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4)
······ 칼리안이라니까.
다들 왜 그렇게 지나간 이름을 궁금해하는지.
그건 넘어가줘요. 이제 와서 경이 그걸 기억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이름은 나한테 간신히 생긴 흉터같은 것이라서. 이제 막 아문 상처같은 그런 것.
흉터, 많았어요. 여기저기.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잘 다치고 다녀서.
아니, 왕자는 꼭 곱게 살라는 법 없잖아요. 싸우기도 하고 사고도 좀 치면서 클 수도 있지. 그렇게 살던 사람도 있고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살려고 하면서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여기저기 다치기도 하고 못내 돌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내 형님 왜 살려놨냐고?
칼 뽑아서 해결이 될 문제 같았으면 경부터 잘라놨지, 내가.
결혼은 안했습니다.
정혼자는 있었는데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았어요. 서로 바빠서. 그리고 나 그렇게 나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 경보다도 더 어렸으니까.
가끔 보면 내 형님은 내가 나이가 좀 많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굳이 정정해 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그냥 뒀어요. 재밌잖아.
술이라. 술을 좋아했던가.
내가 너무 돌아서 취하면 제자리로 올까 하고 마시다가 곧 버릇이 되어서 마셨는데. 그걸 좋아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종종 마셨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키리에와 함께. 취하고 나면 늘 키리에가 업어줬는데 키리에가 나보다 훨씬 커서, 그게 나는 좀 편했거든.
나는 편했는데. 귀찮지는 않았는지 물어볼걸.
이제는 물어볼 수가 없네, 그런것도.
키······ 키는 꽤 컸는데.
아마 지금의 키리에나 스승님보다 조금 더 큰 정도? 이번에도 그렇게 자라면 좋을텐데,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네요. 전하께서도 작지 않으시니 비슷하게는 커지지 않을까 하는데. 글쎄요.
머리는 길었습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님과 똑같은 색이었고. 생긴 것이 비슷해서 나만 머리를 길렀는데 조금만 길러야지 하다가 어느새 잘 자르지 않게 되어서, 묶고 나서도 허리춤에 와 닿을 만큼은 길었습니다.
아.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건데.
그동안 숨긴 것 이해하고 넘어가는 조건이다 하니 어쩔 수 없이 말해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좀 찝찝해서.
그런 이유인 척, 그냥 궁금했던 척 물어봐놓고 지난번 그것 같은 괴상한 동상 만들어놓지 마요.
지금 모습이든 지난 모습이든 아무튼 다.
눈에 띄면 싹 부숴놓을거야.
아니, 동상 말고.
헤르츠 경을. 내가.
* * *
유난히 더 큰 란델 방의 문은 유난히 더 굳게 닫혔다.
"하······."
이제는 그냥 버릇이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깊은 한숨 소리를 내뱉은 플란츠가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두 형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던 레릭이 급히 다가오며 플란츠의 뒤를 따랐다. 안에서 나눈 대화는 전혀 듣지 못했으나, 지금 플란츠의 얼굴만 보아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 툭!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재킷을 여민 단추를 푼 플란츠가 계단에 발을 디딜 때 즈음에는 셔츠 칼라를 이어주던 체인 장신구를 뜯어내듯 떼어냈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가며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었다.
숨을 죄여오던 것들에서 차차 벗어나 그렇게 4층의 방으로 내려간 뒤에는 방문 앞에 잠시 섰다. 그 후 방문 손잡이에 직접 손을 얹으며 짧게 말했다.
"둬."
레릭을 향한 말이었다.
저녁 식사도 됐고 따라 들어와 옷 시중 받을 필요도 없으니 그냥 혼자 있게 두라는 소리였다. 레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고 플란츠는 그대로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높고 거대한 방문을 잠시 바라보던 레릭이 함께 뒤따르던 시녀 한 명을 향해 말했다.
"오늘 플란츠 왕자님 저녁식사는 따로 하시겠다고 전하게."
