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3)
언젠가는 해야겠지, 하고.
몇 번이고 미뤄온 이야기.
그것을 홀로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칼리안의 비밀에 대해 무엇 하나 빠짐 없이 전부 아는 이는 앨런이었고, 칼리안의 비밀을 절대 알아야 하지 말아야 할 이는 르메인이었다. 물론 죽을 때까지 비밀을 숨겨두었으면 하는 이는 얀이었다.
"······ 그것 참."
그리고, 비밀을 제발 좀 알았으면 하면서도 절대로 몰랐으면 하는 역설적인 마음이 들게 하는 이.
그것이 바로 아르센이었다.
아르센은 르메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소드 마스터의 기억을 가졌다는 그 설명만으로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고 있었다. 르메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르센은 르메인보다는 조금 더 똑똑했으니까.
너무 바쁜 탓에 채 자르지 못하고 기르기 시작했다던 새파란 머리카락. 그날의 짧은 머리와 참 많이 다르면서도 또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헤르츠 경은 왜 나를 따릅니까."
그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아르센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칼리안을 쳐다봤다.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더 말을 이었다.
"내가 경에게 무언가를 잘 해준 기억이 전혀 없는데 이렇게까지 나를 따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쩐지 이상하기도 해서."
다른 발칸의 마법사들과 같이 검은 머리와 붉은 눈 때문이라면 그것은 결코 지금의 칼리안을 따른다 볼 수 없을 일이었다. 본래의 칼리안은, 아니. 그 안의 베른은 이렇게 짙고 검은 빛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무엇을 태우는지 알지 못할 불꽃 같은 눈도 가지지 않았었으니까.
곧게 빛나는 맑고 푸른 눈이 칼리안을 봤다. 겨울의 그 작은 바닷가에서 해가 뜬 직후에 올려다보았던 하늘과 같은 빛의 눈으로 칼리안을 보면서, 아르센이 살짝 웃었다.
"오늘 답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왕자님."
왜 나를 따르는지를 묻는 질문에 좋은 사람의 범주에 칼리안 혼자 들어있어서라는 대답을 해도 됐을 테지만 아르센은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그런 아르센을 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아들어서였다.
"이래서 내가 결국 헤르츠 경을 멀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르센은 칼리안에게 비밀이 있음을 이미 안다. 하지만 그 비밀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주어도 좋을지를 결정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칼리안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냥 기다리겠노라고.
그런 뜻을 담아서 한 말이라는 것을 칼리안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때문에,
"그래. 이 정도 대답은 해줘야지. 내 숨을 끊어놓은 사람인데."
하고.
말했다.
* * *
민트의 향이란 때로는 시원하다가 때로는 달았다.
그 향이 어느새 좋아져서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되었다.
"아, 그러고보니."
조용히 중얼거리던 이의 손 끝이 찻잔의 끝을 톡톡 쳤다. 고요하던 찻물에 일었던 작은 파문이 가라앉을 때 쯤, 짙은 보라색 눈이 테일란을 향했다.
"그 마법사도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내가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네."
칼리안의 말을 아주 잘 따르는 듯하던 파란 머리 마법사. 그 마법사가 칼리안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았다.
또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테일란을 본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마법사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혹시라도 플란츠 왕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 마법사를 통해 칼리안 왕자에게 편지를 전달하면 된다 일러두었는데. 그 마법사가 칼리안 왕자의 과거를 알고 있는지, 그것을 따져보지 않았어."
'그 마법사' 아르센이 칼리안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을지, 그것을 모르는채로 아르센을 끌어들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소리였다.
그 뒤늦은 깨달음의 결과로 고양이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칼리안이 또 한 번 들키는 재주를 발휘하게 생겼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이스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몰랐으면 어떡하지."
물론 상황을 인지하는 것과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인지라. 뭐 어떻게든 하겠지 싶은 마음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한 체이스가 살짝 웃었다.
체이스의 말에서 '될 대로 되라'는 말 뜻을 잘 알아들은 테일란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 마법사라면, 그 마법사 아닙니까."
도무지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할, 체이스의 동생이자 자신의 제자였던 이와 체이스의 마지막을 취했다던 마법사. 아르센이라는 마법사가 바로 그 마법사가 맞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도 체이스는 웃거나 핀잔을 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 이야기를 제 입에 담지 못해 둘러둘러 말했음을 알아서였다.
맞아, 하고 대답한 체이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잘 갚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내용을 알아서 갚는 것인지를 생각 안해서."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속으로 칼리안의 비밀을 알고 있을 만한 이들을 꼽아보며 그 안에 아르센이 있었는지를 가늠해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칼리안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을 세는 것이 빠르리라는 플란츠의 말이 귓가에서 다시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주변의 대부분이 사실을 아는 것 같아서,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체이스의 실수였다.
"이왕이면 알고 갚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이 말을 들은 테일란은, 그것이 정말 실수였는지를 묻는 대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렸다. 시원하기도 하고 달기도 한 그 향이 테일란에게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셋째 왕자와 참 잘 어울리는 향기가 아닌가, 하고.
* * *
왜 웃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왜 그리 웃는지 묻지 않았다.
란델의 웃음에 뭐가 담겼는지, 담기기는 했는지, 가늠해보려 하지 않았다. 멀찍이 선 채로 항상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에게 그 이상의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았다.
- 소란하게 굴지 말거라.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으니.
예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를 앞에 두고, 예전의 일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음을 말하지도 않았다.
"둘 다 하는 것은 욕심이라."
자신의 죄로부터 눈을 감은 채 홀로 아프기만 했던 것처럼 다른 이를 탓하기만 하지 말라는 이야기. 받은 상처가 많았다 해서 상처 준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이야기.
