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1화 (202/527)

제35장. 유령(2)

태양이 만들어내는 가장 경이로운 순간.

아쉬울 만큼 짧고, 짧은 만큼 소중한 석양의 빛.

아리안느는, 붉음보다 온화하고 푸름보다 따뜻한 석양같은 그런 아름다운 빛을 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 계속 대답 안 할 거예요? 시간 많아요?

물론 눈에 든 것이 그리했다는 말이지 입에 든 것까지 그랬다는 소리는 결단코 아니다.

- 아, 내 정혼자가 놓고 왔다던 게 당신 맞아요?

-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줘요.

순식간에 '아리안느의 정혼자가 놓고 왔다던 거'가 되어 버린 칼리안이, 머릿속을 계속 울려대며 빨리 답하라 재촉하는 아리안느에게 답을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음 말이 흘러들어왔다.

- 와, 진짜 되네. 내 정혼자가 놓고 왔다던 분, 안녕하세요? 아마도 처음이 아니겠지만 나는 처음이니까 소개 먼저 할게요. 아리안느 린이라 하고, 엄마가 법무담당관이라 어쩌다보니 나도 그 밑에서 붙들려 있어요. 아, 그리고 세크리티아 왕세자 저하가 내 정혼자예요.

대륙의 모든 나라는 분명 공용어를 쓴다.

그러니 아리안느도 칼리안이 '잠시만 기다려달라' 한 말을 못알아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소개가 곧바로 이어졌다.

제멋대로라는 말로는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할 그 성격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것을 본 얀이 소리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자님,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갑자기 반지에서 빛이 나며 칼리안이 입을 다무는 것을 로젤리타 기간 내내 보아왔었던 탓에, 지금 칼리안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채고 하는 소리였다.

최근 칼리안이 그 반지를 어떤 경우에도 빼지 않는다는 것을 얀 역시 알고는 있었겠지만, 실제로 체르밀 궁 안에서 빛이 나는 것은 처음 보았을 터였다.

칼리안은 그 반지와 이어진 팔찌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는 물론 어떻게 해서 체르밀 안에 있을 때에도 반지에서 빛이 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었다. 로젤리타에 다녀올 때 이후로 얀의 앞에서 반지를 이용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얀, 내가 이따 설명해줄게. 미안해."

"괜찮아요."

그러나 얀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궁금하지만 참는다는 것이 아니라, 칼리안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테지만 굳이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표정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칼리안이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칼리안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먼저 궁금해하는 법이 없는 새끼코끼리가 아니던가.

"필요하신 것 있으면 불러주세요."

때문에 얀은 이렇게 담백한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고마워."

미리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에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얀에게 상황을 좀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당장은 아리안느가 대화를 걸어온 경위 확인이 먼저였다.

태평하게 자기소개부터 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좋지 않은 급박한 상황에 연락을 취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어찌됐건 체이스 역시 칼리안과 같을 것이 아닌가. 분명 어떤 경우에도 그 팔찌를 풀어놓지 않을텐데, 대체 무슨 이유와 사정에서 아리안느가 대화를 걸었는지는 빨리 확인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 반갑습니다, 아리안느.

- 아. 원래 이름으로 불렀나 보구나. 그래요, 반가워요.

아리안느는 2서클의 마법사이기도 했다.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수련 도중에 마음을 접었다. 세크리티아에서 마법사를 특별 취급하지 않아서였거나 집안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리안느 스스로 마법사라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해서였다.

아무튼 아리안느의 반응을 본 칼리안은 체이스가 자신의 비밀을 아리안느에게도 이야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잘 된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

체이스에게 있어 아리안느는 언제나 하늘에 떠 있는 큰 별과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리안느라면 테일란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체이스의 마음을 붙들고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려줄 것이 분명했다.

- 그럼 나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본래는 서로 이름만 부르며 편하게 말을 주고 받는 사이였던 탓에 저도 모르게 이런 대답을 한 칼리안이 낭패한 얼굴을 했다. 아리안느가 어떤 이름을 불러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그럴게요. 그럼, 칼리안.

그리고 아리안느는 곧바로 이렇게 대꾸함으로써 칼리안을 두 번 놀라게 했다.

아무리 먼저 허락했고, 또 아무리 타국이라 하더라도 왕족의 이름이 아닌가. 그럼에도 조금의 고민 없이 왕자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저 당당함이 여전한 것에 한 번 놀랐고, '베른'이 아닌 '칼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칼리안은 아직, '베른'이라는 이름을 기억에 담으려면 체이스의 경우처럼 스스로 그 이름을 떠올리거나 앨런 혹은 키리에처럼 칼리안에게 직접 이름을 전해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 저하 얘기로는 우리가 꽤 친했다는데 나는 기억이 안 나요. 특별히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미안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어차피 나중에 만나서 다시 친해지면 될 일이니까 서로 신경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겠죠?

