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개 키울 거라고 (1)
로튼 대장간의 주인 긱스는 요즘 좀 한가했다.
애초에 로튼 대장간에서는 검 종류가 아니면 만들지 않았던 탓에, 손님도 별반 없고 할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른 곳처럼 철을 쓰는 물건들이라도 좀 만들어다 팔거나, 하다못해 마구라도 만들면 폴룬 상단에 내다 팔기라도 할 텐데 긱스의 고집이 그것을 허락하질 않았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적당히 먹고 살면 되지 사람이 꼭 바쁘게 돈 벌 이유가 있나, 뭐 이런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으니 전쟁도 없고 주변에 야만족도 없는 수도 카이리시스에서 검 만드는 사람이 바빠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손님 오셨어요!"
그렇게 한가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인가, 용돈이나 좀 주며 부리던 아이가 신이 나서 들어오며 이런 말을 했다. 그런 아이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를 본 긱스의 눈이 벌어졌다.
생김이 보여주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큰 키, 검은색의 가죽 조끼와 하얀 셔츠, 그리고 짙은 갈색의 바지를 입은 소녀. 거기까지는 특별히 긱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없었으나 그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검 하나는 제대로 보는 긱스가 아니던가. 한 눈에 보아도 그것은 아주 무겁고 품질이 굉장히 좋은 검이었다.
소녀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긱스의 앞에 섰다.
할 일 없고 아는 것이라고는 쇠 다루는 것밖에 모르는 긱스였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었다. 저 정도의 무거운 검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닐 만한 블론즈 색 곱슬 머리 소녀라면 이 카이 리시스에, 아니 이 카이리스에 한 명 뿐이지 않나.
"설마, 지그프리드 소공작님 되십니까?"
그래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렇습니다."
무표정해서 동그란 눈매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얼굴에 딱 어울릴 만한, 조금 낮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보자마자 긱스의 허리가 수그러졌다.
이 쇳내 나는 골목의 구석진 가게에 왜 자꾸 이런 거물들이 찾아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생을 가야 이야기 한 번 나누기 어려울 사람이다. 왕족 다음으로 지체높은 신분인 공작의 후계가 아니던가.
뿐만 아니라, 신분의 귀함을 떠나서 이 거리에서 무기 좀 만든다 하는 이들 치고 저 소공작을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을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지그프리드의 후계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선망의 대상인데, 얼마 전 카이리시스를 들었다 놨다 했던 대단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 정혼자 찾겠다고 2왕자를 억류하고 브리센을 압박했으니, 그 배짱과 행동력이며 자신감이 가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니 여러모로 긱스의 우상이 될 만한 그런 인물이 지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뵙게 된 것이 가문의 영광입니다, 소공작님."
때문에 긱스는 이렇게 진심 가득 담긴 인사를 올렸다.
사실 한 달 쯤 전에 찾아왔던 칼리안의 정체를 알았을 때에는 너무 놀라서, 인사를 하기는 했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아무튼 지금은 제대로 된 인사를 했다.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드미레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날이 조금 상했는데, 이 곳에 한 번 와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찾아왔습니다."
존대였다.
드미레아는, 제 가문의 아랫사람이 아닌 이상 그 누구에게든 함부로 말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세리에로부터 같은 교육을 받은 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던 긱스는 더더욱 황송한 얼굴이 되어 더듬더듬 답을 했다. 드미레아에게 그 말을 했을만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잊은 채였다.
"네, 네. 제가 보아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드미레아가 검을 풀어 긱스에게 건넸다.
생각했던 그 만큼의 무게였던 탓에 긱스가 짧게 숨을 멈췄다. 아무리 지그프리드라지만 아직 앳된 소녀의 허리에 매여 있었다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무게였다.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 살펴보던 긱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는 몇 번 검을 올렸다 내렸다 해보고 손잡이도 잡아보며 무언가를 살피다 물었다.
"저······ 소공작님. 혹시 본래의 검날을 떼고 새 날을 쓰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드미레아가 살짝 웃었다.
혹시 검이 상하면 이곳을 한 번 들러보라 했던 칼리안의 말을 새겨듣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긱스가 말한대로 최근 검의 무게를 많이 늘렸지 않나. 다만 지금 저 검은 드미레아조차 잘 느끼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재조립 된 것이었다. 그것을 바로 알아차렸으니 확실히 눈썰미가 다르다 할 일이었다.
한동안 검을 살피던 긱스가 입을 열었다.
"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상한 날보다도, 검날과 손잡이의 무게 중심이 조금 맞지 않아서 쓰시기에 조금 불편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역시 정확했다.