누구에게 그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당연히 칼리안 측에 이야기하라는 뜻이었고, 시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멀어졌다.
잠시 고개를 돌려 플란츠의 방문을 쳐다보던 레릭이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떤 차가 좋으려나.'
플란츠가 란델의 방에 들어가고 난 뒤 란델의 시종이 따뜻하게 녹인 초콜릿 음료를 가지고 들어갔던 것을 이미 보았던 터였다. 플란츠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으니, 비록 혼자 두라 하기는 하였으나 조금이라도 안정을 취할 만한 차를 준비해 갈 생각이었다.
꽃 차는 전부 안되고 향이 진한 과일차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다과 준비실에 마련된 여러 종류의 찻잎과 말린 과일들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레릭은 꿀에 절인 생강차를 준비하여 4층으로 올라갔다.
마음이 차면 몸도 차가울 테니까.
너무 맵고 달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탄 차를 들고, 혼자 두랬더니 왜 들어왔느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을 준비까지 마친 레릭이 방문을 노크했다.
"레릭입니다, 왕자님. 잠시만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혼자 있겠다 하였으니 들어오란 말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레릭은 이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는 익숙한 방. 익숙한 흰색 대리석 바닥과 익숙한 베이지색 커튼. 같은 색의 익숙한 소파와 그 곳에 등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익숙한 연두색 왕자.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앉은 익숙한 검은색 왕자.
······ 검은색?
"아, 생강인가보네."
생글거리는 얼굴이 레릭을 향했다.
"나도 한 잔만. 꿀 많이 넣고. 많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그래, 마치.
내 방과 내 시종인 것처럼.
* * *
- 달칵
얼떨떨한 표정의 레릭이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뒤 돌아와 꿀이 많이 많이 든 생강차를 내려놓도록, 플란츠는 계속 눈을 감은 채 소파에 기대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늘 그래왔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뭔데."
레릭이 다시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릴 때 쯤, 칼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고 플란츠가 말했다.
그런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열었던 입에 담으려던 말 대신 대답을 먼저 전했다.
"헤르츠 부군단장이 왔었습니다. 새들이 전한 쪽지를 전해주려다보니 형님께서 안계셔서 헤르츠 부군단장에게 갔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헤르츠 부군단장이 체이스 왕세자께서 보낸 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끈적이고, 쓰고, 텁텁한.
기분 나쁘기만 한 쓴 초콜릿의 맛과는 완전히 다른, 알싸한 단 맛의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래서."
아르센이 체이스의 편지를 본 일을 이야기하러 이 곳에 왔느냐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알싸하고 아주 많이 단 차를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똑똑하신 내 형님께서 붕대 감는 법은 언제 배우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그런 것은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모르고 계셔도 상관 없게 되어버려서."
아르센이 다쳤던 날, 붕대 감는 법을 칼리안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던 아르센에게 의문을 가지지 말라 하기 위해 꺼냈던 이야기를 칼리안이 알고 있었다. 이제는 아르센의 눈과 귀를 막을 필요가 없으니 플란츠가 더 숨겨주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단 냄새 보다는 매운 냄새가 더 많이 나는 차를 잠시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잘 들키는 것은, 보고 배워서인가."
칼리안이 아르센에게까지 정체를 들킨 이유가 똑같이 잘 들키는 체이스를 닮아서인지. 그런 이야기였다.
체이스가 연관된 사고였다 말하지 않았지만 듣는 것이 플란츠였으니까. 새들이 제멋대로 아르센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테니 이 일이 누구의 '실수'로 인해 생겼는지 정도는 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보다는, 헤르츠 부군단장이 읽지 말아야 할 내용을 멋대로 읽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만."
물론 아르센이 그것을 읽게 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칼리안이겠지만, 체이스가 의도했든 아니든 플란츠가 자리에 있었든 없었든. 아르센이 내용을 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이건 전부 그 파란 머리 마법사 때문이라고, 조금 전에는 분명 스스로를 탓했던 것도 잊고 아르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저를 따르겠다는 이가 딱 둘이 있습니다."
