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98화 (199/527)

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4)

에반 브리센 후작의 눈꼬리가 쭉 올라갔다.

이 순간 누군가 그를 향해 씹다 뱉은 쑥빵이라는 이야기를 했음을, 그리고 그 말을 꺼낸 이가 당장 에반의 숨통을 끊어놓을 생각을 하다 깊이 잠들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찌감치 저택에 돌아와 곧바로 서재에 틀어박힌 채 가만가만 화를 가라앉히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다스려지던 울화통이 말 한마디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생각을 좀 하고 말하라 했지 않느냐. 빛 못 보던 시간 동안 생각하는 법도 잊었나보구나. 독이나 자객을 보내라니, 그게 통할 것 같다고 생각했느냐?"

덕분에 에반은 기어코 자신의 울화통을 터뜨린 레넌을 향해 매서운 눈을 하며 화를 냈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언급한 에반을 보며 레넌이 함께 성을 냈다.

"갇혀있던 얘기는 왜 꺼내십니까?"

챙겨질 건 전부 꼬박꼬박 챙겨졌으나 어디인지 알 수 없던 곳에서 빛 한 줌 보지 못하고 1년을 살았다. 감옥보다는 나았으나 그렇다 해서 살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유도 모르고 갇혀 살았던 날들을 떠올린 레넌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멜피르 폴룬 그 놈이 손을 쓴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누가 저를 가둬놨는지 알아 볼 생각도 안하시고, 왜 놈에게 상단을 팔았는지도 설명 안 하시는 것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연회장에 끌고 가시질 않나, 제 딴에는 아버지를 생각한다고 하는 말에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못 보던 사이에 왜 이렇게 변하신겁니까?"

레넌은 자신을 감금시킨 것이 에반이라는 사실이나 그 동안 감금되어 있던 곳이 에반의 집이었음을 전혀 몰랐다. 영문도 모르고 1년 가까이 어딘가에 갇혀있다 나왔는데 에반은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 줄 생각을 하질 않았다.

실리케의 죽음과 상단의 신속한 매각, 대략적으로 굴러가는 상황 등을 꼼꼼하게 따져보면 그 모든 일의 주범이 바로 에반임을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겠으나 애석하게도 레넌은 그렇게까지 생각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구해낸' 에반이 범인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다, 무슨 말만 하면 멍청하다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대는 태도에 화가 날 뿐.

"네놈 머리가 2왕자 반만 따라갔어도 내가 이렇게 속 터질 일은 없었을 것을! 오래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나가거라."

플란츠 반도 못따라가는 그 머리가 누굴 닮아 나온 것인지는 모르는 채 이렇게 이야기한 에반이 레넌을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는 탄식인지 여전한 짜증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저것을 꺼내놓을 일은 없었을텐데."

그나마 조금 더 머리를 굴릴 줄 알지만 그만큼 욕심도 큰 그레이가 아니었다면 레넌을 다시 꺼내놓을 일이 없었을 터였다. 굳이 답답함을 감수해가며 레넌을 꺼내주었는데 그런 보람도 없이 일만 꼬였으니 지금 속이 터질 지경인 것이다.

"그나저나 3왕자를 어찌 해야 하나."

귀족들의 앞에 레넌을 내보이고 일파만파 퍼지는 소문을 그레이가 접해듣게 할 겸, 앨런과 칼리안의 속을 좀 뒤집어 둘 겸 손꼽아 기다린 연회날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어처구니 없는 꼬투리를 제대로 잡히는 바람에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에 대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내가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으니 다른 놈들도 큰 소리를 못 낼 것인데."

한참을 고민해도 칼리안을 막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질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리 유쾌하지 않은 한 놈의 얼굴이 떠오른 에반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플란츠를 찾아가봐야 하나."

플란츠를 찾아가서 방도를 알려달라 조언을 구해볼까 하다가, 오래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번 더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 좀 써 가며 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 까닭이다. 놈에게 또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 어느정도는 더 고민을 해 보고 그래도 생각나는 것이 없으면 그 때 찾아가보기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

얄팍한 자존심을 세우느라 플란츠를 멀리하기로 한 것이 칼리안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정임을 모르는 채로.

