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0화 (201/527)

제35장. 유령(1)

전설이 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시간의 축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발칸의 하얀 악마들을 앞에 두고 사흘을 홀로 버틴 테일란은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두고 서서히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보면서도 국왕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우선하다 끝내 목숨을 잃은 체이스도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그리 빠른 시간에 세크리티아를 함락시킨 그 날의 플란츠도.

그래, 결국은 전설이 되었겠지.

수많은 전설과 영웅이 탄생하고 스러지는 전쟁을 떠올려버리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해진 플란츠가, 그 대단한 위인들이 만들어냈을 전설과 비교할 수 없을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든 마법사를 보며 짜증섞인 목소리를 냈다.

"어쩌라고."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 아르센.

빌헬름 관 입구에서 대자로 누워 자던 중, 새벽의 짙은 어둠 때문에 '미처 앞을 분간하지 못한' 앨런 마나실의 위대한 발에 즈려밟힌 5서클의 얼음 마법사.

새하얀 로브 한 가운데 남겨진 그 위대한 발자국을 가리켜보이며 내가 급여가 없지 자존심이 없냐 외치던 아르센의 당당함에 깊은 감명을 받은 앨런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아르센의 포부를 고스란히 실현시켜 주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1플로린의 급여를 석달동안 감봉해 준 것이다.

그 경이로운 전설이 만들어진 빌헬름 관의 계단 앞에 모인 발칸의 마법사들이 아르센의 이름을 드높여 불러대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에 푹 젖은 해면같은 몸을 한 채 뒷목을 붙들고 끙끙대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말씀을 해주셔야 제가 알고 고치지 않겠습니까."

"말했는데."

햇살 가득 드는 창가.

아르센이 가장 좋아했던 바로 그 자리를 자신의 책상 놓을 자리로 정해버린 플란츠는 한여름의 내리쬐는 햇살에 비춰 더 밝게 보이는 옅은 에메랄드 빛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그야말로 혼란한 인간 세상에서 한 발자국 비켜 서있는 듯, 실로 여유롭고 반짝이는 모습을 보인 플란츠가 넓은 집무실 한 구석탱이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비켜선 그 혼란한 세상 한 가운데에서 닳고 닳은 인간 군상을 죄 담은 듯한 마법사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뭘 키울지 고민 안해도 될 것 같았다고."

인세에서 벗어난 이 귀한 얼굴에 곱게 붙어있는 입을 굳이 귀찮게 한번 더 열어 설명해주자면, 어제 너는 그냥 개 같았다는 소리다.

저 비뚜름한 표정을 똑같이 따라해가며 웃어주고 싶은 마음은 당장 태양에 닿아 녹아 없어질 만큼 드높은데 모가지가 제대로 안 움직이는 것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제가 취해서 사람 아닌 것이 됐다는 말씀은 알아들었습니다만."

카밀론 가서 굳이 무슨 개를 키울지, 개 이름은 뭘로 정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아르센 한 마리 데려다 놓으면 되겠다는 말이라는 것을 못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책상에 놓인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아르센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밤새 계단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탓이 더 큰지, 아니면 얻어맞은 탓이 더 큰지, 혹은 앨런에게 밟혀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목을 가눌 때마다 어마어마한 근육통이 밀려들었던 까닭이다.

"무슨 실수를 했기에 제 목이 이렇게 됐는지를 알 수가 없잖습니까."

가까스로 아프다는 말을 참아낸 아르센이 자신의 뒷목에 든 시퍼런 멍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분명 여러 다른 방법으로 재울 수 있었으나 굳이 키리에가 때려놓은 딱 그자리를 정확히 다시 한 번 때려 놓은 칼리안 덕에, 멍은 아예 짙은 보라색을 내고 있는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아침 아르센을 찾아온 히나는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왜 다친 건지, 알아요. 자상한 왕자님께서, 그냥 두랬어요.

왕궁에 머무는 텐실 치유사의 치유술보다 베로니카의 단호한 태도를 더 빨리 배운 듯한 그 냉랭한 모습을 떠올리던 아르센이 다시 한 번 플란츠를 쳐다봤다.

다친 것 고쳐주지 말라는 절대 자상하지 않은 말을 한 자상한 왕자님의 부탁을 잘 들어준 히나는 그런 말만 하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휙 가버렸었다. 그랬으니 아르센은 더더욱 불안할 수 밖에.

