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5)
칼리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도 가끔씩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환상통을 남긴 그 대단한 얼음 마법사는 아마 6서클이 아니었을까 라고.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왕자니임."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수준이 됐으니 그 플란츠 밑에서 잘 지내다 베른의 앞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플란츠에게 술주정을 하다가 발칸에서 잘렸거나 모가지가 잘렸거나 뭐든 하나는 잘렸을테니까.
그나마 다행한 일은 칼리안이 아르센의 유능함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아직까지는 어디 하나 잘라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고, 조금쯤 불행한 일은 같은 이유로 인해 발칸에서 잘라내 줄 생각도 아직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칼리안은 지금 빌헬름 관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아르센을 앉혀놓고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채였다. 남들이 밟고 다니는 계단에 칼리안이 앉아있는 것을 누가 본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테지만 이 시간의 빌헬름 관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굳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 꼬르륵
그리고 아까부터 뱃속에서 들려오는 참 낯선 소리에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하필 눈 뜨자마자 받은 것이 라프라니아 종이꽃이었던 탓에 하루종일 뭐 하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음을 다시 깨달은 칼리안이 다 체념한 듯 말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제가요, 왕자님. 이렇게까지 징징거릴 생각은 없었는데요."
만약 조금 더 다행한 일 하나를 찾아본다면 사람이 굳이 술을 처먹어가며 움직이는 쓰레기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칼리안이 참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 더 불행한 일 하나는 칼리안이 지금 세 번 째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 정도랄까.
"알고는 있으니 다행입니다, 헤르츠 경."
쉽게 말해 무려 세 번을 참은 칼리안이 깊은 한숨같은 대꾸를 하며 이 순간 누구를 탓해야 할지를 조용히 손꼽아 따져보기 시작했다.
일단, 보리 발견한 놈.
그 놈부터 따져본다.
그리고 보리 심어본 놈, 보리 키우기 시작한 놈, 보리 잘 키워서 남긴 놈, 남은 보리로 뭐 할지 고민해본 놈, 남은 보리로 술 만든 새끼.
그래. 그 새끼가 잘못했다.
"그래서 지난번부터 제가 그렇게 말씀 드렸잖아요, 왕자님. 부군단장이신 왕자님 살리겠다고 왕자님 손에 있는 것 털어내는 일은 안 하셨으면 좋겠다고요."
"나 그렇게 욕심도 없고 미련도 없는 그런 사람 아닌데. 왜 다들 모르지. 그리고 그렇게 대책없이 사는 사람도 아닌데, 어쩐지 그것도 잘 모르는 것 같고."
그래도 일단은 아르센이 영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또 아니라서. 미쳐버리고 난 뒤에 두어바퀴 쯤 돌아버릴 것 같긴 했지만 일단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런데 부군단장이신 왕자님도 그게 싫어서 오늘 저를 그렇게 보내신 건 알겠는데요, 왕자님. 그런데 제가 정작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요, 왕자니임."
그리고 아르센은 제 할 말을 했다. 아무 소리도 안들린다는 듯, 대화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머릿속에 든 것을 순서대로 꺼내놓는 쪽에 가까운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말을 삼켰다.
"아······ 어떡하지······."
누가 내 따까리 이렇게 만들어놨냐고.
맥주 만든 그새끼 대체 누구냐고.
말인지 욕인지 모를 것을 꾹꾹 삼켰다.
"헤르츠 경."
지금까지 세렌티 외에는 특별히 누구 하나 원망하고 살아본 적 없던 칼리안이 맥주 만든 놈을 향한 온갖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아르센을 부른 뒤 말을 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 이것저것 참 많이 들키면서 살고 있기는 한데. 정작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저보다 열 세 살이 어린 둘째 왕자와 말싸움을 하다 쫓겨나서는 열 살 어린 하프엘프 기사와 술을 마신 뒤에 열 네 살이 어린, 아니 이제는 열 세 살이 어린 셋째 왕자의 앞에서 주사를 부리던 스물 아홉 살의 마법사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사실 매일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수도 없이 다짐을 했으면서도 아침에 눈 뜨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다시 잠에 들 때마다 버릇같이 같은 생각을 해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아르센을 쳐다봤다.
