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2)
흉터.
상처가 모두 아문 것을 증명하듯 남은 자국.
그것을 아는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지만, 베른의 손과 몸에는 꽤 많은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오른쪽 손바닥에도 가늘고 긴 흉터가 있었다. 무슨 의도였는지는 플란츠만이 알 그 망나니같은 행동 때문에 입은 상처가 바로 치료되지 않아 생긴 것이었다. 물론 그 외에는 다른 흉터가 전혀 없었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착실한 치유력을 보인 까닭이었다.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심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맹세의 인은 치료하지 않는 축복의 힘이지만, 칼리안에게 목을 베여 생긴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 눈 앞에서 상처가 아물어 사라질 만큼은 아니었으니, 히나가 없는 이상 적어도 반나절은 지나야 모두 사라질 터였다.
"보기 좋은 상처는 아니구나."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웠음에도 상처를 가리지는 못했다. 하얀 목에 길게 생긴 혈선을 두고 건네진 말에, 플란츠가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보기 좋은 상처도 있습니까."
실리케의 비수에 상처를 입기 얼마 전, 이름 없는 새끼 고양이였던 루시가 멋 모르고 장미 정원에 들어갔던 날. 그래서 란델로부터 히나의 앞을 막아섰던 날.
그날 이후로 이렇게 마주보며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려면 둘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라는 것이 오고 갔던 적이 있었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할 테지만 어찌됐건 플란츠는 그 정도로 생각을 했다.
"때로는 필요한 상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 것을 보기에 나쁘다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앞에 앉은 란델의 말에 공감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특히 검을 쥘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굳은살이 있다면 검을 쥐는 것이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하고.
다만 란델이 이야기하는 필요한 상처라는 것이 검사들의 굳은살을 뜻하지는 않을 터였다.
실리케의 비수.
그 날에 입은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그 때 네가 만약 깨어 있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드릴 말씀만 하고 가겠습니다."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플란츠가 이렇게, 란델의 말을 막았다.
아무것도 없는 란델의 방에서는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장미 향이라도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꺼려했으나, 생각해보니 이미 이 곳에 왔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향이 나지 않았으니 란델을 만나는 일을 조건으로 두고 내기를 걸었겠지.
"할 말이 있다 전해 온 것은 네가 아닌데. 재미있는 일이구나."
재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과연 알까 싶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싫으십니까."
그래서, 재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전적인 정의만 간신히 알고 있는 플란츠는 이런 대답을 했다.
"싫으시면, 가겠습니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타이를 매고, 셔츠의 칼라 끝을 서로 연결하는 백금 체인 장신구를 했다. 체르밀 궁에서 늘 걸치고 있던 가디건 대신 품에 딱 맞는 재킷까지 입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이 과연 답답한 옷 때문인지 혹은 앞에 앉은 진짜 형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탓인지 가늠해보는 대신, 플란츠는 찻잔을 들어 속에 담긴 것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쓰디쓴 초콜릿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 맛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앞에 앉은 란델의 눈을 마주보는 것만큼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겠지."
칼리안이 왔든, 아니라면 찾아오겠다 했던 칼리안을 대신해 플란츠가 왔든. 둘 중 누가 왔더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소리다.
란델 역시 이제는 칼리안의 그늘에 들어서기로 했으니 이미 칼리안과 손을 잡은 플란츠가 찾아오든 칼리안 본인이 직접 찾아오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말이기도 했고, 둘 중 누가 왔든지 결국 란델에게는 '누군가와 잠시 대화를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플란츠는 잠시 아쉬움을 가졌다.
란델의 이런 감정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는 혹시라도 란델이 자신과 대화하기를 꺼려한다면 그것을 핑계로 그냥 내려가버릴 생각을 하고 있어서 가지게 된 아쉬움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했으니 빠져나갈 곳 없이 그대로 계속 대화를 해야 했으니까.
