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1)
드미레아를 향한 칼리안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미소를 얼굴에 만들어보이며, 정말 짓고 싶던 짙은 미소를 손 끝으로 그려냈다.
"드미레아, 이 쪽으로."
그 후에는 이제 비어있게 된 자신의 자리로 드미레아를 직접 안내했다.
지금 이 곳에서는 짧은 숨 소리와 스치는 시선 하나에도 낙인과 같은 의미가 따르게 된다는 것을 드미레아 역시 아주 잘 알았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고개 숙여 칼리안의 환대에 응했다. 그리고 칼리안의 뒤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술렁임이 잦아들었다.
지그프리드 관에 모인 귀족들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해석하고 받아들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까지 넘겨 짚어오던 예상이 들어맞았음에, 상상만 해오던 그 날이 현실이 되었음에, 모두 굳게 입을 다물었다.
"브리센 후작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둘이 앉은 자리와 귀족들의 자리 사이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마치 가벼운 인사라도 나누는 듯한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이렇게 말했다. 그 어느때보다 시끄러운 술렁거림으로 가득한 정적 속에 혹시라도 소리가 퍼져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지금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한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알려주는 드미레아의 '가벼운 인사'에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대답했다.
"응, 알고 있어."
지금 이 자리에 칼리안 혹은 조금 전 자리를 비운 플란츠보다 신분이 높은 이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미레아와 에반보다 두 왕자가 먼저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에게는 일부러 그리하도록 미리 일러두었었다. 이미 모두 한 자리에 모여있던 귀족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아 칼리안의 욕심을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너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유겠지. 아마 곧 올 거야."
에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영향력과 지니고 있는 힘이 왕자들보다는 높은 위치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제대로 된 타이밍에 이 자리를 망치려 열심히 손가락을 꼽아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국왕 전하 드십니다!"
"······ 전하보다 자신의 힘이 더 크다고 말하고 싶겠지."
르메인의 도착을 알리는 기사의 외침과 겹치듯 흘러나온 말에 드미레아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리안 역시 그 뒤를 이어 일어났다.
앨런은 자리하지 않았다.
칼리안에게 축하를 해줄 수도, 축하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날이었기 때문에 사전에 르메인에게 불참 의사를 밝혔다.
보라색이 감도는 짙은 회색 예복을 차려입고 발 끝까지 이어지는 검은 망토를 두른 르메인이 곧바로 칼리안을 향해 걸어왔다. 그 발걸음의 뒤를 따라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 이 자리에서 화를 내며 경솔했음을 탓할까.
-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을까, 원래 그랬던 것처럼.
- 아니. 오히려 좋아하며 반겨할 것 같은데.
소리 없는 이야기들이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과연 르메인이 드미레아를 보고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그에 따라 나는, 아니 우리 가문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칼리안."
르메인은 귀족들의 예상을 모두 벗어났다.
진심을 담아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 르메인이 말 없는 미소를 지으며 칼리안을 한참 바라봤다.
그것이 정말 생일에 대한 축하인지, 아니면 성공적으로 이 쇼를 마친 것에 대한 축하인지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칼리안은 이렇게만 이야기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후 르메인은 드미레아와 짧고도 평범한 안부 인사를 주고 받았고, 비어있는 에반의 자리를 잠시 쳐다본 뒤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칼리안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그럼 이제, 3왕자를 위한 축배를."
르메인의 짧은 말과 함께 칼리안을 포함한 모두의 앞에 샴페인이 채워졌다.
붉은 술 안에서 방울방울 솟아올라 터지기를 반복하는 기포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눈에 띄지 않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생일을 축하할 때 사용되는 라프라니아의 색으로 보일 새빨간 샴페인. 하지만 칼리안의 눈으로 아무리 살펴보아도 안네루시아를 고스란히 녹여낸 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잠시 칼리안을 휘저은 복잡한 마음을 알지 못할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위대한 카이리스의 3왕자가 태어난 이 기쁜 날을 축하하는 의미로."
생명이기도, 그리고 죽음이기도 한 불꽃의 빛을 담은 샴페인을 손에 든 르메인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울림이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가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귀족들을 쭉 훑어본 르메인이 힘 있는 말투로 칼리안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이야기하려 했을 그 때.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불청객.
국왕의 축사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지금은 입장이 불가하다는 기사를 제치고 안으로 들어선, 불청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한 사람의 목소리 하나가 르메인의 말을 막았다.
신분의 구분을 떠나 그 스스로가 가진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최근에 기적적으로 찾게 된······.
"에반 브리센 후작과 레넌 브리센 자작입니다."
레넌 브리센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뒤늦게 도착한 한 사람. 바로 에반이었다.
제멋대로 연회장에 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카에라 소속 기사의 말을 뒤로 한 채로, 에반과 레넌이 연회장 안으로 저벅 저벅 들어왔다.