여전히 정신머리 못차린 것이 분명한 그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누구일까, 하고."
술 마셔서 정신나간 놈 앞에서, 술 안 마시고도 정신나간 놈이 그렇게 속내를 끄집어냈다.
"누가 물어보면 당연하다는 듯이 칼리안이다 하고 대답을 하는데. 나 스스로도 그것이 당연한 답이라 생각은 하는데. 그것이 정말일까 하고 한 번을 더 되새겨 보면 문득 문득 잘 모르겠다 싶은 그런 때가 있거든. 아직도, 버릇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 버릇이다.
매일같이 다짐을 해도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니 어쩔 수가 없어서 버릇인 것이다.
"혹여 이런 날에는 파랗게 내리는 별이 보고싶기도 하고. 그 작은 바다에서 나던 비린내가 여전히 나는 그리워서."
술 취한 아르센이 이 이야기를 다 듣고도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 칼리안은 계속 아르센이 모두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이어나갔다.
"그런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어도 되나, 그럴 자격이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치밀듯이 변덕이 드는데, 내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런 내가 나를 칼리안이라 여겨도 정말 괜찮은걸까. 그것을 아무리 고민해봐도 정답을 모르겠어요. 솔직히 이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잖아. 나 말고 이런 일 겪은 놈이 있어야 묻든 말든 하지."
누구도 겪어보지 않았을 흔치 않은 경험담을 입에 담으며, 머릿속으로는 흔하지 않았던 꿈을 떠올렸다.
- 알아. 나는 괜찮아.
그 뒤에는 소리 없이 바람만 뱉어내며 웃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지금은 일단 칼리안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아챈 아르센이 칼리안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나는 평생이 가도 답을 내지 못할 것 같다 했고 온전히 그 애의 생을 대신하진 못할 지도 모르겠다 했어요. 조금 더 안심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도무지 거짓말을 못하겠어서. 그런데 괜찮다고 하더라고."
칼리안이 낯설고도 익숙한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그 뒤에는 하얗게 빛나는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는 그렇게 허락을, 해줬는데. 정작 나는 괜찮지가 않아서. 내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게 도대체 어떻게 괜찮을까 싶어서. 그래서 나는 여전히 궁금해해요. 버릇처럼. "
이렇게 말을 맺은 칼리안이 '그런데 이 얘기를 왜 꺼냈더라' 하고 중얼거리다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욕심도 버리고 미련도 안 남기고 살기에는 빚진 것이 너무 커서, 나는. 정말로 잘 살아야 하거든. 그러니 나는 욕심도 미련도 많아야 하고, 대책없이 다 털어내고 살 수도 없는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가끔씩 그렇게 다 털어내는 것처럼 보여도 다 포기하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 믿어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일까."
희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멍청한 눈으로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르센이 또 한 번 헤죽거리며 웃었다. 그 꼴을 본 칼리안이 내일 아침 아르센의 기억이 남아있기를 바라야 할지, 아니면 망각의 축복을 기원해줘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이.
"사람 맞았네, 우리 왕자니임."
아르센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무려 왕자의 얼굴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그러셨거든요, 왕자님. 생각이 많아서 돌아버린 놈은 사람이라서 돌아버린 거니까 이왕 나보다 돌은 놈 찾아서 따라다닐 거면 생각 많아서 돌은 놈 따라다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역쉬이 사람 하나는 잘 골랐네. 우리 스승님이 지인짜 좋아하시겠네에."
왕자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더니 돌은 놈이란다. 미친놈이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에 또 큭큭거리며 웃던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한 여름 밤, 계단에 기대서 밤새 잠들어 있어도 입 돌아갈 일은 없다는 것은 경험상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자신의 옷부터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어쩐지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은 아르센의 뒷목을 유심히 내려다보다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헤르츠 경."
기억이 제발 좀 남아있었으면 싶기는 한데 그랬다가는 내일 아침 체르밀 궁 앞에 사직서 내려놓은 채로 무릎꿇고 손 들고 있을 것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발칸의 어엿한 부군단장인데 그렇게 둘 수야 있겠나.
- 퍽!
두고 두고 잘 부려먹어야지.
* * *
늦은 시간 불려나왔을 것이 분명한데도 정성은 똑같다.
