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94화 (195/527)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7)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하얀 찻잔.

그 안에 담긴 붉은 빛의 차에 눈길이 간다.

향도 느껴지지 않고 맛은 더더욱 알 수 없어서, 체이스는 오로지 그 차의 빛을 닮은 눈동자만 떠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주앉아 있던 이가 잔뜩 쉬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얘기하거라."

제 '하나 뿐인' 아들조차 믿지 못해 그저 오래 된 감기일 뿐이라며 숨기고 있었으나, 체이스는 저 목소리가 왜 그리 갈라지는지 알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왜 그리 기침이 늘었는지 역시 체이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앞에 앉은 이는 그것 역시 감기라 하였다.

"서북부 귀족 모임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으로······."

"네룬드 남작이 특별한 일 없이 모임에 참석할 위인이 아니지 않더냐."

의심.

"이미 지난 달에 남작의 세력을 전부 잘라내시지 않았습니까. 이번 모임에서 남작이 다른 귀족들을 만나 요청한 것은 식량 지원 뿐입니다. 이번 태풍으로 피해가 컸던 탓에······."

"체이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 버릇만은 여전하다. 고칠 생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부름에, 말을 멈춘 체이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전하."

요란한 기침이 집무실을 울린다.

-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서북부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인데. 굳이 저들끼리 만나 나눈 이야기가 고작 식량 뿐이었을까.

이 답답한 곳에 다시 갇히게 된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8월의 태양보다 붉은 저 찻물의 색 때문에 타는 듯한 더위가 더 심하게 느껴짐에도, 체이스의 머리는 한없이 차갑게 식어들어갔다.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서북부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인데. 굳이 저들끼리 만나 나눈 이야기가 고작 식량 뿐이었을까."

얼마 전 떠올린 기억과 똑같은 말이 이어졌다.

이유 없는 의심.

끝날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을 의심의 말.

그때 나는 무슨 대답을 했더라, 잠시 생각해보던 체이스가 기억 속의 자신과 똑같은 대답을 내어놓았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전하."

이제 앞에 앉은 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밭은기침을 내뱉다 손만 휘저을 것이다. 그 후에는 얌전히 일어나 예를 올리고 집무실에서 나가면 된다.

머릿속에 떠올린 것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모습으로 기침을 내뱉던 이가 손을 휘저었다.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릿속에 떠올린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예를 올린 뒤 집무실에서 나왔다.

- 달칵

먼 훗날이자 먼 과거인 언젠가의 키리에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던 곳. 그곳의 커다란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음 수를 세어가며 다른 생각을 접어두었다. 언제나와 같은 평온한 얼굴로,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채 스무 걸음, 서른 걸음.

의심, 받지 않도록.

여느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오로지 자신의 걸음에만 온 신경을 쏟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테일란이 함께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다.

"저하."

"아니."

거의 동시에 체이스가 이렇게 테일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더더욱 작은 목소리로 채 나오지도 않은 말에 대한 답을 전했다.

"나는 그런 적 없었어, 카스트린 경."

국왕의 집무실에서 나와 왕세자의 집무실로 돌아온 뒤, 곧바로 누군가와 독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가 있어."

지금 체이스는 기억과 일치하는 일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행하고 있었다.

베른이 없었고 테일란이 곁에 있었다.

지금의 체이스는 검을 쓸 줄 알았고 얼마 전 카이리스에도 다녀왔다.

그러니 모든 것이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었고 기억이 나지 않는 날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에 한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데블란의 의심어린 시선이 체이스에게 닿지 않도록, 그리하여 체이스가 기억하는 '미래'가 크게 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 저하."

지금껏 이미 여러 차례 이런 제지를 받은 바 있던 테일란은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체이스가 부를 때까지는 다시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집무실 문이 다시 닫히며 완전히 혼자 남게 된 체이스가 비로소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후에는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에 몰려오는 피로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데블란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그대로 되풀이됐다.

기억 속의 일과 오늘의 일은 완전히 같았다.

- 이미 지난 달에 남작의 세력을 전부 잘라내시지 않았습니까.

이 역시 기억 속 '과거'의 체이스가 꺼냈던 말이었다. 그것이 알려주는 하나의 사실 때문에 체이스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굳이, 베른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은 누가 데블란의 검으로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데블란의 호위기사들 중 한 명일테지만 그것까지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베른이 없음에도 과거와 지금 가지치기되는 이들이 완전히 똑같았다. 사라진 이들도, 그들이 사라진 날짜도, 심지어 그 방법과 그에 대한 데블란의 반응까지도 모조리 똑같았다.

그렇다는 것은 곧.

과거에도 굳이 베른이 나섰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말과 다름없다.

베른이 없는 지금은 그 빈 자리를 대신한 또 다른 누군가가 손에 피를 묻혔겠지만, 적어도 그 누군가가 채 자라지도 않은 열 넷의 어린 아이는 아니지 않나.