"발칸에 치유사 한 명이 있습니다. 텐실의 치유사를 통해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아서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결국 플란츠는 이렇게, 란델에게 부탁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딱 두 명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한 명은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원인을 제공한 플란츠 자신이었고, 또 한 명은 아르센이었다.
칼리안과의 대련은 졌지만 내기에서는 분명 이겼지 않나. 때문에 칼리안에게 슬레이만이 사용하는 보법 하나를 배웠다. 속도가 빠른 이를 상대할 때, 효율적으로 몸을 피하고 곧장 반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그 뒤 칼리안은 얀을 시켜 잠시 뒤에 자신이 찾아가겠다는 말을 란델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아르센에게 연락이 왔다.
급히 전할 이야기가 있어 칼리안을 찾아오겠다는.
"허울이 아니었나보구나. 네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을 보니."
덕분에, 이렇게.
굳이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 것이다.
"제가 발칸에 나선 것을 허울로 보셨습니까."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 눈에 보여주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이름 뿐인 부군단장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얼마 전 칼리안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플란츠 역시 똑같이 여기고 있었을 테니까.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란델을 향해 플란츠가 다시 무어라 답을 하려는데, 창 밖의 장미 정원을 한 번 바라본 란델이 플란츠를 깊이 응시했다. 피하지 못할 깊은 심연이 생명 가득한 연두색의 눈을 집어삼키듯 바라봤다.
"허울이리라 생각했다. 네가 감히 셋째의 덕을 보려 할 줄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제대로.
관심을 두고 지켜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플란츠가 짧은 소리를 냈다.
손을 올려 타이 매듭을 잡았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것을 풀어내려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도로 손을 내렸다.
좋지 않은 행동을 란델의 앞에서 보여야 할 필요는 이제 더 이상 없어서 참아냈다.
"제가 칼리안에게 뭘 했는지, 기억을 하기는 하십니까."
"그것을 기억에 담아 둘 필요가 있겠느냐. 그저 아는 것을 말했을 뿐."
"적어도 그것이 형님께서 하실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 쉬운 것을 셈하기도 어려우십니까."
이렇게 말한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하나만 하시죠. 언제까지고 피해자인 척, 상처를 입어오기만 한 척, 주변에 보이는 것 아무것도 닿지 않게 전부 다 닫은 채로 장미 가지나 쳐내면서 멀찍이 서 계시든지. 아니면 제대로 마주해 본 뒤에 제 탓을 하시든지. 둘 다 하시는 것은 욕심입니다."
이제 막 심연에서 벗어난 연두색의 눈에 불이 붙은 것을 본 란델이 조용히 웃었다.
* * *
짙은 회색의 대리석 바닥.
얼룩 하나 없이 잘 닦인 바닥에 검붉은 빛이 비춰져 반짝였다.
- 도도도도, 탁!
고양이라는 생물이란 앞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있다면 일단 잡고 보아야 하는지라, 그것을 본 루시가 열심히 달려와 반사되는 빛을 붙들려 했다.
그러나 그 앙증맞은 솜방망이같은 두 발이 그것을 잡아채기 직전에 팟 하고, 바닥에서 반짝이던 빛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애옹!"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똑똑한 루시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구경하는 새빨간 눈을 보며 한 번을 울었다. 그러자 그런 루시를 달래주려는 듯 조금 다른 크기와 모양새를 가진 검붉은 빛이 저만치 먼 곳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번에는 빛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형체가 없는 반짝거림이었으니, 두 발로 디디고 선 루시가 아무리 앞 발로 잡아 채려 한들 잡힐 리 없는 것이다.
"므에옹!"
검붉은 빛을 붙드는 것에 연달아 실패한 루시가 억울하다는 듯한 소리를 내며 칼리안을 올려다 봤다. 윗방에 있을 누군가를 꼭 닮은, '내가 너 때문에 굳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겠냐' 쯤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한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본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 기분 나쁜 이유가 이걸 못 잡아서야?"
이런 말을 알아들을 리 없을 루시는, 칼리안의 의지에 따라 방 안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빛을 좇았다.
