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92화 (193/527)

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5)

혀를 차는 소리에도 머리가 울린다.

6서클이 되면 안 취하고 술을 마실 수 있게 된다던데 발칸의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4서클이었고 몇몇이 5서클이었다.

그러니 아쉽게도 5서클 마스터의 장벽을 넘은 뒤 다음 서클을 열지 못한 아르센 역시 취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경지에 다다르질 못했다.

덕분에 독주를 전부 섞어놓은 술 한 잔과 한 모금을 마시고 기절하듯 쭉 잤다. 어쩌면 쭉 잔 것처럼 기절했다 깼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둘을 구분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아무튼 아르센은 키리에가 언제 앨런의 집에서 나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필 자신을 붙들고 하소연을 하는 것에 매우 복잡한 마음이 된 키리에가 아르센의 목을 꺾어놓을지 말지 고민했던 것도 몰랐고 소파에 버리듯 집어던진 것도 몰랐다.

"참 자알 했네."

그리고 호기롭게 전부 열어 섞어버린 그 술들이 얼마짜리였는지, 그것도 당연히 몰랐다.

물론 앨런은 아직 칼리안이 아르센에게 비밀을 이야기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적어도 숙취를 해소 할 만한 마실 것 정도는 먼저 내어 준 뒤에 타박을 했을 터였다.

그래서 아르센은 그 일을 설명하고 그 동안 앨런이 사실을 함께 숨겨온 것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고 당당히 앨런의 집에서 도망쳐 나올 생각이었다.

칼리안이 술을 마시겠다 하는 날에 함께 열어 오붓하게 마시려고 슬레이만이 눈독을 들이는 것도 못 본 척해가며 아끼고 아껴뒀던, 게다가 만든 지 40년이 넘었다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풍미일 것이 분명한 세크리티아산 최상급 바질리카가 그 안에 섞여있던 것이 조금 문제가 됐다.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를 어찌할텐가?"

아르센이 자신이 사고 친 이유를 당당히 말하기에는 그 가치가 너무 엄청났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닌 칼리안과 함께 마시려 했던 것이라 하니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숙취 때문에 머릿는 빙글빙글 돌고 속은 속대로 울렁울렁거리는 기분을 참으며,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 왕자님께서는 술 안 드실 것 같습니다, 군단장님."

그리고 최선을 다해 생각해 낸 이따위 대답을 해서 앨런을 아주 조금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데블란의 술 창고라도 털어 올 셈인가?"

대륙에 딱 두 병.

앨런의 집에 하나, 그리고 데블란의 술 창고에 하나.

"털어올까요?"

아르센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되물었다. 어찌됐건 수습 가능한 선 안에서만 사고를 쳐 오던 아르센이 아니던가. 사고를 쳤으면 해결을 해야지.

"지그프리드 영지까지 이동 마법진 이용해서 가면 세크리티아 금방입니다, 군단장님."

그래서 세크리티아 왕궁 깊은 곳에 있는 국왕 전용 술 창고를 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이렇게, 오고 가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 아니면 그냥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모를 이 미친 마법사를 보며 앨런이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말을 말아야지. 되었으니 그냥 두게."

별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라지만 아무튼 데블란이 가진 것과 같은 술을 마신다는 것이 칼리안에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 같으니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어서 하는 소리였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국의 관계 악화를 막은 앨런이 자신보다 몇 살쯤 많아 보이는 아르센의 몰골 아닌 몰골을 보며 다시 한 번 혀를 쯧 찼다.

"자네가 술 때문에 이렇게 앞 뒤 안 재고 일을 벌인 것을 아시면 왕자님이 참 좋다 하시겠네. 대체 왜 그랬나?"

빨리도 물어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따라 석 잔 쯤을 들이킨 아르센이 전날 칼리안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니까 또 들켰단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센한테 다 말했단다.

아르센 꼬락서니를 보니 별 문제는 없는 것 같다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도 여지없이 팔랑팔랑 다 들켰단다.

앨런의 날카로운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 내가 이 놈을 그냥."

순간적으로 흘러나왔다 사라진 피어 때문에 앞에 있던 아르센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앨런이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자네는 집 깨끗하게 잘 치우고 오늘은 궁에 오지 말고 그냥 쉬게. 나는 왕자님 만나러 가보겠네."