무게를 늘린 뒤 손에 이런저런 상처가 생긴 것도 어느정도는 그 때문이었다. 손에서 자꾸 밀려나는 검을 다잡고, 조금씩 틀어지는 검의 움직임을 힘으로 다루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한 긱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드미레아를 향해 다시 말했다.
"혹시 검날을 손봐드리는 김에 손잡이를 새로 달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굳이 본래의 손잡이를 계속 쓴 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한 질문이었고, 긱스의 말에 조금 생각을 해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함께 부탁하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길이 잘 들어 있던 손잡이를 버리기가 아쉬워서 계속 같은 손잡이에 날을 바꿔가며 썼었는데, 이쯤 되니 한번 새 것을 잡아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 말을 들은 긱스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이후에 말했다.
"하루 정도는 걸립니다, 소공작님. 다 만들어지면 제가 공작저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가게를 비워야 하지 않습니까.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멋있고 능력도 있고 왕족에 버금가는 신분인데 아랫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소공작님이 배려심까지 넘치는 것을 알게 된 긱스가, 그야말로 어찌 할 줄을 모르며 말했다.
"할 일이 없습니다, 소공작님."
라고,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스럽지만 기쁜 마음에 너무 진심어린 소리가 나와버렸다.
새빨개진 얼굴의 긱스를 보던 드미레아가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가게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다 가까운 곳에 놓인 칼을 하나 들어 살펴본 뒤 말했다.
"이 곳의 물건은 모두 직접 만듭니까."
순간 긱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보일 뻔 했다. 칼리안이 이 곳을 찾았을 때에도 똑같은 질문을 했던 탓이다.
"네, 소공작님. 모두 제가 만들었습니다."
솜씨 좋고 할 일 없다는 긱스를 잠시 바라보던 드미레아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말했다.
"내일, 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주면 고맙겠습니다."
직접 오겠다던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할 일도 없고 공작저를 구경해보는 일도 하게 되었으니, 긱스는 아무래도 좋은 얼굴로 그리하겠다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검 쓸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기사들이 쓰는 검을 전담하여 만들고 수리하는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긱스는 그 자리에서 감사하다고 소리쳤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적당히 먹고 살면 된다던 인생 목표가 조금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내기.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해서라기 보다는 재미가 있어서 했다. 거의 대부분 이겼고 거의 대부분 돈을 받지 못했다. 어디 사는 보라색 눈의 왕세자가 매번 내기 내용을 잊어버렸다는 핑계로 그 한 푼을 내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주 오래전의 언젠가에는 비가 오는 것이나 키리에의 키를 두고 내기를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얀과도 키 내기를 했다.
덕분에,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 가문의 핏줄로 태어나 쑥쑥 잘 크고 있는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매일 아침 조금씩 커지는 제 키를 보며 울상을 짓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치기만 하면, 지그프리드 공이 썼던 기술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못하시면, 5층은 형님이 가십시오."
이렇게.
플란츠를 상대로도 내기 아닌 내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칼리안에게 한 번 꺼냈다가 대륙 최고의 검은 말 한 마리를 고스란히 뺏긴 전적이 있던 플란츠가 아니던가. 때문에 플란츠는 칼리안의 말을 듣고 인상을 좀 찌푸렸다.
아무리 오러를 발현하지 않겠다 했지만 오러를 속에 담아둔 이상 그 신체 능력 자체부터 확연히 다르지 않나. 때문에 받아들이자니 불리할 것이 뻔하고, 받지 않자니 알려주겠다는 기술을 포기하기가 싫었다.
란델을 마주보는 것과 슬레이만의 기술, 둘의 무게를 잠시 재 보던 플란츠가 짧게 입을 열었다.
"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칼리안이 씩 웃었다. 동시에 플란츠가 검을 휘둘렀다.
- 부웅!
늘 선제공격을 하던 것은 칼리안이었다.
소리 없이 사라져서는 앞이든 뒤든 갑자기 튀어나와서 검을 내질렀었으니까.
그것을 잊지 않은 플란츠가 먼저 공격을 했고, 아직 웃음을 지우지 않은 칼리안이 허리를 틀어 검을 피했다.
날카로운 기세를 잃지 않은 묵색의 검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옆구리를 할퀴려는 것처럼 날카로운 바람을 흩뿌렸다.
- 우웅!
두 번의 공격을 피한 뒤, 오러 없이 마력으로만 만들어 낸 검붉은 빛의 검이 발현됐다. 부드럽게 팔을 뻗어 자신의 허리를 노리던 플란츠의 검을 밀어낸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오러를 쓰지 않겠다 하였으나 그것이 곧 플란츠를 봐주겠노라는 말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의 모습이 작게 일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속도를 냈다.