또 뜬금없다.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아르센에게 정체를 들켰다 이실직고를 하더니 저를 따르겠다는 사람이 둘이 있단다.
"그런데 둘 다 오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서. 그래서 왔습니다."
플란츠로서도 상관관계를 찾기 어려울 말을 꺼낸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길고 긴 말을 돌려 돌려가며, '뭔데'라고 물었던 플란츠의 말에 대한 답을 꺼내놓는 중이었다.
"한 명은, 방금 말씀드린대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렸고. 또 한 명은."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손가락이 자신의 귀를 가리켜보였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눈꼬리가 찌푸려졌다.
"오늘 수련을 더 하실 것인지, 그것을 물으려 레릭을 찾아갔었나 봅니다."
미친 따까리는 읽지 말아야 할 서신을 읽었고.
충직한 따까리는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칼리안과 플란츠가 대련을 해버려서, 예정되어 있던 키리에와의 검술 수련을 혹시 그대로 진행할 생각인지. 키리에는 그것을 묻기 위해 레릭을 찾아갔다. 레릭은 5층에 있었고 5층에는 란델과 플란츠가 있었고, 키리에는 귀가 밝았다.
덕분에 란델과 플란츠가 나눴던 대화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자신이 들은 모든 것은 칼리안 역시 알아야 했으므로 칼리안에게 모두 전했다.
"몰랐습니다."
그래서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적당히 사이가 나쁜 줄은 알았지만 그정도로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을 줄은 몰랐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르센을 미루고 칼리안이 란델을 만나는 것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에서 꺼낸 말이었다.
"싫다고 했을텐데."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5층 가라는 소리에 분명히 한 번 말했지 않았던가. 가기 싫다고.
"보통 그 정도로 싫은 것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담백하게 말 안합니다."
피망 싫다는 것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표정으로 말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듣느냐고. 란델이 피망만큼 싫다거나 피망이 란델만큼 싫다는 정도로 알아듣지.
그게 르니에리 만큼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아무튼 그래서. 혼자 있겠다 하셨다기에 왔습니다."
어차피 거절할 사과 대신 이렇게만 말한 칼리안이,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체이스의 서신을 꺼내 내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혼자 있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말라 비틀어지게 하는지는 칼리안이 참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러느니 그냥 일이나 하고 밥이나 먹자는 의미였다.
"가라고."
3층 사는 놈이나 5층 사는 놈이나 둘 다 싫은데 넌 대체 왜 안가냐고. 딱 그런 얼굴을 한 채로 말하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싫은데요."
뭐 어찌됐건 서로 꼴보기 싫은 것 마주보면서 짜증도 내고 화도 좀 내고, 그러다보면 숨도 좀 쉬게 되고. 그런 거지.
* * *
또라이인 것은 알았는데.
"그러니까 베른 경. 아 아직 경은 아니지만 곧 그리 될 테니 그냥 경이라고 하겠네."
술 약한 또라이인 줄은 몰랐다.
"아무튼 베른 경. 내가 말일세. 우리 왕자님이 뭘 숨겨놨겠거니 하긴 했거든. 그런데 베른 경. 왕자님이 말일세."
개인 수련을 마치고, 씻고 나와서 플란츠의 수련 일정을 묻기 위해 레릭을 찾아갔다가 일정 대신 다른 일들을 듣게 되었다. 아무래도 칼리안에게 비밀로 해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칼리안을 찾아갔다. 이제 막 아르센이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고, 그래서 칼리안에게 자신이 들은 것을 전부 전한 뒤 나왔다.
조금 전에 밖으로 나갔던 아르센이 키리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혹시 술 마시나?"
그러더니 이렇게 물어봤다.
"네."
그래서 키리에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겨서 찾아 마셨다기 보다는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의 도박꾼들이 건네는 것을 몇 번 마신 적이 있어서였다.