그 말을 곱씹어보던 란델이 플란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쉬운 일이구나."
"아쉬울 것 없습니다."
둘 다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는 소리에 대해 플란츠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내려다보듯 바라보던 란델이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혹여 너는, 나 역시 전하와 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더냐."
르메인과 비교되는 것이 불편하다는 심기를 감추지 않고 건네진 말이었다. 한동안 그런 란델을 보던 플란츠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 정도면 란델은 알아 들을 터였다. 하지만 플란츠는 굳이 귀찮게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 전하께서는 찌른 것과 찔린 것이 다르다는 것은 아십니다. 전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했던 적은 없는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무슨 답을 드려야 할까요."
최소한 르메인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 뒤에 숨으려 하지는 않았으니까. 자신도 피해자라는 위선을 떨지는 않았으니까.
"이 왕궁의 그 누구도 형님과 같지 않습니다. 오롯이 홀로 억울하다 생각하는 분께 참으로 어울리게도."
귀찮게 장미를 꺾어 눈 앞에 흔들어보일 필요도 없었다. 란델의 밑바닥에 르메인이 있음을 플란츠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르메인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란델에게 어떻게 들릴지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언젠가 칼리안이 했던 말로 하고싶은 말을 대신했다.
덕분에 란델은 또 한 번 플란츠의 눈을 응시했다. 늘 그 눈을 꺼려했으나 그렇다 하여 피하려 한 적은 없었으므로, 플란츠는 묵묵히 그 눈을 마주했다.
이제는 명확히 빛을 내는 플란츠의 눈을 향해 란델이 물었다.
"그리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더냐."
제대로 현실을 보든 그렇지 않든 결국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굳이 왜 제대로 보아야 하느냐는 소리였다.
플란츠가 웃었다.
"이미 늦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알았으므로 란델은 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늦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무엇이 늦었음을 알게 되는지 모르겠구나."
"어차피."
플란츠가 손을 올렸다.
조금쯤 뼈마디가 도드라진 긴 손가락이 란델을 향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한 눈이 아닌 다른 많은 것이 담겨 있을 심장이 있는 곳을 향했다.
"열어보지 않으실텐데.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신지."
그 손 끝을 가만히 보던 란델이 플란츠를 다시 쳐다봤다. 알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플란츠를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의외로구나. 너와 이런 말을 나누는 것이."
플란츠가 란델의 눈을 응시했다.
그 안에 참 많은 것을 담은 채로 대답했다.
"저 역시 의외라 생각했습니다. 그 작은 것조차 하지 못하시는 분께서 감히 제 동생의 덕을 보려 할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란델이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였다. 작은 소리로 이어지는 웃음을 보던 플란츠가 다른 설명 없이 몸을 일으켰다.
어찌됐건 전해야 할 말을 모두 했으니 이만 일어나 내려갈까 하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의 귀에 란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려주고 가려무나. 무엇을 위해서 네가 이렇게 바뀌었는지."
굳이 란델을 찾아와 굳이 부탁을 하고.
마주보기 싫으니 돌아가라 건넨 상처에 굳이 새로운 상처를 돌려주며, 돌아가지도 않고 그렇게 굳이 마주 서 가며.
굳이 그렇게 구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플란츠가 여전히 앉아있는 란델의 등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살려고요. 고양이 키우면서. 숨 쉬면서."
셋째는 개를 키운다더니.
둘째는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면.
이 나라는 누가 키워야 할지.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로, 할 말 끝난 플란츠가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다.
* * *
베른으로서 말을 했던 것은 단 한 번.
칼리안으로서 말을 했던 것은, 글쎄.
몇 번이었더라.
베른이었을 때에는 거짓말을 못했어도 숨기는 것은 참 잘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숨기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숨기는 것에 신물이 나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들어서 그런가. 굳이 숨길 마음도 어느새 잘 들질 않아서."
모든 이야기를 전해준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홍차 한 모금으로 마른 입을 조금 축였다. 입이 또 써서, 홍차에서 커피 맛이 났다.
"그래도 경에게는 숨겼으면 하는 생각도 했고 반대로 제일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주절주절, 말을 했다.
아르센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홍차를 마시고 괜스레 곁에 다가온 루시를 끌어다 안았다.
까만 옷에 루시의 털이 잔뜩 묻어나는 것을 마법으로 털어냈다. 그렇게 했는데도 또 털이 묻어서 다시 한 번 마력을 운용했다.
그렇게 쓸데 없이 시간을 보냈다. 계속해서 아르센을 보지 않은 채로.
"그것이 정말입니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아르센이 이렇게 물었다.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아르센이 덧붙였다.
"제가 정말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 밑에서 일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지금.
"믿기지 않는 게 그쪽이야?"
저도 모르게 완전히 하대를 해 버린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다치고 죽어가던 베른의 숨을 끊었던 그 날과 너무 다른 얼굴을 한 채였다.
이야기를 해 주어 고맙다는 말이나 믿기지 않는 말이라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앨런처럼 안쓰러워 하지도 않았고 키리에처럼 누군가를 향한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플란츠처럼 죄책감을 떠안지도 않았다.
베른의 마지막을 가져갔다는 것에 대해 비틀린 자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얼굴을 한 채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기억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숨을 끊어놓은 것 말고. 전쟁에 나선 것 말고.
약속한 말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이렇게만 이야기를 했다.
그런 아르센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씩 웃었다.
"이러니 내가 그리 할 수가 있나."
이러니 내가.
이 미친 마법사를 멀리 할 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