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96화 (197/527)

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2)

버릇이 됐다.

버릇이라는 것이 쉬이 버려질 수 있다면 그것에 왜 굳이 버릇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따로 부르겠는가.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버릇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겠지.

- 무슨, 일, 있어요?

그러니 히나도 어느새 버릇이 된 것이다.

주저하듯 아주 작은 소리로 문을 두어 번 건드린 뒤 똑똑똑, 하고 점점 더 커지는 소리로 노크를 한다. 작은 소리는 그 간격도 항상 달랐고 횟수도 천차만별이었지만 점점 더 커지는 그 소리는 정확히 세 번.

버릇이 된 그 독특한 노크 소리에 누구인지 묻거나 돌아가라 하는 대신 들어오라 말하는 것은 플란츠의 버릇이 되었다. 루시가 다리 위에 올라왔을 때 좀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불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주저함 뒤에 이어지는 노크소리에 곧장 들어오라는 말을 하게 된 그런 버릇 말이다.

"들어와."

버릇이 된 노크 소리에 버릇같은 대답을 하니 히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집무실 안의 어지러운 풍경을 둘러본 뒤 버릇처럼 걱정을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아르센 때문이 아니고서야 이 집무실에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앉아 서류나 들여다보고 있을 일이 있겠느냐는 말을 자신의 식대로 설명했다.

"알 텐데."

플란츠와 아르센의 사이를 모르는 이가 과연 발칸에 있을까. 그러니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물어보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하던 일을 일단 접고 히나를 쳐다봤다. 왜 왔는지를 묻는 것이다.

소리 없는 질문을 한 뒤 소리 없는 대답을 들을 준비를 한 플란츠를 본 히나가 살풋 웃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널브러진 플란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곱게 정리해두기 시작했다.

시녀로서의 버릇이 여전히 남아서일지, 아니면 그냥 루시 챙기듯 챙겨주는 것일지 모를 친절이었다. 그런 히나를 보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둬."

어차피 곧 레릭이 와서 알아서 치워갈 일이다. 지금쯤이면 플란츠가 연회장에서 사라진 것을 알았을 테니까.

이런 말에도, 대답 할 손이 없으니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얼굴로 웃은 히나가 제멋대로 정리를 시작했다. 되는대로 집어던져서 엉켜버린 타이를 잘 풀어서 돌돌 감아놓고, 셔츠 핀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베스트와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키보다도 큰 것 같은 망토를 척척 개어서는 소파 한 쪽에 놓은 뒤 플란츠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 왜, 여기, 있어요?

아르센과 싸운 것이야 늘 있는 일이라지만, 널브러진 것들을 보아하니 분명한 예복이다. 그러니 지금쯤 칼리안의 생일 기념 연회에 있어야 할 2왕자가 왜 이런데서 서류나 들여다보고 있는지 궁금할 수 밖에.

그런 히나의 말에 플란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대부분 그렇지 않던가.

어디가 아픈지를 묻는 사람이 치유사라면 저도 모르게 이곳 저곳을 알려주는 것 말이다. 그냥 아는 사이라면야 아픈 곳이 어디인지 섣불리 알려주지 않겠지만, 히나는 치유사니까.

때문에 누구나 그렇듯, 플란츠 역시 저도 모르게 성실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 감기."

물론 성실한 대답이 꼭 솔직한 것은 아니었다.

북쪽의 대사막에 삼십 분 쯤 세워두면 모를까. 이 여름 날에, 그것도 플란츠가 감기라니.

다행히 히나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을 만들어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 해서 고분고분 넘어가지도 않았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히나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 가지 말고, 잠시만, 여기 있어요.

플란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딱히 갈 곳도 없다는 말을 굳이 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드미레아의 티아라 덕분에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있을 지그프리드 관에 가서 같이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르메인의 배려인지 아니면 앨런의 오지랖인지 혹은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어떤 놈의 부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프라니아 생화라고는 단 송이도 없이 온통 빨간 종이꽃으로만 장식된 체르밀에 벌써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쯤 훈련장에서 기사들과 함께 있을 키리에와의 수련 역시, 오늘은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다.

결국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대신,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 뒤 서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히나가 잠시 밖으로 나간 뒤 다시 들어왔다.

한 품으로 루시를 힘들게 안고 있던 히나의 나머지 한 손에 들린 것은, 아이스크림이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감기 걸렸다는데."

다른 말 없이 루시를 내려놓은 히나가 딸기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며 예쁜 웃음을 지었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 아이스크림 색깔이 루시 발바닥이랑 너무 똑같아서였다.