먹기 참 좋을 만큼 잘 구워진 소고기 스테이크 위에, 와인에 조려낸 양송이 소스가 보기 좋게 올라가 있었다. 오리 가슴살 구이와 곁들여진 무화과 퓨레의 맛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잘 구운 감자에서 풍겨 오는 버터 향도 좋았다. 푹 삶은 완두콩이 들어간 스프 색깔 때문에 잠깐 웃을 뻔 했지만 아무튼 그것 역시 맛은 있었다.
"본가에서 하루 쉬라니까."
주방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란 이야기와 함께 이런 말을 건네는 칼리안을 보며 얀이 싱긋 웃었다.
"나중에요. 오늘 말고요."
오늘 얀은 단 한 번도 칼리안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티를 안 내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또 걱정을 끼쳤음을 안 칼리안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말만으로도 이미 하루를 쉰 기분이 된 얀이 레릭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사실 그냥 바로 3층으로 가서 잠이나 잘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저 앞에 앉은 형님께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아르센 치우고 오라고 말이다.
생각 많은 놈도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을 테고, 생각 많아진 칼리안도 하루종일 먹질 못했고. 그래서 결국은 또 이렇게 식사를 하게 됐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여러 요리들을 보던 칼리안이 가장 끝에 놓인 스튜에 시선을 두며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그 얼굴에 무슨 말을 할지가 잘 떠올라 있던 탓에 플란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내가 시킨 것 아니라고.
거짓말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이 좋아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뜻 대답했다.
"네."
그리고는 토마토 소스에 가지와 호박을 넣고 함께 끓여낸 홍합 스튜를 신나게 먹었다. 어차피 입맛 까다로울 플란츠는 먹지 않을 테니 사양 않고 혼자 다 먹어치웠다.
구운 오리고기 조금과 완전히 익은 스테이크 몇 점, 그리고 파프리카 뺀 샐러드 조금으로 식사를 끝낸 플란츠가 조개를 잔뜩 먹고 고기도 먹고 감자도 먹고 꿀에 잰 밤까지 잔뜩 집어먹는 칼리안을 질렸다는 듯 쳐다봤다.
오러 감추는 마법을 해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배는 많이 고픈 것을 어쩌겠나. 때문에 칼리안은 저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플란츠를 싹 무시하며 양껏 배를 채웠다.
그렇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포만감 가득한 식사를 마친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마 전하께서 신경을 쓰셨을 것 같은데."
지나가는 듯한 말투.
여느 때와 다름 없을 낮은 목소리.
"······ 모르셨을 테니."
머리 꼬리며 몸통까지 제대로 붙은 것 하나 없는 여전히 짧은 말.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아마도."
라프라니아 종이꽃.
아무리 생각해도 르메인이 그렇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꺼낸 소리였다.
굳이 르니에리를 떠올려가며 과한 손을 쓰지는 않겠노라 했던데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으로 안 그래도 정신 없었을 칼리안이 직접 거기까지 신경을 썼을 리 없고, 칼리안을 아는 앨런이 그 정도로 생각 없는 오지랖을 부렸을 리 없고. 그러니 르메인일 것이라고.
소같은 르메인이 이번에는 꽃향기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만 생각을 한 것 같다고. 그런 말이었다.
플란츠를 물끄러미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것을 신경쓰셨습니까."
어쩐지 하루 종일 푹 삶아져 있더라니.
자신 때문에 생명 없는 꽃으로 생일 축하를 받게 된 것을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다.
지금의 칼리안을 떠올렸든 옛 칼리안을 떠올렸든, 어느 쪽에게도 그것이 축하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리 없을 테니.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제가 어리지는 않은데요."
그리고는 텅텅 빈 접시 하나를 가리켜 보이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저는 꽃보다 이게 더 좋을 나이라서."
남은 조개 하나 없이 싹싹 먹어치운 그것을 본 플란츠가, 꽃보다 조개 스튜가 좋으려면 대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 것인지를 묻고 싶은 얼굴로 강조하듯 대꾸했다.
"아니라고, 나."
거짓말은 못해도 거짓말 하는 사람을 못 알아 보는 것은 아니라서.
"잘 먹었습니다. 내 형님께서 잘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이렇게, 생일 맞이로 한 번을 짖은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