄마가 만든 명분을 무시하고 강제로 치유사를 들이는 대신 그 명분을 들이대지 못할 다른 치유사를 부르려고 할 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한 아리안느가 잠시 말을 멈췄다.

또르륵, 하고 또 하나의 물방울이 컵을 타고 흘러내릴 때 쯤 그 말이 이어졌다.

- 분명히 손을 뻗을 거예요. 다른 사람 목숨은 촛불 끄듯 없애면서 자기 목숨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누구든 어떻게든 일단 불러서 낫기만 하면, 그때가서 우리를 다 죽이든 무릎 꿇리든 입을 막고 자기 방식으로 다시 덮으면 된다고 생각할 사람이니까. 그런데 전하가 부르는 것이 텐실의 치유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막을 명분이 없어요.

설마.

- 그리고 텐실의 치유사가 아닌 또 한 명의 치유사가 누구인지, 전하는 알고 있어요.

과거에는 없었고 지금은 있는 사람.

텐실의 치유사도 아니고 엘프 치유사도 아닌 단 한 사람. 궁지에 몰린 데블란이 손을 뻗을 사람.

- ······ 히나.

그 특별한 이름을 읊조린 칼리안의 입에서 재밌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것을 듣지 못한 아리안느가 칼리안에게 하고자 했던 긴 이야기의 결론을 말했다.

- 그러니까 오지 말아요. 전하가 무슨 이유를 가져다 대든 무슨 핑계를 대든 오지 말아요. 당신이 데리고 있는 그 치유사가 절대로 이 곳에 오지 못하게 해줘요. 전하에게서 등 돌리는 일, 이번에는 당신이 해줘요.

체이스가 절대로 칼리안에게 부탁하지 못할 그 말을 아리안느가 칼리안에게 했다.

- 미안해요. 정말로.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애써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의 그림자가 유령이 되어 눈 앞에 일렁이는 것 같아서.

* * *

고래 울음.

"이유를 몰라서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나 큰 짐승이 무엇이 그리 서러워서 그런 울음을 내는지."

어제는 하늘에서 별이 내리는 이야기를 하더니, 오늘은 별이 뜬 밤 바다에서 들려왔다는 고래 울음을 이야기했다.

또 왜.

"온 몸을 뒤틀면서 울면 그런 소리가 날까. 제 살점을 다 뜯어먹히면서 울면 그런 소리가 날까. 어떻게 울면 그런 소리가 날까."

뜬금없이, 그토록 큰 짐승을 본 적이 있느냐 묻더니 그렇게 큰 짐승의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서러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새카만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채로.

그러니까, 또 왜.

나는 이제 막 내 방에 왔을 뿐인데 왜 저 새까만 놈이 새까만 차를 앞에 놓고 시커멓게 죽은 눈을 하고 앉아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은 채로 고래 울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궁금해서, 차마 가까이 가겠다고 배를 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높은 절벽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멀찍이서 달이 반짝이는 그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살짝 오므린 손을 제 눈높이로 들어올려 보이더니 아주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무언가를 흉내내어 보였다.

"그냥, 천천히 물 위로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면서 그냥. 숨을 쉬고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평화로울 뿐이어서, 울음소리를 낸 것이 정말 저 짐승이 맞을까 하고 또 궁금하게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플란츠를 향해 말을 건네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단지 칼리안으로 앉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서, 플란츠도 다른 말 없이 그 앞에 마주 앉아 이야기 들어주기를 하고 있었다.

또 왜 저러는지, 무슨 일이 있기에 또 저딴 얼굴이 됐는지 묻지 않은 채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지 않으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안 나서. 그래서 하마터면 고래 울음을 모르고 살 뻔 했는데. 그 고요한 짐승이 그렇게 울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저도 같이 서러워진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던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대지 않은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플란츠를 향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오래 전에 그 소리를 여기에서 또 들었었는데."

플란츠는 그냥 한 번 천천히 눈만 감았다 떴다.

특별한 대답을 바라서 쳐다본 것이 아니었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 날의 기억이 났던 탓에, 고래 울음을 다시 듣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자 했었습니다. 모르고 지나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런데 오늘 조금 먼 곳에서 그 소리를 한 번 더 듣게 되어서."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는 안다.

언제나 평온하다는 그 거대한 바다 짐승이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에 나와야 한다는 것을 플란츠도 안다. 물 밖에 나온 채로는 생을 이어가지 못하면서도, 숨을 얻으려 물 위로 고개를 치미는 모순을 겪어내야 살아갈 수 있음을 안다.

"이번에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냥 지나칠걸 하고 후회를 해야 할지. 아니면 이제서야 그 소리를 알아들은 제 귀를 원망해야 할지. 그것을 모르겠네요."

그러니 고래 울음 소리를 냈다는 것이 정말 플란츠와 체이스가 맞았을지. 아니면 제게 있어 삼키지도 뱉지도 못할 독만 가득한 이 곳에 올라와 숨을 쉬고 있는 칼리안일지.

플란츠는 그 중 무엇이 답인지를 알려주는 대신 그냥 어제 했던 것과 같은 말만 건넸다.

"밥먹고 가."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을 해봐도 정답을 모르겠어서, 뭐만 했다 하면 허기가 드는 그 머릿속에 그냥 어제처럼 오늘도 밥이나 채워넣고 가라고.

그런 플란츠를 한참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 숙여 웃음을 터뜨렸다.

"또 밥먹으래."

뭐만 했다 하면 배고픈 줄 아는 저 파릇파릇한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웃다보니 진짜 배고픈 것 같아서 그냥 계속 웃었다.

이제 짖다 짖다 못해서 방금 너 나한테 반말했냐고 묻는 듯한 연두색 눈동자 무시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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