* * *

"아, 베른 경."

발칸의 부군단장 표식이 달린 새하얀 로브를 걸쳐 입은 아르센이 빌헬름 관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다 훈련장에서 빠져나오는 키리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체르밀 궁 밖에서도 검을 소지할 수 있게 된 키리에가, 검집과 연결된 가죽 벨트의 위치를 살짝 교정하던 손을 놓은 뒤 아르센에게 목례를 보이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다크서클이 한가득 내려온 우중충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냥 어디가 아니라 영 먼 곳으로 가버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는 했으나 일단은 그렇게만 물었다.

"자네 혹시 술 생각 안 나나?"

"네. 생각 안 납니다."

"나는 생각나네."

빠른 권주에 돌아온 빠른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말한 아르센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키리에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갈 곳이 없어졌거든. 그러니 어쩌겠나. 술이나 마셔야지."

누가 들으면 엄청 많이 마시는 줄 알겠다.

칼리안의 비밀을 안 그 날 원치 않게 아르센의 눈물 겨운 주량을 알게 된 키리에는 굉장히 꺼려하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뒤로 물리려 했다. 차라리 안에 들어가서 기사들과 다시 한 번 대련을 하는 것이 낫다는 얼굴이었다. 아니면 훈련장 주변을 또 달리거나.

"갈 곳이 왜 없습니까. 할 일 많으신 분이."

"쫓겨났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

그런데 거기가 사실은 내 집무실인데 내 집무실에 갑자기 들어와서는 걸친 것 다 떼버리더니 나더러 나가라지 않겠나.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하여튼 인성 하고는.

이렇게 중얼거린 아르센이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키리에에게 설명을 했다.

앞서 아르센은 그레이와 몰래 손을 잡은 척을 했고, 덕분에 그레이가 수도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반은 그레이의 수도 입성을 대비해 레넌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플란츠는 몰랐다.

"왕자님께서 지금 쯤이면 아주 신나게 다 휘젓고 계실텐데 브리센 후작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거든."

그리고 아르센은 플란츠가 모르는 것도 함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은 브리센이랑 얽히면 안되고, 딴에 걱정은 되는 모양이고, 우리 왕자님이 다 넘겨주고 간 발칸을 제맘대로 우리 왕자님께 다시 돌려주려고 나를 쫓아낸 것은 알겠는데 정작 나는 거기에 가면 안 된단 말이지. 그런데 내가 왜 우리 왕자님한테 가서 편을 들어주면 안 되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지 않나. 그렇다고 여기서 얼쩡거리다가 부군단장님 만나면 다 들통나지 않겠나? 쓸데없이 눈치는 또 왜 그렇게 빠른지."

그레이 변경백과의 일이 있으니 브리센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왜 못나서는지를 플란츠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적당히 핑곗거리를 만들어 둘러대려 하면 플란츠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니 일단 그냥 시키는대로 나왔다는 소리다.

그런 이유로 일단 자리를 피하기는 했으나 갈 곳이 없으니 키리에에게 또 한 번 술 친구 역할을 맡기는 것이었다.

"나는 발 둘 곳이 없고, 우리 왕자님은 손에 쥔 것이 없고.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은 대놓고 챙겨줄 사람도 없고 생일 축하인지 사과인지 모를 말을 받아 줄 사람도 없는 모양이니. 그냥 두 따까리끼리 모여서 축하주인지 위로주인지 모를 술이나 한 잔 하자, 이 말이네."

정말 한 잔 밖에 못 마셨던 원수 같은 놈이 구구절절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고작 술 한 잔을 하자는데. 어쩌겠는가.

키리에는 더 거절하질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간혹 꿈을 떠올린다.

칼리안을 아는 그 누구도 그것을 기적이라, 혹은 행운이라 부르지 못할 이 생을 살게 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꾸었던 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쳤고 완전히 헤어졌으며 매일같이 거울 속에서 만나게 된 아이를.

그를 대신한 단죄라 하면 지나치게 거창한 것 같아서, 그럴 자격이 과연 스스로에게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칼리안은 그냥 앞으로 자신이 할 행동을 화풀이라 이름짓기로 했다.

몇 날 며칠이 걸리든 혹은 몇 개월이 걸리든.

그것이 내 화풀이든 아니면 널 대신한 화풀이든, 굳이 어려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화풀이를 하겠노라고.

"과분한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왕자님."

누군가를 꼭 닮긴 했는데 그것을 닮았다 여기면 그 놈한테 영 못할 짓인 것 같은 그런 비웃음을 입에 건 에반이 이렇게 말을 건네 왔다.

