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93화 (194/527)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6)

더운 바람이 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방금 전에 깊이 눌러 쓴 하얀 로브의 후드가 새삼스럽게 거추장스러운 기분이 든다 여겨진 체이스는 후드를 도로 벗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눈과 꼭 닮은 듯한 빛의 여명 위에 이제 막 떠오르는 해와 아직 채 지지 않은 달이 함께 떠 있었다.

-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입니다.

말에 오른 체이스가 이렇게 이야기하며 새벽 어스름 속의 하얀 달을 올려다봤다.

- 무엇이 신기하십니까.

칼리안의 음성이 머릿속에 전해진다.

꿈 속에서 마주했던 이의 목소리와는 많이 다르지만 또 굉장히 닮아있는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체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번에도 체이스가 먼저 연락을 취했었다. 해와 달이 모두 떠 있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아침 잠 많을 것이 분명한 칼리안은 곧바로 답을 보냈다. 그러더니 며칠 전 체이스로부터 받은 자료 덕에 알아낸 것을 알려주며 고마움을 전해왔다.

그러니까 아직 칼리안은, 전할 말이 분명 있음에도 체이스에게 먼저 대화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걸기 꺼려진다기 보다는 먼저 이야기를 건넬 수가 없는 것이다. 차마, 여전히.

그것을 가늠한 체이스는 정말로 아무 일이 없을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테일란의 도움을 받아 칼리안을 불러냈다. 그리고 감사 인사를 받아낸 뒤에 눈에 보이는대로 신기하다는 말을 꺼냈다.

여전히 그 시선을 하늘에 둔 체이스가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 해가 떠오르는데, 아직 지지 않은 달과 별이 함께 보인다는 것이.

자는 사람 깨워내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새벽에 해와 달과 별이 전부 다 보여 신기하다는 정도의 가벼운 말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정성스레 듣고 대답을 전했다.

- 완연히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니 함께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혼자서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탓에 전부 다 같이 빛난다는 말. 그것을 들은 체이스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생각보다 마음에 듭니다. 내 눈에는 이 쪽이 더 보기에 좋은 것 같고. 편안하기도 하고.

- 편안하다 하시니 다행입니다.

이렇게 답하는 칼리안의 음색이 반가움을 한가득 안고 있었다. 조금 어두워진 대신 다 같이 보이는 것이 나아보인다는 소리가 어쩐지 지금의 체이스 심정을 알려준 것 같아서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비밀을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씩 나누어 가진 뒤가 나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리 들렸다.

- 네. 오롯이 빛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밝아서. 눈을 찌푸리고 한 걸음을 뒤로 물리고. 그보다는 지금이 낫군요. 나에게는.

이렇게 덧붙인 말에 칼리안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스는 다른 이야기를 더 하지 않은 채 잠시 말을 몰았다.

저 멀리 보이는 끝자락에 아직은 검기만 한 산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 곳을 향해 말을 움직이고 있는데, 칼리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얘기해요. 언제나 무엇이든.

그것이 언제 건네오는 질문이든 어떤 질문이든, 무조건 상관 없으니.

- 혹시 란델 왕자와 플란츠 왕자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를 체이스 왕세자께서 기억하시는 내용이 있을까 해서요. 서로가 왕이 된 이후 두 나라 사이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보면 전쟁이 나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라서.

정말 무엇이든 물어보는구나.

체이스에게 새로운 형제간의 일을 물어볼 만큼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어진 것이, 서운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꺼운 기분이 든다. 먼저 이야기를 걸어올 만큼 조금 더 풀어지면 더 좋을텐데.

- 글쎄요. 그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것이 잘 없는데. 새들을 보내볼까요, 칼리안 왕자의 형님들에게?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농담처럼 건넨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때문에 체이스가 조금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행의 가장 앞에서 말을 몰던 기사 테일란이 살짝 뒤를 쳐다본 뒤 흐뭇한 얼굴이 되어 다시 앞을 쳐다봤다. 확실히 웃는 날이 많아졌고 버릇같이 입에 대던 와인을 찾는 날도 줄어들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왕궁에 돌아가신 뒤에도 괜찮으실지. 그것이 걱정이군.'