'대체 왜.'

당장이라도 다시 그 거대한 문이 있는 집무실로 달려가 묻고 싶었다. 지금의 데블란은 베른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의 아들을.

한낱 날붙이로 썼느냐고.

피를 토해내듯 묻고 싶은 것을 참아냈다.

손끝 발끝이 다 잘려나가는 기분을 꾹꾹 눌러가며 참아내고 있었다. 이 왕궁에 되돌아온 이후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은 채 일분 일초를 모조리 참아내고 있었다. 참아내면서, 기억을 뒤져가며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들어놓고 있었다.

- 똑똑

소파에 기대 앉아 하지 못할 말을 삼켜내던 체이스가 조용히 눈을 떴다.

"저하, 나야. 들어갈게."

시종조차 통하지 않고 직접 건네오는 말.

데블란이 아닌 그 누구의 앞에서든 상관 없이 흘러나오는 편안한 말투.

체이스는 들어오지 말도록 말하지 않았다.

사실 거절할 시간도 없었다. 통보하듯 알려오는 목소리 뒤로 문이 빼꼼 열리며 고불고불한 긴 머리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아리안느."

당연히 아리안느였다.

"뭐하고 있어?"

머릿속을 뒤져가며 퍼즐을 맞추고 있어.

흐트러진 것이 있는지 따져가며 하나도 빠지지 않도록 조각을 이어나가는 중이야.

- 짝!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대답을 이어나가던 체이스가 생각을 멈췄다. 체이스의 눈 앞에서 큰 소리로 박수를 한 번 친 아리안느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마주했다.

그 뒤에는 손을 들어 서늘한 이마에 따뜻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한동안 체이스와 눈을 마주치던 아리안느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마치 체이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 아는 것처럼.

"그림처럼 움직이지 말고 하던대로 해. 그래도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모든 것은 똑같이 굴러가야 해, 아리안느. 적어도 올 겨울까지는."

체이스가 가만히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래야만 같은 날에 치유사가 이 곳을 찾아오다 문제 없이 '실종' 될 테니까."

그래야만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로 왕관을 물려받게 될 테니까. 아무 문제 없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리하여 다른 그 어떤 나라에도 영향을 주지 않도록, 내년 초에 움직이겠다는 칼리안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세크리티아의 법은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아. 그게 누구든 절대로 어기지 못하게 할게."

반역자의 핏줄이 절대로 세크리티아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데블란이 무엇을 약속하고 누구와 거래를 하든, 그 어떤 수를 써서 텐실의 치유사를 언제 어디로 부르든 다 상관 없게끔.

수많은 이들의 무덤 위에 홀로 서 있는 데블란이 단 하나의 법만은 절대로 어기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그러니까 숨 쉬어도 돼, 체이스."

이런 말로 체이스의 생각을 또 한 번 막은 아리안느가 생긋 웃었다.

* * *

붉은 빛이 숨겨진 검은 색 실크 드레스.

지그프리드 관의 밝은 마법 등불 아래에서 움직일 때마다 붉은 빛이 살짝 살짝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그것은, 왕실 의상 담당자 섀틴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서 만들었다. 드레스를 입을 이가 화려한 장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는 섀틴은 그 독특한 검은색의 실크 위에 재질 다른 검은 실로 수를 놓았다.

코르셋도, 치마를 부풀려 줄 고래 힘줄 패티코트도 필요치 않았다. 턱 밑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검은 드레스는 이미 충분히 완벽했다.

"선물."

드미레아에게 걸어온 칼리안이 포장된 상자 하나를 건넸다.

붉은 셔츠 위에 검은 예복을 갖춰 입고, 드미레아와 똑같은 문양의 검은 자수가 수놓인 선명한 붉은 빛 망토를 걸친 채였다.

드미레아와 완벽히 대비되는 색을 지닌 칼리안의 예복, 그 위에 더해진 다이아몬드 망토 이음 장식까지. 그 모든것이 보기 좋게 어우러지되 지나치리만치 화려했으나, 1년에 단 하루 찾아오는 오늘만큼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았다.

오늘. 8월 16일.

카이리스의 3왕자, 칼리안의 탄생일.

그러니 오늘의 칼리안은 그 누구보다 더, 지나치리만치 화려해야 했다.

"선물은 제가 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찮아. 선물받고 기분 좋을 날은 아니라서."

작은 미소를 지은 채 말하는 드미레아에게 가볍게 대답한 칼리안이 눈짓으로 제 손을 가리켜보였다.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선물 어서 받으라는 뜻이었다.

왕자의 생일 축하연에 나서기 전, 여전한 동맹을 보여주듯 나란히 자리할 정혼자에게 건네는 것을 받은 드미레아가 서두르지 않는 손으로 그것을 풀었다.