- 찰그랑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샴페인이 채워지기 한참 전부터 놓여 있던 석류 주스. 그 속에 가득 차있던 얼음이 녹으며 맑은 소리와 함께 조금 가라앉았다. 칼리안에게는, 얼음이 낸 그 작은 소리가 연회장에 들어오는 에반과 레넌의 발걸음 소리보다도 훨씬 크게 들렸다.
짙은 푸른 색 예복에 화려한 백금 장식을 두른 채 입장한 에반의 눈이,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서 있는 칼리안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손으로 물린 레넌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된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내심 궁금했던 까닭이다.
마치 그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석류 주스나 붉은 샴페인을 담아낸 듯 투명하게 빛나는 신비로운 눈이 에반을 향했다.
그리고 곧 거두어졌다.
레넌에게는 아예 스치는 듯한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지금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정도의 시선. 그리고 지금 당장 눈 앞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석류 주스에 조금 더 많은 흥미가 동한다는 얼굴을 한 채였다.
레넌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그 행동에 잠깐 눈썹을 들어올리던 에반이 곧 평정을 찾았다.
'하긴. 알고 있었겠지.'
사실 레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지 않나. 칼리안을 축하하기 위한 이런 극적인 날 보란듯이 함께 나타날 것임을 칼리안 역시 감안하고 있었으리라.
때문에 에반은 담담한 칼리안의 반응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비어있는 플란츠의 자리,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드미레아. 드미레아의 머리에 올려진 사연 많은 장신구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드미레아는 한 술을 더 떴다. 아예 에반까지도 쳐다보지 않았다. 르메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드미레아의 이마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 챈 에반의 눈썹이 한 번 더 꿈틀했다.
'이래서 플란츠가 자리를 비운 것이군.'
아무리 에반이라지만 그래도 두 발로 걷고 말을 하는 사람인지라. 열심히 준비한 이 깜짝 파티가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는 것과 지금 칼리안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정도는 이해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조금 빨리 와서 저것들이 입장할 때부터 모조리 지켜볼 것을!'
뒤늦은 후회를 떠올린 에반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 소리를 홀로 들은 레넌이 에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를 가둔 사람이 제 아비라는 것도 모르는 채 에반에게 '구출'되어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대접받다 이 자리에 함께 오게 된 레넌은 영문 모를 얼굴로 에반과 칼리안과 르메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 못하는 레넌 덕분에 에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일단은 의연하게, 다른 이들의 눈에 당황한 것이 절대 보여지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이 중요했다.
곧 에반이 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귀족들 중 가장 앞에 놓인 곳에 마련된 빈 자리로 천천히 걸어가 앉았다. 늦게 도착했음에 대한 사과의 말은 커녕 르메인과 칼리안에 대한 제대로 된 인사도 생략한 채였다.
- 톡, 톡, 톡.
샴페인 잔을 손에 쥔 칼리안의 손 끝이 유리잔을 톡톡 두드렸다.
에반의 밑도 끝도 없는 오만한 태도에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 참는 중이었다. 일단 지금은 에반이 문제가 아니라 르메인이 남은 말을 마저 해야 했으니까.
그러니 제발, 빨리 좀 말씀해주시라고.
이런 눈을 한 칼리안이 르메인을 올려다보았다. 르메인이 칼리안을 살짝 바라본 뒤 시선을 거두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후궁 프레이야 휘트린에게······."
그리고 비로소.
"왕비의 위를 내리겠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한 줄기 벼락같은 말이 장내를 울렸다.
소리 죽인 채 잔잔하게 이어지던 음악이 멈췄다. 축배사를 위해 들어올렸던 샴페인 잔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귀족들의 눈이 서로를 살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하고.
- 톡, 톡, 톡.
칼리안의 손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냈다.
지금 칼리안이 흥미 가득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귀족들의 소란에도 절대 동요하면 안 되었다. 좋아해서도 안 되며 르메인의 이야기에 거절의 의사를 비춰도 안 된다. 무조건 담담하게, 담담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야 했다.
'누가 앉고, 누가 일어나는지.'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했으니까.
* * *
한 가지 달라진 점과 여전한 점이 있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자신을 부를 때 더 이상 '왕자님의 형님 되시는'이라는 이상하고 긴 호칭을 더 이상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느 순간 생겨나서 어느 순간 매번 붙여오던 그것을 이제는 더 쓰지 않았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
그리고 여전한 점은, 사람이 좀 얌전해졌거나 아니면 '왕자님'이라는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부르고 있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이제 아르센은 플란츠를 '칼리안의 형님' 범주에서 뺐다. 정확히 말하자면 란델과 플란츠의 형제에서 칼리안을 뺐다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둘을 더 이상 형제로 엮으려 들질 않았다.
덕분에 좀 짧아진 듯 아니면 더 괴상해진 듯한 그 호칭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플란츠는 별 반응 없이 대답했다.
"감기."
"감기 걸리셨습니까?"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슬그머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새로 온 100명 챙기기에도 벅찹니다. 옮기시면 안 됩니다."
마법 학원의 조기 졸업자를 포함한 새로운 인원 100명이 발칸의 마법사단에 추가됐다. 뿐만 아니라 기사단 카렌과 라온의 기사들이 발칸의 기사단으로 정식 합류했다.