데블란.

그가 있는 곳에 돌아간 뒤에도 괜찮을지.

그런 테일란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을 멈춘 체이스가 다시 이야기를 했다.

- 골이 아무리 깊었다 한들, 겉으로 보일 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 세크리티아에서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라는 소리를 꺼내려다 멈추고 바꿔 말한 체이스가, 제 손에서 벗어나 자라는 장미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다 말했던 란델의 모습을 떠올렸다.

- 시간이 지나면, 궁금해했던 과거의 일도 알게 되지 않을까요. 만약 그 때에도 알 수가 없고 여전히 궁금하다면 얘기하세요. 새들을 보내 줄 테니까.

- 참아주세요.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카이리스의 왕자인데 너무 허물 없이 세작을 보내주겠노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 재밌어서였다. 만약 칼리안이 부탁한다면 당연하다는 듯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정말로 보내주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것 때문에도 웃었다.

- 란델이라. 어리다고 해야 할지 노련하다 해야할지. 그 속에 담긴 것이 단순한 분노도 아니었고 단순한 욕심도 아니었고. 그러니 그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

그 잠시간의 만남에서 체이스는 란델의 본질에 대해 참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경고를 했었다. 다만 그렇다 하여 란델의 과거를 파악하거나 그 생각을 읽어낼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 칼리안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터였다.

- 복잡한 사람이죠. 사실 얼마전에 만나서 도움을 주겠다 했고, 알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일이긴 한데, 괜한 궁금증이 들어 먼저 여쭤봤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얼마 전 만났던 란델을 떠올렸다. 베르가못 홍차의 향이 함께 생각나며 란델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날 란델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배신할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지 물었었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란델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답했었다.

상관 없다고.

- 정말로 다, 끌어안고 갈 생각입니까.

우려 섞인 체이스의 말이 들려왔다.

- 네. 정말로 다 끌어안고 갈 생각입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그것 뿐이라서.

칼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앨런이나 체이스나, 키리에와 아르센, 심지어 플란츠까지도 이런 칼리안을 각자의 방법으로 걱정해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 걱정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실만큼 제가 그렇게 무른 사람은 아니고, 아시다시피 저는 제 것을 나눠가져주겠다 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얼마전에 체이스 왕세자께서 새로 늘려주신 이도 있고.

들켰네, 하고 체이스가 웃었다.

아르센이 칼리안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일부러 끌어들였다는 것을 칼리안이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 체르밀에서 지내다 왕궁 밖으로 나올 생각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러려면 디디고 올라설 계단이 되어 줄 수 있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조금 멋대로 굴었습니다. 그 사람의 온전한 믿음을 얻으려면 우선 온전히 보여주어야 할 테고.

아르센이 진심으로 칼리안을 도울 수 있도록, 그래서 카밀론에 가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조금 오지랖을 부렸다는 이야기였다.

아르센이 이 이상 어떻게 더 칼리안을 진심으로 따를지 생각해보는 것이 겁날 정도였지만, 그런 이야기 대신 칼리안은 그냥 신경 써 주어 고맙다는 말만 전했다.

이야기를 일단락 지은 체이스가 먼 곳을 봤다.

- 오늘, 조금 뒤에.

조금씩 떠오르는 태양에 선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아름다운 산이 눈에 들어왔다.

- 도착할겁니다.

여름이 긴 대신 겨울이 짧고,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대신 별이 내리고, 녹빛의 산과 깊은 계곡이 있는 곳. 너른 들에 꽃이 피고 광막한 바다 위에 달빛이 빛나는 그런 곳.

정녕 아름다운 세크리티아에.

- ······ 네. 고생하셨습니다.

안그래도 계속하여 날짜를 가늠해보고 있던 칼리안은, 새벽같이 말을 건네오는 체이스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아직 세크리티아 왕궁까지는 꽤 먼 거리가 남았지만 국경을 넘어서게 되면 정말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쉬운 마음에, 서신에 대한 답도 들을 겸 떨어지지 않는 발을 좀 달래볼 겸 칼리안을 불렀으리라.

- 그래서 칼리안 왕자는 이제 또 무엇을 할 겁니까. 대장로를 만나러 갈 생각입니까?