칼리안이 머리를 부여잡고 작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빨리 대답 안 한다며 시간 많은지 타박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사설이 길어서야. 게다가 미안해 할 생각 없다니, 이 얼마나 아리안느다운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 네. 괜찮습니다. 다시 친해지면 될 일이니.

- 말 잘 통해서 좋네.

어련히 잘 통할까.

당신이 나한테 알려준 것이 얼마나 많았는데.

- 아무튼, 칼리안. 부탁할 것이 있어서 내 멋대로 연락을 했어요.

- 얘기하세요. 무엇이든 도와줄테니까.

이 말에 꽤 오랫동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조금쯤 불안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쯤, 아리안느로부터 다시 답이 왔다.

- 아, 진짜 이상하다. 저하랑 말하는 게 똑같아. 테일란이 엄청 닮았다고 하던데 진짜 닮았나보네요.

미안해하지 않겠다더니 아플 만한 곳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툭툭 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꼭 치료해야 할 곳을 들춰보는 의술사의 손길 같아서, 칼리안은 아파하는 대신 오랜 기억 속의 친구를 떠올리듯 미소만 지었다.

- 아무튼 부탁할 건 별 것 아니고······.

별 것 아니라던 아리안느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 세자 저하 좀 살려줘봐요.

그리고는 이렇게 별 것 아닌 부탁의 말을 꺼냈다.

지극히 가벼운 말투로,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칼리안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부탁을.

* * *

빌헬름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빌헬름 관의 밖에서는 그냥 성격 나쁜 둘째 왕자이지만 빌헬름에 들어서는 순간 완벽한 부군단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플란츠에게 쓸데 없이 말을 거는 일이다. 자칫하면 완벽히 성격 나쁜 부군단장을 마주하게 될 수 있었다.

둘째는, 발칸의 상징이며 모두의 구원이자 이 땅의 빛이신 치유사 히나를 함부로 귀찮게 하는 일이다. 히나에게 쓸데 없는 치료를 부탁하는 등의 일로 귀찮음을 선사하면 활짝 핀 꽃처럼 웃는 3왕자를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히나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중 세 번째.

발칸에 들어오는 신입들에게 모든 선배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지키기 힘든 바로 그것.

제멋대로 빌헬름과 체르밀을 오가는 은백색의 고양이 루시에게 함부로 먹을 것을 주는 일.

"애옹!"

"안돼."

그 냄새 좋은 것을 왜 인간 너 혼자 처먹느냐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깜빡 속아서 자칫 흰 빵 한 입이라도 넘겨주게 되는 날에는, 완벽히 성격 나쁜 부군단장의 얼굴을 한 둘째 왕자와 히나를 모두 만나게 된다. 굳이 히나가 걸음하게 되는 귀찮음을 유발했으므로 부록 삼아 꽃 같은 3왕자도 만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그것은 곧 제 발로 세뉴 강을 건너가겠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리라.

"애오옹!"

때문에, 아르센 다음으로 유능한 5서클의 전격 계열 마법사 니들렌은 매우 난처한 얼굴로 루시를 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쾌유를 빌 때 건네주는 아디니아 꽃잎을 생각나게 하는, 연보라색과 분홍색의 사이 쯤 되는 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스트리샤 거리 끄트머리에서 꽤 유명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남동생이 만들어 준, 얇은 베이컨과 하얀 치즈가 가득 들어간 호밀 샌드위치를 꺼내 든 것이 화근이었다. 체르밀 궁에서 느긋한 잠을 자고 나와 히나 혹은 플란츠를 찾아 빌헬름까지 온 배고픈 루시가 그 맛좋은 냄새를 맡아버린 것이다.

"안돼. 이건 내 꺼야."

"므에오옹!"

칼리안의 말 레이븐은 왕족의 말들을 위해 따로 키워낸 풀과 채소가 아니라면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다던데, 혈기왕성한 저 고양이는 도무지 가리는 법을 몰랐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 먹으려 들었다.

덕분에 플란츠가 루시를 보며 제 주인을 쏙 빼닮았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할 니들렌이, 씩 웃으며 품 속에서 종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루시를 만나면 주려고 동생에게 부탁해 따로 준비해두었던 삶은 닭고기였다.

"이거 먹어. 이건 먹어도 돼."

"냐옹!"

그것이 꼭 베이컨일 필요는 없었던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닭고기를 받아가 짭짭 먹기 시작하는 루시를 보던 니들렌이 샌드위치를 한 입 먹으려 했다.

"뭐야."