"다행한 일 아닌가."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더위를 쫓겠다며 냉기를 풀풀 풍겨대는 마법사 때문에 입고 있던 옅은 노란색 가디건을 벗고 화려한 금장 장식이 된 짙은 자주색 재킷을 어깨에만 걸치듯 입었다. 소매에 팔을 끼우기에는 밖이 더웠던 탓이다.

나가려 준비하는 것이 분명한 모습을 보던 아르센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밖."

그래, 밖이겠지.

여기서 어디 더 들어갈 구석도 없으니 당연히 밖에 가는 거겠지. 그런데 그 밖이 체르밀인지 아르피아인지 빌헬름 수련장인지 그걸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닌가.

그러니 제발 좀 제대로 대답해주면 안되겠느냐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아르센이 굳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물었다.

"바깥 어디 가시는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왜."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고 예뻐하는 루시가 자신보다 말이 많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말이 짧은 저 왕자가 과연 알고 있을까.

아르센이 정말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일에 방해된다며 밖으로 내보낸 시종 레릭이라면 그래도 저 말을 온전한 한 문장으로 바꿔서 번역해 줄 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다가,

'내가 왜 너같은 놈한테 내 행선지를 알려야하나, 마법사.'

라고 번역해 줄 것 같아서 그만두고 대답만 전했다.

"기사단에 가실 거면 같이 가려고 그럽니다."

아르센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또 한 번 올라갔다. 무엇 때문에 아르센이 행선지를 묻고 같이 나서겠다 하는지를 눈치챈 까닭이다.

"감시하는 건 싫은데."

"제가 뭐하러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을 감시합니까. 그럴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습니다."

진심 가득한 투덜거림에 플란츠가 곧바로 대꾸했다.

"기사들이 나에게 아무 말 못하게 하려는 것을, 감시가 아니면 뭐라고 하는데."

이번엔 루시보다 긴 말이었으나 아르센은 오히려 대꾸할 말이 없어진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르센은 정말 아무 티도 안 냈다.

그저 기사단에 간다면 같이 가겠다는 말을 했을 뿐.

단지 그 한마디 속에 숨은 뜻을 곧바로 눈치챈 플란츠의 말에, 아르센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감시 아닙니다."

"브리센 자작이 돌아온 것은 이미 알아."

에반 브리센이 레넌 브리센을 도로 꺼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으니, 굳이 따라와서 그 말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할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 좋은, 왕자님이, 그 일을 알지 못하게, 해 달라고, 자상한 왕자님이, 전해달랬어요.

오늘 아침 히나가 아르센을 찾아온 것은 칼리안의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칼리안의 생일 축하연에 레넌 브리센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플란츠에게 알려지지 않게 해 달라는 소리였다. 그동안은 플란츠의 시종인 레릭의 입만 단속하면 되었다지만 이제 파다하게 퍼졌을 그 소문을 브리센 소속인 기사들도 당연히 전해들었을 테니까.

그러니 기사들이 플란츠에게 건네는 이야기 속에 혹시라도 레넌에 대한 말이 들어있을까 걱정한 칼리안이 그나마 가장 자연스럽게 아르센을 찾아갈 수 있는 히나를 따로 불러 말을 전해달라 부탁을 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것을 플란츠가 다 알고 있단다.

아르센이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린 채 플란츠를 쳐다봤다. 레넌이 돌아온 것을 알면 저 좋은 머리가 무엇을 또 가늠해낼지 그것부터 걱정이 된 탓이다.

"따라오지 마. 그 이상 생각 안 할 테니까."

이 말에, 조금 묘한 얼굴이 된 아르센은 저도 모르게 질문을 했다.

"그걸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아르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발치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어리석은 생물들 중 한 마리를 바라보는 눈을 한 채였다.

"다른 생각들을 안 멈추면 되는 것 아닌가."

쉼없이 다른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레넌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막으면 된다는 소리.

제 할 일을 엄청난 속도로 해 나가면서 아르센과 이야기를 하고 기사단을 둘러보고 밥을 먹고 쉬는 그 모든 순간에, 쉼없이 다른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레넌에 대한 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 걱정 마시라고 내 아우님한테 전해."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를 따져볼까 하다 또 한 번 올라오는 목의 통증에 인상을 찌푸린 아르센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생각을 많이 하면 된다니. 그것 참 똑똑하신 건지 무식하신 건지 알 수가······ 응?"

닫힌 문을 하릴없이 쳐다보다 이렇게 중얼거리던 아르센이 퍼뜩 입을 다물었다.