* * *

자박, 자박 하고 발을 옮기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서로 보폭이 다른 그 발 소리는 잠시 겹쳐 울리기도 했다가 또 잠시 엇박으로 울리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맞아들어가다가 엇나가면서도 결국 같은 속도로 걷고 있는 것이 괜스레 재미가 있던 얀이 웃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어느새 훌쩍 자라 자신과 눈높이를 맞춰오게 된 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련하더라도 내일은 말고 조금 뒤에 와. 오늘 왕자님 심기가 안 좋으셔서."

에반 때문에 칼리안 기분이 좋지 않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매년, 칼리안이 한 순간 태도를 달리한 직후였던 작년에도, 생일을 맞이한 칼리안은 항상 날이 서 있었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귀족들과 실리케의 앞에 나서야 했던 까닭이었든 혹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든 언제나 칼리안은 그래왔으니까.

다만 그런 일을 드미레아에게 굳이 일러 줄 이유는 없었으므로 얀은 그냥 간단하게만 이야기를 했다.

칼리안을 저택에 숨겨두었을 때 에반을 상대해가면서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가 생각났던 드미레아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저도 곧바로 시간이 나지는 않으니까요."

칼리안에게 칼리안의 사정이 있다면 드미레아에게는 드미레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소공작인 드미레아 역시 다른 일정들이 빼곡했으니, 아무리 그것이 칼리안이 알려주는 검술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매일 궁을 찾아와 수련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고 다시 산책하듯 발을 옮겼다.

"그래. 다음 주 이후로 괜찮은 시간 알려주면 일정 조정할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궁에서 나가지 못하는 칼리안을 대신해 드미레아를 저택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칼리안은 시간도 늦었으니 오랜만에 본가에서 하루를 지내고 오라 했지만, 그런 말을 건네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탓에 선뜻 알겠다 대답하지 못한 채였다.

- 매앰, 매앰.

마차가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 조용히 발을 옮기고 있을 때, 발소리에 잠을 깬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밝게 빛나는 왕궁의 불빛 때문에 잠에 들지 못한 것인지 매미가 울었다. 매미 소리를 들은 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가 밝아서 매미가 잠을 못 자나보다."

"혼자 갈 수 있으니 들어가세요, 오라버니."

그렇게 대답하는 드미레아의 목소리가 조금 커져 있었다.

피할 수도 없는 여름 매미 소리를 얀이 얼마나 꺼려하는지, 또 왜 그렇게 꺼려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드미레아였으니 말이다.

"그게 참 이상해, 드미레아."

드미레아의 말에 대한 대답인듯 아닌 듯한 말을 꺼낸 얀이 살짝 웃었다.

"작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차피 늘 체르밀 궁에만 있었고 가끔 저 소리가 들릴 때면 안으로 피하곤 했었는데······. 작년에는 집에 가는 내내 들었을텐데도 매미 소리를 내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

이렇게 말한 얀은 가만히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귀기울이며 천천히 걷다 다시 말했다.

"다녀오는 내내 왕자님이 하도 사고를 많이 치셔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그래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거야. 내가 매미 소리를 들었나 안 들었나, 하고."

로젤리타에 가는 길 오는 길 내내 두루두루 잘 부수며 돌아다닌 칼리안에게 온 신경을 쓰는 바람에 매미가 우는지 안 우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금 들려오는 매미 소리도 그렇게 꺼려지질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드미레아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늘 드미레아 역시 겪었지 않았나. 칼리안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큰 사고를 칠 수 있는 사람인지.

"정신 없었을 만 합니다."

"응. 얼음 넣은 민트 차를 계속 만들어다 드렸던 건 기억이 나는데, 매미 소리는 기억이 안 나. 정말 하나도."

이렇게 다시 한 번 말한 얀이 드미레아와 똑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슬레이만이 그렇게 하듯 손을 올려, 어엿한 지그프리드의 작은 방패가 되어 자신까지 계속 걱정을 해주고 있는 드미레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손을 올린 것이 얀이 아니었다면 당장 그 손모가지가 날아갔을 테지만, 어쨌든 드미레아는 싫은 내색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하지 말고 나도 걱정하지 말아, 드미레아. 나도 자라고 있거든."