내가 이번에는 정말로 혼쭐을 내 줘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꼭 혼쭐을 내 줄 테다.

* * *

······ 는 무슨.

"스승님!"

비밀 캐낸 놈이 잘못한 거지.

비밀 들킨 분은 잘못이 없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 보였으면 적당히 눈 감고 넘어갈 줄도 알고 알아도 모르는 척 봤어도 못 본 척 들은 것도 없는 척 눈치껏 굴었어야지. 제 놈이 과거에 뭘 잘했다고 내 어여쁜 제자 면전에 대고 감히 사실을 알려달라 말라 했다는 말인가?

봄 바람처럼 따스하며 겨울 서리처럼 반짝이는 칼리안의 해맑은 웃음을 보곤 저도 모르게 화가 다 녹아버린 앨런이 아무리 그래도 비밀 들킨 것까지 잘했다 잘했다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다음 순서 알려주시지요. 미리 가서 없애 놓을 터이니."

그래도 예전에는 혼내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못하겠다.

알려줄 사람 순서 정하랬더니 진짜 정해서 알려주고 있는데, 아니 스승님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저 하나뿐인 소중한 제자를, 세상에 혼쭐 낼 곳이 어디 있어 혼쭐을 낸다는 말인가? 그저 곱게 자라기만 하라고 보듬보듬 토닥이기만 해도 행여 탈이 날까 아까운 것을.

그러니 어여쁜 제자 마음 고생 안하도록 다음 순번을 그냥 없애버리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는 더 들키면 진짜 안되지 않을까요?"

아니 그걸 아는 놈이.

"조심할게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에우리아나 드미레아, 혹은 르메인을 없애버리면 안 된다고 부탁하면서.

결국은 또 포기했다는 한숨이 탁 새어 나왔다.

그것이 용서의 의미임을 이제 누구보다 잘 아는 칼리안이 방긋방긋 웃었다. 멀찍이 떨어진 맞은편에서 그 꼴을 보며 정말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방 주인은 신경쓰지 않은 채였다.

삶은 닭가슴살과 채 썬 아보카도를 안에 넣고 사과 식초에 살짝 절여 길게 썰어낸 오이로 돌돌 말아 만든 훌륭한 요리를 한 입 먹던 플란츠는 지금 뱉고 싶은 것이 오이인지 욕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쩌다 셋이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기사단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돌아왔더니 너무 자연스럽게 앨런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두툼한 베이컨에 몽글몽글하게 잘 구워진 양파를 얹어 입에 넣은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헤르츠 경은 괜찮습니까? 궁에도 못 왔다던데요."

아르센이 왕궁에 오지 않은 것은 플란츠를 통해 들었다.

전날, 키리에가 처음으로 자세한 이야기 전하기를 삼갔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르센이 앨런의 술을 싹 다 망가뜨려놓는 천인공노할 짓을 했다는 것과 술 마시다 잠이 들었다는 것 외에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를 듣지 못한 채였다.

입에 든 것을 느긋하게 씹어 삼킨 앨런이 대답했다.

"그 친구는 별 일 없으니 걱정 마시고 칼리안 왕자님 속이나 좀 들여다 보시지요. 왕자님 속도 같이 뒤집어졌을 터인데."

그 아르센의 속이 어떤지까지 신경을 써 줄 속이 남아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카이리스 왕궁 사람 속을 죄 신경쓰는 칼리안 속은 앨런이 신경써야 하지 않겠는가.

"안그렇습니까, 플란츠 왕자님?"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플란츠를 불러냈다.

제 속이 껄끄러워 올라오는지 플란츠 속이 껄끄러워 올라오는지는 몰라도 계속 같이 밥을 먹고 있다 하니 조금 친해졌을까 했는데 지켜보고 있으려니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지 않나. 해서 앨런이 플란츠에게 말을 좀 걸어보는 것이었다.

내 동생의 새아빠와 내 동생이 같이 밥 먹는 자리에 내가 낀 것 같은 기분인데 여기는 내 방인 그런 상황에 처해진 탓에 말 한 마디 안하고 밥만 먹던 플란츠가, 별다른 대답 없이 옆에 놓인 사과 탄산수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아, 오늘은 둘 다 시끄러워서요."