덕분에 찾아온 예상했던 변화는 당연히 '바쁘다'였다. 그냥 바쁜 정도가 아니라 이제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이 바빴다.
"시끄러."
썩 좋은 기분이 되지는 못했던 플란츠가 아르센과 완전히 반대편에 자리한 곳으로 가며 망토를 풀고 셔츠 핀과 타이까지 전부 풀어 소파에 던지듯 내려놨다.
레릭은 또 어디다 버려뒀는지 몰라도 아무튼 돕는 사람도 없이 푸는 것 하나는 참 잘한다. 재킷에 베스트까지 죄 벗어던지고 셔츠 차림이 된 플란츠가 소매를 걷는 것을 보던 아르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감기인데 왜 오셨습니까?"
"일."
아, 왕자님.
제가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
말이 짧은지 인성이 짧은지 고르기도 힘든 저 사람을 믿고 제가 전쟁을 냈다고요?
소리 없는 절규를 내보이던 아르센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저만치 놓인 플란츠의 책상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의 책상이었다.
발칸의 규모가 늘어나며 예상했던 변화는 바쁘다였고,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는 지금 이것이었다. 기사단에 마련되어 있던 플란츠의 책상이 아르센의 가구 없고 넓기만 한 비효율적인 집무실 안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
'내 형님께서 숫기가 없어 그렇지 알고 보면 꽤 순하시니까 잘 지내봐.'
칼리안의 판단은 정말 지독하리만치 합리적이었다.
물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저 똑똑한 2왕자가 일을 엄청 빠르게 잘 하고, 그렇기 때문에 두 부군단장이 같은 집무실을 쓰면 일의 효율이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리라는 것은 다 맞았다.
하지만 얼굴만 보고 있으면 효율은 늘고 생명이 줄어드는 둘을 한 집무실에 밀어넣어 둔 것은 정말 너무하지 않느냔 말이다. 원망 안한다더니 정말 원망을 안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단 말이다.
이런 아르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되어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마법사."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이미 백만 번 쯤 알려줬지만 저것 하나를 도저히 모르는 플란츠의 호칭을 다시 한 번 정정해주는 아르센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가."
숫기 없고 알고 보면 꽤 순한 왕자의 축객령에 숫기 많고 알고 보면 꽤 독한 마법사가 얌전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는 제 집무실인데요, 부군단장님."
다시 말하지만, 둘은 열 세 살 차이였다.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를 흐트러뜨린 플란츠가 연두색의 눈에 날을 세우며 아르센을 봤다.
"나가라고."
그 뒤에는 그 반짝이는 연두색 눈으로 서류를 훑어내려가며 흘려보내듯 덧붙였다.
"내 아우님 생일인데 축하는 해야 하지 않나."
생일 축하 같은 소리 한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는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려던 아르센이 잠시 창 밖을 봤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그프리드 관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보며 꽤 오랫동안 생각하던 아르센이, 벽에 걸어두었던 새하얀 로브 하나를 걸쳐 입으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 생신 축하드리고 오겠습니다, 부군단장님."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 그 직위를 제대로 보여주는 황금 월계수잎 문양이 잠시 반짝이다 문 뒤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일러주지 않고 그저 축하해주라는 이야기만 했으니 에반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배신하지 않은 플란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류로 다시 눈을 돌렸다.
* * *
칼리안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그날.
그날보다 더 할지언정 결코 덜하지는 않을 소란이 연회장을 메웠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앞을 살피던 칼리안의 눈이 에반을 향했다. 에반 역시 칼리안의 눈을 직시했다.
에반이 제 자리에서 일어나 르메인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이 어떤 의미인지 에반이 모를 리 없을텐데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것을 보던 칼리안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샴페인이 든 잔에 맺힌 물방울을 훑어내리듯 움직였다. 잔 위에 투명한 호선이 또 한 번 만들어졌다.
"아아."
르메인이 부탁을 들어주었고 드미레아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 플란츠가 시기 적절하게 자리를 비웠다.
게다가 실로 기쁜 일이 하나 더 있음을 방금 확인한 칼리안이 그려내던 호선의 끝에서 손의 힘을 풀었다. 손 끝을 벗어난 샴페인 잔이 허공에 잠시 맴돌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 쨍그랑······!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피와 같은 붉은 샴페인이 새하얀 바닥에 번져나갔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르메인에게로 향하던 에반의 생각 없는 발이 멈췄다. 멋모르고 퍼져나오던 소음도 멈췄다.
그렇게 지그프리드 관의 소란을 잠재운 칼리안이 바닥에 퍼지듯 흘러나온 새빨간 술을 내려다봤다.
이제야 저것이 라프라니아 빛으로 보인 까닭에, 하루 종일 마음을 누르던 옛칼리안에 대한 상념에서 벗어난 칼리안이 흡족한 얼굴을 하며 살짝 웃었다.
에반의 오러가.
"······ 드디어."
보.
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