그리고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다.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치장을 싫어하긴 하나 장신구에 대한 결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일을 맞이한 칼리안의 옆자리에 있어야 했으니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장신구 하나 쯤 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장신구가 '무엇'으로 꾸며진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있었다.

"······ 왕자님. 지금 저 가지고 선전포고 하십니까."

그 의미를 단박에 파악한 드미레아가 이렇게 묻자, 칼리안이 별 일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감추지도 않고 건네진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칼리안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 이름을 어디까지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칼리안과 함께 있던 얀이, 그것이 자신의 동생의 입에서 나온 소리임을 알면서도 미간을 찌푸렸을 만큼 무례한 말투였다. 하지만 사전 약속도 없이 드미레아의 이름을 또 팔아먹을 생각을 한 것은 자신임을 잘 아는 칼리안은 그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만 하고 나와주면 일주일 동안 대련해줄게."

천하의 지그프리드 이름을 어떻게든 써 먹으려 들면서 내거는 것이 고작 일주일짜리 대련이다. 물론 드미레아라면 그 일주일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보름."

보름은 되어야지.

하여튼 드미레아는 드미레아다. 괜히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가 아니다. 장신구 하나 해 주는 조건으로 칼리안의 검술을 제대로 뜯어갈 생각인 것이다.

"알았어, 보름."

결국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래를 수락했다.

밑지는 거래는 해본 적 없는 드미레아가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연회장에서 뵙겠습니다, 왕자님."

"그거 하고 와. 꼭."

"네."

그 장신구 하나에 담긴 의미가 어떤 것일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보름치 대련에 더 값어치를 두는 드미레아의 모습에 칼리안이 결국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 * *

언제나와 같이 화려한 지그프리드 관.

그 자체로 보석같은 그 곳에 마법 등불이 밝혀지고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안의 탄신일이다. 그러니 그 어느때보다 많은 귀족들이 지그프리드 관을 찾았다. 그 수많은 귀족들이 칼리안이 오늘 어떤 말을 하고 누구와 함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눈과 귀를 모두 열어둔 채 주인공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3왕자,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께서 드십니다!"

그리하여 바로 오늘. 그 많은 귀족이 모여있는 이곳에, 비로소 칼리안이 걸음을 했다.

그렇게 입장한 칼리안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반갑다'는 말을 하며 모든 귀족들에게 인사를 했고 그 후에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답답해 보이시는데요."

그리고 그 뒤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2왕자 플란츠에게만 말을 걸었다.

"그다지."

검은 색의 예복, 그리고 베이지 색의 망토, 같은 색의 장신구까지, 잘 차려입은 플란츠가 적당한 대답을 건넸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느긋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란델 형님은 못 오신다고 하던데, 많이 아프신지 걱정이네요."

플란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아파서 오지 못하는 것인지, 언젠가 그리했던 것처럼 오늘 하루 아프면 안 되는지를 물어오는 동생의 말 때문에 오늘 하루 감기에 걸리기로 한 것인지 정도는 구분하고 있던 탓이다.

란델이 벌였던 일에 손을 들어준 텐실에 대한 경고의 연장선, 그리고 플란츠와 여전한 사이임을 알리기 위한 행동임을 모를 리 없으니까.

그렇게 별 것 아닌 보여주기 식 대화가 몇 차례 이어졌을 때.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 입장입니다."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귀족들의 시선이 지그프리드 관의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플란츠와의 매우 좋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던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술렁거림이 이어졌다.

그런 드미레아를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도 감기가 옮았군."

이렇게 꺼내진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이런. 그러셨습니까."

곧, '이 자리에 오지도 않은 란델에게 감기가 옮은'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저벅저벅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드미레아의 장신구, 정확히 말하자면 이마에 살짝 드리우도록 만들어진 둥근 머리 장신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칼리안과 연관시킬 루비와 지그프리드를 생각해내기 딱 좋을 다이아몬드로 꾸며진 그것은, 비록 굉장히 얇고 또 작았지만 명백히 티아라를 떠올리게 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작은 왕관인 티아라.

아무리 진짜 티아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티아라를 연상시킬 수 있을 만한 그런 장신구는, 당연하겠지만 왕자의 정혼자가 착용할 수 있을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래.

세자의 정혼자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조금 전 칼리안은 세자의 정혼자나 할 법한 장신구를 드미레아에게 준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미리부터 계획한대로.

드미레아에 대한 청혼의 의미가 아니었다.

'세자의 정혼자'가 할 법한 장신구를 착용하는 이의 옆에 선 사람이, 그렇다면 과연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안 플란츠는 '예고 없는 3왕자의 기행에 화가 난 나머지 다시 등을 돌린 둘째 형' 역할을 할 때임을 눈치채고 연회장을 벗어난 터였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드미레아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누구든 감탄할 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서 와, 정혼자님."

개 키울 준비.

세자위에 대한 욕심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 칼리안의 손가락이, 허공에 둥근 곡선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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