검을 틀어 회수한 플란츠가 계속 회전하려는 힘에 몸을 실어 방향을 바꿨다. 순식간에 반대 방향으로 선 채로 한 발을 뻗으며 검을 내질렀다.
- 카앙!
이미 뒤로 움직여 공격을 해오던 칼리안의 검이 막히며 날 선 소리를 냈다.
어둠을 뚝뚝 흘리는 검붉은 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묵색의 검. 두 검이 서로 교차한 사이로 붉은 눈과 연두색 눈이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빛을 냈다.
맞닿았던 검이 떨어짐과 동시에, 예리하게 바람을 가르는 한 줄기의 살기와 묵빛의 칼날이 함께 달려들었다. 칼리안은 둘 모두 피하지 않고 검을 들어 그것을 받아쳤다.
- 카아앙!
그리고 플란츠의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급히 손잡이를 틀어 검을 막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들 앞에서는 살기 내보이지 마십시오."
플란츠의 검술이 어느정도인지, 살기를 다룰 정도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제대로 된 실력이 후작에게 전해져서 좋을 것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대답 대신, 플란츠의 살기가 한 층 짙어졌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니 짜증난다는 뜻이다.
- 카앙! 캉!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 것을 막으니 검을 되돌려 횡으로 베어내려 든다. 그 기운에 상당히 날이 서 있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바닥을 박찼다.
베어야 할 대상 없이 휘둘린 검 끝에 바람이 일었다. 바람 앞에 서 있었어야 할 칼리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정도 속도에는 이제 익숙해진 플란츠가 되돌린 검을 틀어 오른쪽을 향해 내뻗었다.
- 부웅!
하지만 이번에도 플란츠는 칼리안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어느새 방향을 다시 되돌린 칼리안이 플란츠의 뒤에서 검을 들어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 기운을 느낀 플란츠가 빠르게 허리를 틀며 묵색의 검을 가로로 들어올려, 머리 위로 내리떨어지는 검을 막았다.
올려 친 검을 다시 회수하며 한 발을 물린 플란츠가 칼리안의 어깨를 노리며 검을 내리그었다.
- 카아앙! 캉! 카앙!
확실히 감각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올렸다. 드미레아의 것보다는 가벼우나 충분히 묵직한 타격이 느껴지는 그 공격에, 플란츠가 손에 힘을 쥐며 검을 다잡았다.
동시에 칼리안의 손에서는 검이 사라졌다.
대사막의 늑대를 상대했을 때 그리했던 것처럼, 회전하는 검의 힘을 이기려 무리하는 대신 검을 그냥 없애버린 것이다.
- 우웅!
다시 만들어낸 검이 이번에는 반대로 플란츠의 옆구리를 노리며 뻗어나왔다. 재빨리 발을 움직여 검을 피한 플란츠는, 처음으로 본 칼리안의 이런 공격 방식에 짜증을 내는 대신 조금 더 검 끝에 집중했다.
회수되는 칼리안의 검을 길게 밀어내듯 쳐낸 플란츠가 발을 박찼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휘둘러지는 검의 반경 아래로 통과하며 굳게 잡은 검을 가로로 잡고 다시 한번 칼리안의 허리를 베려 했다.
- 카앙! 캉!
발을 뒤로 물린 칼리안이 세로로 쥔 검으로 공격을 막았다. 상대의 공격 반경 안으로 파고드는 꽤 대담한 공격에 칼리안의 입꼬리가 한 번 더 호선을 그렸다.
칼리안을 지나쳐 뒤로 돌아간 플란츠가 내리 잡고 있던 검을 대각선으로 들어올리듯 쳐올리려 했을 때.
분명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칼리안이 툭, 하고 제 자리에서 바닥을 한 번 찼다. 그리고 또 한 번 눈 앞에서 사라졌다.
'왼쪽.'
타닥, 하고 발을 밟는 소리가 왼쪽에서 들렸다. 그리고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조금 뒤에서 들렸다.
살짝 눈꼬리를 좁히던 플란츠가 정면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아쉬운 생각을 떠올렸다.
아.
공격이 아니라 막았어야 했는데, 하고.
플란츠보다 조금 빠르게 뻗어나온 칼리안의 검이 플란츠의 목을 스치듯 베어냈다. 살짝 베인 상처에서 피가 맺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 사락
칼리안의 소매를 여미던 끈 장식 하나가 예리하게 잘린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