- 도도도도, 탁!
물론 결과는 똑같았다.
세 번이나 같은 일을 겪고 온 몸의 털을 동그랗게 부풀리며 노려보는 루시를 본 칼리안의 웃음이 다시 터졌다.
소름끼치는 기운이 가득한 검붉은 오러.
"보통은 잡으려 하기도 전에 기분 나빠하거나 무서워할텐데. 그냥 신기하기만 한가보네."
"애오옹!"
항변인지 말대꾸인지 경고인지, 아직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의미가 담긴 그 울음소리에 마음이 조금쯤 편해졌다.
방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빛을 따라 뛰어다니는 루시를 보며, 칼리안이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창 밖 빗물도 잡으려 들더니. 잡히지 않을 것들을 그렇게 좋아하면 어떡해."
"애옹!"
아무리 봐도 말대꾸다.
억울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지,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간다는 말을 하고 싶은지, 이게 다 너 때문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말대꾸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괜히 놀려 미안한 마음이 든 칼리안이 말린 소고기 한 조각을 꺼내 루시에게 건넸다. 도도도도,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 루시가 냄새 좋은 간식을 물고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행복해하는 얼굴이 되더니 짭짭짭 하는 소리를 내며 육포를 먹기 시작했다.
보고 있으면 밑도 끝도 없이 평온해지는 그 작은 생명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개 키울 거라고 했었는데, 널 키우고 있네."
정확히 따져본다면 루시를 키우고 있는 것은 팔할이 완두콩이지만, 누구 손에 자라고 있든 루시는 칼리안의 고양이였으니까.
사람의 목소리가 한 번 가고 고양이 울음이 한 번 돌아오고 그렇게 도란도란, 칼리안은 잠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얀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오는 파란 머리 마법사를 본 칼리안이 웃었다.
"다 나았습니까."
어깨를 고정시키던 붕대를 푼 것을 보아서 하는 말에,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빨리 나았습니다, 왕자님."
걱정은 전혀 안했다고 하면 서운해할까봐 칼리안은 그냥 다시 한 번 웃기만 했다.
잠시 밖에 나갔던 얀이 다시 돌아와서는, 아르센의 머리카락과 완전히 반대되는 새빨간 색의 체리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와 홍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케이크 한 귀퉁이를 잘라 한 입 먹는 아르센을 향해 칼리안이 말했다.
"경이 나에게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다 들었는데."
그것이 만에 하나 그 이상한 동상 만드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헛소리면 당장 다시 팔을 분질러버릴 생각이었다.
"네,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도 언젠가 허락을 맡을 생각이 있기는 했으나, 다행히 아르센은 오늘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기사단 카렌의 기사가 오늘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전해주었는데,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께서 종일 자리를 비우셔서 저에게 왔다고 하더군요."
아.
하필 오늘.
할 일이 있고 바쁘다 했던 플란츠가 생각났다. 아마 기사단에 가려 했던 모양이었으나 그리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그대로 대련을 했던 것인데, 그 사이에 세크리티아의 새가 다녀간 듯 했다.
아르센이 품에서 꺼내 놓는 몇 장의 종이를 보며 칼리안이 묘한 얼굴을 했다.
분명 체이스는 아르센을 믿어도 좋으리라는 내용의 대화를 칼리안과 나누기 전에 저 서신을 보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세작이 플란츠를 대신해 아르센을 찾은 것은 분명, 체이스가 스스로 사고한 결과로 아르센도 믿을 수 있는 이의 범위에 넣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런데 왕자님. 제가 일부러 보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실수로 편지를 떨구는 바람에 내용을 조금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르센을 믿을 수 있는 이의 범주에 넣은 체이스가, 만약 플란츠가 부재인 경우 아르센을 통해 편지를 전달해달라 일렀고 플란츠가 자리에 없었다. 플란츠가 자리에 없게 된 것은 칼리안 때문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무슨 관계이시기에 이런 일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 아르센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국 칼리안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