서로 다른 발자국 소리같이 자라는 속도도 조금 다를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국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똑같으니까. 훌쩍 자란 드미레아 만큼 얀도 키가 크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웃던 얀이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인지 묻는 얼굴이 된 드미레아를 내려다보던 얀이 울상이 되어서는 말했다.

"나 키가 너무 빨리 커지는 것 같아. 이러다가 내기에서 이기면 어떡하지?"

사실 새끼 코끼리는 꽃같은 우리 왕자님과의 키 크기 내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새끼 코끼리 아빠가 너무 큰 코끼리였던 탓에, 아빠 코끼리를 잘 닮은 새끼 코끼리는 하루하루 쑥쑥 잘 자라고 있었다.

덕분에 자칫하면 칼리안과의 내기에서 이겨먹게 생긴 얀이 어떻게 하면 키가 덜 자라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안 드미레아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이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느냐고.

딱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 * *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꿈뻑 꿈뻑 하고 눈을 감았다 떴다.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고 있는 빨간 눈이 다시 한 번 시야에 들어왔다.

"왕자님?"

새파란 눈으로 새빨간 눈을 본 아르센이 반갑다는 듯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의 끝이 제대로 꼬부라져 있던 탓에 할 말을 잃어버린 칼리안이 잠깐 하늘을 봤다.

실로 아름다운 밤 하늘에 노란 별이 무수하다.

그것을 하나하나 세어보다가, 너무 많은 별을 속으로 가늠해내기가 어려운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별을 세느니 차라리 곁에 서 있는 연두색 놈을 보면 마음이 좀 차분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앗! 우리 왕자님이 여기 계시네!"

소용 없는 짓이다.

꼴보기 싫은 얼굴을 암만 봐도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우리 왕자니임. 칼리안 왕자니임."

아······ 진짜 미친놈이 진짜 미쳤나보다.

칼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웃기 시작했다.

키리에에게 반쯤 들려있다시피 부축받은 채 왕궁으로 들어온 아르센이 헤벌쭉 웃었다. 그것을 본 키리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조금 전까진 얌전히 잘 기절해 있었는데 갑자기 깼습니다.

라는 뜻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큭큭거리는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빌헬름 관 앞마당을 울렸다.

이 순간에도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도 웃지 않는 플란츠가 정말 신기했지만 그것을 따질 겨를이 있나. 내가 웃기면 웃는 거지.

"왜······."

입 밖으로 미처 나오지 못한, 쟤 왜 저러느냐고 묻고 있는 손가락으로 아르센을 가르킨 채 한참을 웃어댔다. 흐느끼듯 흔들리는 어깨를 따라 손가락 끝이 마구 흔들렸다.

그 손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르센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정신머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니임, 제가요. 오늘요."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 왕자님한테 가라고 했는데요, 하고 말하려던 아르센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앗! 부군단장이신 왕자님도 여기 계시네!"

움직이는 쓰레기가 여기 있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아르센을 보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치우고 와."

칼리안의 반응을 보아하니 지그프리드 관에서 아르센을 만난 것 같지가 않아서 안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 아르센이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는데,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무슨 이유인지 알려줄 리도 없고.

때문에 뭔 일인지 눈치 채기 전에 그냥 알아서 자리를 피하겠다는 뜻이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걸음을 옮기는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아르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것은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니임."

하늘은 맑고, 노란 별이 떴고.

배는 고픈데 밥을 못 먹었고. 미친 마법사가 술에 취해서 실려왔다.

"말해요. 들어줄 테니까."

그러니 뭐가 그렇게 속이 상해서 이렇게 술을 처먹고 왔는지 그냥 얘기하라고.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왕자님. 제가요."

맥주 네 잔 마신 기운을 빌어 사양 않고 말을 시작했다.

그동안 칼리안에게 하고 싶던 말이 너무 많았지만 꾹꾹 눌러담아 두기만 했던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한참을 흘러나왔다.

플란츠가 체르밀 궁에 돌아가고 키리에가 늦은 수련을 다시 한 번 하는 동안, 하기 싫었던 일, 하고 싶은 일, 힘든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전부 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쌓고 쌓아뒀던 말들을 모으고 모아서 그렇게 한참동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