하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부군단장인 2왕자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한여름의 한가롭고 여유로운 점심 시간에 불어닥친 설풍같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니들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맑은 연두색 눈이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 눈치 챈 니들렌은 재빨리 입을 열어 설명을 했다.

"소금 넣은 것 아닙니다, 왕자님."

루시가 이미 거의 다 먹어가는 닭고기가 샌드위치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으므로, 그제야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니들렌을 쳐다보며 말했다.

"넌 왜."

"저는 소금 넣은 것 먹는데요."

너는 왜 다른 마법사들이랑 같이 안 먹고 여기서 루시한테 닭고기 뺏기면서 혼자 빵 뜯고 있느냐는 질문에 소금 넣은 것을 먹는다는 대답을 듣게 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아듣는 칼리안이 이상한 놈이라는 것을 플란츠도 안다.

그렇다 해서 굳이 질문을 정정해가며 다시 물어볼 만큼 궁금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루시를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루시 간식 챙겨준 것을 잘했다고 해야할지 고맙다고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은 둘 다 말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 왕자님."

그런 플란츠를 향해 니들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려 그 플란츠를 앞에 둔 채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잠시 우물쭈물하던 니들렌이 말을 이었다.

"어제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아서······."

아스트리샤 거리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 중 플란츠와 연관 있을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었었다. 그러다 어제 칼리안의 탄생일 축하연에서 혼자 빌헬름 관으로 돌아오는 플란츠를 보고는 문득 그 생각이 나서, 레넌이 무사해 다행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 뒤 그 일이 과연 플란츠에게도 다행한 것이 맞을지 생각을 해보다가, 정말 쓰잘데기 없는 오지랖만 부렸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겉으로 에반 브리센 후작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왕자의 가족관계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와는 많이 다르지 않던가. 칼리안 역시 후궁 프레이야의 동생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지내는 듯 했으니 말이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전날 니들렌으로부터 말을 전해 들은 플란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인 뒤 지나갔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말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들었는데. 무슨 얘기를 말하는지."

니들렌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이렇게 대꾸를 하고는 저벅저벅 제 갈길을 갔다.

혹시라도 그 이야기를 전한 것이 누구인지 알려지면 생각은 깊은데 인내심이 더럽게 짧은 동생놈이 달려올까봐 그냥 아예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소리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웃은 니들렌이 다시 자리에 앉아 맛 좋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었다.

* * *

별 것 아니라더니.

일국의 왕세자 목숨을 살려줘보라며 타국의 왕자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별 것 아닌 일이란 말인가. 조금 더 특별해지려면 세계 정복이라도 부탁하려는 건가.

동시에 떠오르는 여러 상념을 간신히 갈무리한 칼리안이 자세한 내용을 물으려는데, 아리안느 쪽에서 다시 말이 나왔다.

- 전하가 치유사를 찾고 있어요. 알겠지만 이 나라에 텐실 치유사가 들어오는 것은 불법이고. 그래서 우리는 입국하는 치유사들을 전부 붙잡아서 추방시키고 있고, 조만간 린 후작이 누명을 쓰고 잡혀들어갈 지도 몰라요.

민트차를 바라보던 칼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자세한 내막은 숨긴 채 현재 상황만 전해주는 간단한 내용이었으나 숨겨진 뜻까지 간단하지는 않았다.

데블란이 텐실의 치유사를 찾는다.

'과거'에도 데블란이 텐실의 치유사를 불러들였으나 실패했던 것인지, 혹은 지금의 상황이 과거와 달라진 탓에 찾는 것인지, 칼리안은 몰랐다.

다만 그것을 막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 위험합니다.

린 후작이라면 아리안느의 어머니가 아닌가. 데블란의 힘에 맞서려 하다 피해를 입게 생겼다는 말이다. 물론 그 세력이 만만치는 않았으니 함부로 가지치기를 하려 들지는 않겠으나 데블란은 지켜야 할 선의 범위가 매우 불확실한 사람이다. 언제 마음을 바꾸어 아리안느의 집에 검을 보낼지 알 수 없을 일이 아닌가.

- 테일란이 우리집에 있어요. 얼마전에 내가 술 먹고 들어오다 나쁜 놈을 좀 만났거든. 그래서 정혼자 걱정에 밤 잠 못자던 세자께서 호위기사를 보내주셨어.

연극을 했다는 소리일 터였다.

데블란의 눈을 피해서 정혼자에 눈 먼 세자 역할을 해 가며 아리안느의 집에 기사 테일란을 보내두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굳이, 왜?

- 체이스 왕세자께서는 굳이 왜 내전을 감수하십니까. 어차피 과거에도······.

- 그 과거, 어차피가 아니었어서.

치유사를 부르든 말든 어차피 죽었을 사람이 아니었음을.

그러니 체이스도 베른도, 서로가 서로에게 어둠 하나씩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들은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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