칼리안이 깨뜨린 잔을 치우기 위해 잠시 주변이 소란한 틈을 타 꺼내진 말이었다.

"네. 좋군요."

그런 에반을 보는 칼리안이 짧은 대답과 함께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버릇처럼 유지해오던 마법 하나를 풀어냈다.

오러가 늘어날수록 더 큰 마력을 필요로 하던 그 속박같은 힘이 해제되며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든 칼리안이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불과 2년 전, 실은 그보다 더 오래된 어느 날.

소금기 가득한 바다 비린내를 심장에 담는 심정으로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던 바로 그 어느 날이 생각났다. 그 날 만큼 속이 씻기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가벼워진 공기가 그리 싫지 않았다.

그렇게 큰 숨을 한 번 쉬고 나니 그보다 더 꼿꼿할 수 있을까 싶었던 허리가 한층 더 당당함을 지닌 채 곧게 세워졌다.

그 후 조용히 눈을 뜬 칼리안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아주 살짝 비딱해진 고개를 한 채로 에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맞으려나."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이 어쩐지 자신의 면면을 깊이 살펴보는 느낌이 든 에반이 불쾌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무엇이 안보인다 하시는지."

나는 네 것이 보이고, 너는 내 것이 안 보이고.

그것을 확신한 칼리안이 살짝 눈을 내리떴다. 샴페인 잔에 꾹꾹 갇혀있던 붉음이 사방 팔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을 그 때보다도 더 좋은 기분이 된 채로, 앞에 있는 저 놈을 이제 어떻게 요리해먹을지를 잠시 고민했다.

"무엇을 보시든, 보지 못하시든. 스스로의 미래를 살피시지요. 섣부른 욕심은 화를 자처하는 법입니다, 칼리안 왕자님."

그리고 그 기분을 제대로 망쳐놓으려 작정한 것이 분명한 에반이 이렇게 짖었다.

"살피는 중이야, 안 그래도."

칼리안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긴 속눈썹 아래에 든 붉은 눈이 미래를 살피고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이 칼리안 스스로의 미래가 아니라 에반의 모가지가 똑 떨어지는 미래였을 뿐.

칼리안이 무엇을 살피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에반이, 자신의 앞에 선 채로 태연한 대답을 내어 놓는 왕자를 보며 다시 입을 열려 했다.

"신이 나서 살피고 있어."

그런 에반의 말을 가로채며 먼저 이야기 한 칼리안이 눈을 떴다.

과연 네 검은 얼마나 빠를지. 얼마나 무거울지. 얼마나 예리하고 얼마나 매서울지.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지, 어떤 이들의 기억이 담겨 있을지. 그것을 전부 다, 남김 없이 나에게 알려줄 그 날이 언제일지. 화풀이 할 수 있는 그 날이 과연 언제일지.

"그 날이 언제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어."

봄에 만났던 그 날보다도 더 버릇 없어진 말투를 들은 에반이 눈꼬리를 찌푸렸다. 평민 출신 후궁이 왕비가 될 판에, 앞에 선 3왕자는 자신이 이미 세자위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에반의 심기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하찮은 이의 핏줄로 왕가를 더럽히려 하지 마십시오, 왕자님."

사람들은 모르지만 에반은 안다.

칼리안은 지금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작 정통성 하나 가진다 해서 가질 수 있을 자리가 아니지 않나.

흩어진 유리조각이 치워지는 동안 잠시 소란했던 주변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에반과 칼리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듣고 싶었던 까닭에 모두가 알아서 침묵을 지켰다.

어느새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이 이미 모두 치워지고 붉은 샴페인도 모두 사라졌다. 완전히 깨끗하게 돌아온 바닥을 보던 에반이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켜보이며 칼리안이 아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흔적 없이 치워지실 날이 올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칼리안은 에반의 손이 가리키는 것을 보지 않았다.

"그보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왕자에게 신변의 위협을 가하는 에반을 향해 함께 화를 내는 대신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칼리안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석류주스 안에 든 얼음조각처럼, 투명하기까지 한 맑은 미성에 소름끼치는 한기가 어렸다.

"나에 대한 예는 언제 보일 생각인지."

다만 나는 화풀이를 끝내고 나서도 제대로 살 것이라서.

언제나 그래온 것처럼 이번에도 경고만 하고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 너도 한 번 제대로 준비해서 화를 내 보라고. 그래야 제대로 다 뺏어올 수 있을 테니까.

"허리를 숙이거라. 후작."

새빨간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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