앨런의 의도를 알았는지 몰라도 칼리안이 이런 말로 앨런의 시선을 다시 불러왔다.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일이 있으니 플란츠 그냥 두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말을 적당히 알아들은 앨런이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하여튼 왕자님들 낳아놓은 것 말고 잘한 일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으니."

르메인을 생각하며 하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든 플란츠 속이 시끄러운 것은 무조건 르메인 탓 아니겠는가. 때문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쯧쯧 찬 앨런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르메인을 또 구박할 기세였으므로,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저 좀 도와주세요. 바쁘시면 가셔도 되고요."

세렌티 멱살을 잡아다 시간을 멈춰놓든가 저 해를 붙들어 두고서라도 시간을 만들 앨런이다. 심지어 칼리안이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때문에 앨런은 일정이 어떤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오후에 르메인을 만나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했지만 르메인이야 기다리든지 말든지.

* * *

적당히 단 맛의 밀크티 세 잔이 소파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저 밀크티와 똑같았던 색의 말을 백금색이라 했던 히나가 생각난 칼리안이 살짝 웃는 사이, 칼리안이 펼쳐놓은 것을 보던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텐실 왕세자의 정보가 필요한 일과 이것은 다른 일이 맞습니까?"

"네. 텐실 왕세자 쪽 정보는 란델 형님 때문에 필요하고, 이건 제 일입니다."

'제온'과 관련된 일은 칼리안의 일이 맞았다.

플란츠 때문에 조금 서둘러 확인하고 있었고 또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 모두와 연관 있는 일이라 해야 하겠으나 일단은 칼리안이 확인해야 할 일인 것이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올려진 것을 한 장 들어 살펴봤다.

시간의 축이 본래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을 꽤 자세히 그려놓은 그림과 그 고리에 새겨져 있던 문자들을 기억나는대로 적어둔 것. 바로 체이스가 보낸 자료였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돌에 새겨진 문자의 뜻을 안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칼리안이 시간의 축에 새겨진 글자들을 확인하고 그 뜻을 어떻게든 알아낸다 해서 과연 제온의 근본을 찾는 것에 도움이 될지를 묻는 말이었다.

"그들이 새들만 건드렸다면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텐데 처음에 협회장 뒤까지 쫓아갔다 하니까요. 돌에 새겨진 문자 말고 그 동굴 벽에 있던 글자들이요."

돌에 새겨진 것과 같은, 동굴 벽에 붙은 종이의 내용을 읽으려 한다는 말이었다.

다만 글자를 해독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세 가지의 정보를 비교해보며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방대한 정보와 지식이 있어야 한 두 글자 쯤의 의미를 파악해볼까 말까 하지 않던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읽으려고 했던 것은 일단 미뤄뒀습니다."

꽤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에 앉은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똑똑한 머리 빌려달라고 했더니 역시 똑똑하신 제 형님께서 뭔가를 똑똑하게 잘 찾아내셔서요."

"계속 짖지."

전날부터 계속된 그 똑똑하다는 말에 플란츠가 짜증을 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칼리안이 시간의 축에 새겨진 문자들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여기 글자들에 보면 작은 점이 있는데 이게 글자의 일부가 아니라 다른 표식이라고 생각을 해 보면."

상당히 거대한 크기의 고리. 그 고리에 적혀있던 손톱만한 문자들. 칼리안은 그 중 몇개를 차례로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같은 위치에 점이 찍힌 글자들이 있고 그것들을 모으면 공통되는 획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점이 찍힌 글자들에 혹시 다른 의미가 있는것이 아닐까 하고 겹치는 부분들만 추려봤는데."

여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써 냈다. 손 끝에서 살짝 흘러나온 검붉은 빛의 오러가 어떤 문자를 만들었다.

"신기한 게 나오더라고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그리하여 이 대륙에서 오로지 세크리티아 왕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문자.

칼리안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온, 이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앨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말.

하지만 칼리안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있는 말.

"인간의 왕 이라는 뜻입니다. 우연일까 생각했는데 여기에도 적혀 있으니 무시할 수가 없어서요."

두 번 다시 마주치기 싫었던 귀 큰 종족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불렀는지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말을 맺었다.

"전하께서 혹시 엘프들을 많이 박하게 대하셨습니까? 아무래도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요, 엘프 대장로."

혹은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어머니 나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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