그러자 아르센이 반색을 하며 키리에를 데리고 왕궁 밖으로 나갔다. 얀에게 가타부타 말을 전할 틈도 없이, 메를린에게만 대충 내용을 일러두고 아르센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는.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아직 귀가하지 않은 앨런의 빈 집에 멋대로 들어왔다.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 식별한 석상이 상큼 발랄한 노래를 마치며 문을 열었다.
솔직히 키리에는, 그것이 그냥 노래만 하는 석상이 아니라 문지기 역할도 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법진 구축도 다 되어서 그레이스 경이 돌아왔거든. 베로니카는 그레이스 경 집에 있을걸세. 그러니 지금 군단장님 댁만큼 조용하고 안전한 술집이 또 어디있겠나."
앨런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집에 파란머리 물색머리 남자 둘이 쳐들어왔음을 알았을 것이다. 때문에 언제 어디서 불벼락이 떨어질까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키리에를 보며 피식 웃은 아르센은, 앨런이 아껴두고 있던 쓰디쓴 술을 보란듯이 죄 꺼내왔다.
"괜찮아. 군단장님도 공범이거든. 그러니 이번 일은 별 말씀 못하실 걸세."
이렇게, 가벼운 말투로 키리에를 안심시킨 뒤 술병을 까기 시작했다.
그런 아르센이 아예 취할 작정을 하고 앨런의 집에 왔음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왕자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냐면 말일세, 베른 경. 마차 태웠더니 잘했다 하시고 건물 부수니까 급여 올려주신 그런 분이란 말이네, 베른 경. 자네도 알지 않나?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또 없을 걸세. 그런데 베른 경. 우리 왕자님이 말일세. 붕대도 잘 감으시는 그런 분인데 검을 또 엄청 잘 다루시거든. 헌데 우리 왕자님은 마법사란 말이지. 게다가 잘 생기셨잖아."
전부 꺼내온 술을 전부 열어서 싹 다 섞더니, 멋도 맛도 모르게 온통 섞인 그 술을 딱 한 잔 마시고 저렇게 됐으니까.
"그러니 카밀론 가시기에 우리 왕자님만큼 어울리시는 분이 또 있겠나, 베른 경? 차고도 넘치는 분이시네. 그래서 내가 가끔 그런 생각을 했네. 세렌티께서 무슨 변덕으로 좋은 것을 다 모아서 주셨을까. 내가 마법사인데 오죽했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아르센이 술을 더 들이킨 뒤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베른 경. 내가 말이네. 우리 왕자님을 저기 저 세뉴 강에서 처음 봤거든. 그때 왕자님이 말에서 내려 주셨네. 그러더니 안네루시아를 계속 쳐다보셨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보셨을까.
"안네루시아를 계속 그렇게 하염없이 보셨는데······."
여기까지 말하던 아르센이 고개를 푹 꺾었다.
온갖 술을 섞어서 딱 한 잔, 그리고 한 모금 만에 잠이 들었다.
그런 아르센을 내려다보던 키리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아르센을 들춰업었다. 그 바람에 설핏 눈을 뜬 아르센이 웅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업어다 놓는 것이 귀찮았을지 물어보질 못했다고 하셨는데. 귀찮았나, 베른 경? 아. 베른 경이 베른 경이 아니라서 못 물어보시겠다 했던가······."
그리고는 또 푹, 하고 고개가 꺾였다.
그 모가지를 아예 돌려놔버릴까 잠시 고민하던 키리에가 한숨을 푹 쉬며 걸어갔다.
앨런의 집 어디에 손님 방이 있는지는 알았지만 굳이 거기까지 잘 데려가 눕혀줄 생각은 들지 않았던 탓에, 거실 소파로 아르센을 업어다 던지듯이 눕혀놓았다.
무슨 배짱으로 하필 키리에를 데려다 짧은 시간 술 친구를 삼았는지 모르겠지만.
"귀찮아 했겠습니까."
그 키리에가 이 키리에였든 아니든.
귀찮아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아르센은 듣지 못할 대답을 하고 앨런의 집에서 나왔다.
결국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