'생각 많아서 돌아버린 놈은 사람이라서 돌아버린 거니까.'

'우리 스승님이 지인짜 좋아하시겠네에.'

갑작스레 찾아온 어떤 기억의 편린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던 까닭이다.

오래지 않아 아르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날 칼리안에게 삿대질을 하며 엄청나게 무례한 말을 하는 이 기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일단 어제 칼리안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게 왜 다행이라는 것인지부터 생각을 좀 해내야 할 듯 해서, 플란츠의 좋은 머리에 대해 새삼 놀라는 것도 잊어버린 아르센이 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리고 한 두 시간 쯤이 흐른 뒤.

아르센은 책상 서랍에 들어있던 고급스러운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굳은 결심을 한 얼굴을 한 채 펜을 들었다.

그리고 곧 비장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과 각오를 담아 제목을 썼다.

'잘못했습니다.'

사직서 들고가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아직 어디 하나 잘리고 싶은 생각은 없던 아르센은 장렬한 사과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에반 브리센 후작이 생각한 바와 같았다.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해야 할 에반이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 어떤 경우에도 보인 적 없던 정중한 모습으로 르메인에게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빠르면 다음 주 중으로 진행이 될 것이라 합니다. 광장에서 행사가 같이 있을 예정이라서 오늘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슬레이크 경이 올 거예요."

프레이야를 추숭하는 예식에 나서게 되는 주인공은 당연히 칼리안이다. 그러니 그때 입게 될 새로운 예복을 맞추기 위해 의상 담당자 섀틴이 왕궁에 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메를린 말고 내가 직접 만날게."

이런 말에 얀이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옷 고르는 것이 질색이라며 늘 메를린에게 의복을 부탁했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다만 칼리안이 그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할 의향이 없어 보였으므로 얀은 질문을 덧붙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그프리드 소공작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음 주 토요일부터 시간이 괜찮으신지 여쭈어달라고 합니다. 대련이요."

유리잔 안에 든 민트 차를 살짝 흔들어 짤랑, 하는 얼음 소리를 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매일같이 마법과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으니 언제가 되었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세이렌 경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고?"

텐실의 왕세자에 대한 정보를 모아봐 달라는 이야기를 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과거' 왕세자가 탄 마차 사고를 조사하던 새들이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더욱 조심해달라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래도록 연락이 없는 상태였다.

칼리안의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카이리시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사하고 있어서, 아마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조심해서 조사해달라고는 했으나 수도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은 한 적 없던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다. 미간을 오므린 얀이 말했다.

"어디 계시는 어떤 왕자님이 또 한밤에 몰래 구하러 3층 밖으로 뛰어내릴 일은 없어야죠."

얀 몰래 아르센과 에우리아를 구하러 밖으로 뛰쳐나간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다.

어찌됐건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가 위험해지는 것은 칼리안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기다리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아마 오늘 중으로 헤르츠 경이 올 거야. 편지 같은 것 몰래 주고 돌아가려고 할 텐데, 잘 붙들어서 내 앞에 데려다 줘."

그레이 쪽을 속여서 데리고 있으려는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 위해서였다. 본래대로라면 칼리안은 뒤로 빠진 채 아르센을 통해 그레이를 움직이려 했었는데, 전날 고주망태가 된 모습을 보게 된 덕분에 더 이상 그 일을 아르센에게 맡기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때문에 그레이를 몰래 만나 직접 대화를 해보려는 참이었다.

"왕자님."

그 말을 들은 얀이 칼리안이 앉아있던 곳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시종 얀 말고, 지그프리드의 첫째 아들이자 칼리안의 보호자로서 할 말이 있던 탓이다.

"또 위험한 일 하시려는 거죠."

그렇게 물어오는 얀을 보던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하여튼 얀은 얀이다.

아르센 불러와달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해 왔는데, 오늘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저렇게 지레 걱정을 하고 있다.

칼리안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정말 걱정하지 마. 이번에 만날 사람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해."

엄청 겁먹고 있을 것이라서.

칼리안이 생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그것을 믿지 못한 얀이 입술을 앙다물어보이던 그 때.

- 이렇게 하는거야? 맞나?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오며 반지가 빛났다.

- 되는거야, 아닌거야? 들리고 있는건가?

이 생을 살며 아직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리 없는 그 목소리가 칼리안의 반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리안느······?'

칼리안의 손에 들린 민트차에서 다시 한번 짤랑, 하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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