- 제가 작년에 엘프들과 사이가 조금 틀어져서, 그 때문에 전하와 엘프 대장로가 만날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년 초 쯤이 아닐까 싶은데 그때 함께 자리하게 해 달라 전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정확히는 스승님을 통해 말을 전해달라 하였지만요.

내년 초.

칼리안에게 전해지지 않게 그 날짜를 혼자 되뇌어 본 체이스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 그래도 칼리안 왕자에게 마나실 경이 함께 있는것이 다행입니다.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서.

- 네. 감사한 일입니다. 정말로요.

칼리안은, 테일란도 체이스에게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그냥 접어두었다. 칼리안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체이스는 칼리안이 원하는대로 테일란을 대하기 위해 일부러 노력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말고 체이스 스스로 필요해서 테일란에게 의지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또 조금의 말을 더 나눈 뒤 대화를 마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꽤 긴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해가 떠올라 있었다.

그 해가 어느정도 하늘 중간을 향하게 되었을 때 쯤 잠시 휴식을 취했고 다시 출발했다. 그 뒤 다시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너무 안와서, 내 정혼자 잃어버리는 줄 알았잖아."

아쉬운 만큼 반갑고, 아쉬운 만큼 반갑고, 아쉬운 만큼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리스를 벗어남에 아쉬워하는 만큼 세크리티아로 돌아왔음을 반겨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아리안느."

체이스가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활짝 웃는 얼굴의 아리안느가 왕세자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고생했어, 세자 저하."

* * *

이제부터는 체이스가 정보를 통제하기 힘들다.

그러니 데블란은 분명 보고를 받게 될 터였다.

왕세자 체이스가 왕궁으로 향하던 길에서 벗어나, 바다에 갔음을.

- 쏴아아······.

언젠가 들었던 웃음소리가 떠오르는 파도 소리가 귀에 들렸다. 모래사장의 파도소리 말고 작고 동글동글한 돌이 파도에 씻겨 구르는 그런 맑은 소리.

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바다는 여느 때와 같았다. 보고 싶던 그 작은 바닷가는 아니었으나 바다는 어디든, 항상 평화로웠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굳이 마중 나오지 않아도 됐는데. 후작이 또 걱정했겠네."

한동안 바다의 짠내를 깊숙이 들이마시던 체이스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내 정혼자 내가 보고싶어 나온건데 뭐 어때. 엄마는 뭐, 이런 것까지 신경 썼으면 이미 진작에 드러누우셨을걸."

이렇게 말한 아리안느가 체이스를 올려다봤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석양을 그대로 담은 듯한 보석같은 두 눈이, 새벽 어스름을 담은 체이스의 눈을 응시했다.

"마음이, 좀 편해진건가. 그래 보이는데. 아닌가? 모르겠네."

"아리안느."

"응."

화를 낼 때는 한없이 무섭고.

"아리안느."

"응."

혼을 낼 때는 한없이 엄하고.

"······ 아리안느."

"응."

걱정해줄 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

체이스가 허리를 조금 숙였다. 마주 보고 선 아리안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짙은 초콜릿 같은 긴 곱슬머리가 이마와 볼을 간질이는 느낌이 좋았다.

그 좋은 기분에 살짝 눈을 감은 체이스의 입에서 속삭임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뭔가를 두고 왔어. 내가."

아리안느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 손을 올려 체이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찾아다 줄까?"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거라서. 두고 왔어."

"당신한테 많이 중요한 거야?"

"많이 중요하지."

"내가 찾아다 줄까?"

똑같은 질문에, 체이스가 아리안느에게 기댄 채로 살짝 웃었다. 찾아다 달라 하면 진짜로 찾아올 것 같아서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다 달라 이야기하는 대신 똑같은 대답을 다시 전했다.

"아니. 두고 와야 해서 두고 왔어."

"그랬구나."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이런 말에도, 아리안느는 그냥 계속 체이스의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체이스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괜찮아. 걱정 마."

"알아. 내가 있는데 괜찮아야지."

체이스가 웃었다.

웃으며 어떤 이야기를 하나 시작했다.

토닥이는 작은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오랜 이야기가 끝나도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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