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나의 검(2)
우유를 가득 넣어 만든 하얗고 부드러운 빵.
향 없는 하얀 버섯과 함께 끓인 스프, 부드러운 딸기청을 가득 넣은 탄산수.
그리고.
닭가슴살을 안에 넣고 보기 좋게 구운 빨간 피망, 몽실거리는 계란과 함께 구워낸 초록색 피망, 둥글게 뭉쳐 구운 돼지고기와 함께 올리브유에 구워낸 빨간 피망, 가끔 보이는 양배추 덕분에 이것이 샐러드임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초록 피망 뭉치.
식탁 위를 한번 훑어본 플란츠가 한숨이 섞인 것이 분명한 말투로 짧은 감상을 전했다.
"또."
요즘 매일같이 피망이 올라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속 썩이는 형님 노릇을 한 다음날부터 피망이 올라왔다. 그날 칼리안은 체이스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말하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식사 자리에 피망을 올렸다. 왕자들이 딸기에 미쳐있다 생각했던 주방장은 이제 피망에 미쳐있다 여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이것은,
'아이고 우리 형님이 형님 노릇 하셨구나. 그런데 어쩌죠, 어른은 피망 안 가리는데.'
식단인 것이다.
돌다 돌다 나까지 같이 돌아버릴 동생놈의 안배에 정말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집어넣은 플란츠를 향해 레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칼리안 왕자님은 마나실 백작의 일정 때문에 시간 조정이 안되서, 식사 없이 먼저 나가겠다는 말을 전해주시라 했다 합니다."
심지어 이따위 메뉴를 차려 올리고는 오지도 않는단다.
"······ 해보자는건가."
평생의 숙적으로부터 비아냥 가득한 선전포고를 받은 국왕의 그것과 같은 얼굴을 한 채 중얼거리는 플란츠를 보며, 레릭이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거슬리신다면 치우고 새로 올리겠습니다, 왕자님."
플란츠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졌다. 피망 싫어하는 것을 레릭이 알고 하는 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피망은 그냥 피망이라 싫었다.
향이 많이 나서 싫은 다른 음식들과는 조금 달리 그냥 싫어했다. 그걸 알아서 칼리안도 이렇게 식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겠지.
"됐어."
란델보다 한 살이 많은 레릭은 실리케의 일이 마무리 된 이후에 온, 어찌보면 얀과도 조금 비슷한 상황에서 플란츠의 시종을 담당하게 된 이였다.
얀 외에는 칼리안의 상급 시종을 하겠다 자처한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레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브리센과의 일에 휘말릴까 몸을 사리던 이들 중 유일하게 나선 것이 레릭이라는 것을 플란츠도 알았다.
게다가 레릭은 플란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어딘가로 보고하지 않는 첫 시종이기도 했다. 그러니 굳이 입맛 하나를 두고 수고를 시킬 생각은 없었다.
잠시 식탁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앉아."
"······ 네, 네?"
잘 알아듣지 못해 눈치를 잔뜩 보며 되묻는 것이 일상인 레릭을 향해, 플란츠가 설명을 더했다.
"같이 먹자고."
피망 가득한 식단.
양은 또 어찌나 많은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레릭을 보던 플란츠가 한 번을 더 말했다.
"싫으면 말고."
"아니요, 왕자님! 싫지 않습니다!"
싫을 리가 있겠냐고 말하며 빠릿빠릿하게 자리에 앉더니, 감격에 겨운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을 보는 레릭을 향해 플란츠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주변에 귀찮은 놈이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와 같이 플란츠의 무릎 위를 점령하고 있던 루시가 애옹애옹하는 소리를 냈다.
* * *
날이 참 좋았다.
햇살은 그 자체로 훌륭히 빛났고 따스함을 품은 바람이 조금씩 불었다.
검은색과 갈색의 말이 카이리스 왕실 숲의 입구에 멈춰선 뒤, 말에서 내린 두 사람이 숲 속으로 들어섰다. 칼리안과 키리에였다.
바람이 숲을 지나며 사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리에에게 다시 검을 돌려준 이후, 둘은 거의 항상 이 숲에서 대련을 했다. 키리에가 자신이나 칼리안과 닮은 듯한 이 숲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한 이유도 있었지만 키리에의 실력이 늘어나면서 사방이 막힌 수련장이 좁게 느껴지게 된 이유가 더 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할 필요 없이 검을 겨루기 딱 좋을 공터가 된 바로 그 장소로 가는 동안, 키리에는 계속해서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 이제 내 방패 말고 다른 것 해야지.
칼리안의 검.
당연히 언제나 꿈꿔왔던 일이었고 그것이 되기 위해 지금껏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기사 서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다.
그래서 키리에는 기사 작위를 내릴 예정이라는 말에 크게 좋아하거나 감격해하지를 못했다. 그저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칼리안을 따라 나왔다.
"왕자님."
한참이 지난 뒤, 키리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칼리안을 불렀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쳐다보자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기사가 되면 왕자님을 모시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왕자님들은 호위기사를 두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별 문제 없다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어차피 전하께서 무용지물로 만드셨잖아. 오히려 지금은 나한테만 호위기사가 안 붙어있는 상황이니까."
칼리안이야 아니지만 플란츠나 란델의 곁에는 여전히 호위기사들이 따르고 있지 않던가. 비록 르메인의 기사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기사는 기사였으니까. 그들을 대신해 키리에가 호위기사 노릇을 한다 하면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기사가 될 만큼 큰 공을 세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조금 더 실력을 쌓고 자격을 갖춘 뒤에 내려주셔도 늦지 않습니다."
칼리안의 검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실력을 쌓으려면 더더욱 기사가 되어야지. 언제까지고 나한테만 배울 수는 없지 않겠어?"
혼자 성장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칼리안이 거의 매일같이 검을 맞대며 가르쳐주고, 간혹 플란츠 혹은 아르센과 대련을 한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했다.
일단 아르센은 마법사였으니 아르센과의 대결은 검술에 대한 소양보다는 갖가지 상황에 대한 기민한 대처 방법을 배우는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플란츠의 경우 키리에가 한 수를 접어주고 있으니 키리에의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에 대한 살기를 감추거나 한발 물러나는 인내심을 향상시키는 쪽에 가깝달까.
그러니 이들이 아닌 다른 여러 사람의 검을 상대해보는 것도 반드시 필요했으나, 지금의 위치 상 그런 기회를 얻기가 어려웠다. '과거'에는 베른의 기사단이 있었고 그 기사단의 기사들과 어우러졌던 키리에가 아니던가.
"네가 아무리 검을 잘 쓴다 해도, 그 기사들의 눈에 너는 그냥 시종일 뿐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형님 같지는 않거든."
조금 전 아르센이 설명했던 말대로, 여러 기사들과 대등하게 실력을 비교해보기 위해서는 키리에도 같은 위치에 있어야 했다. 키리에의 신분에 신경 쓰지 않고 검을 배우고 있는 왕자 플란츠가 오히려 이상하다 할 일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한 칼리안이 자신의 붉은 눈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키리에.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치를 정하는 이들이 많아. 나는 그런 문제 때문에 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 르메인이 앨런에게 백작위를 내렸던 것처럼, 칼리안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만찬에 나서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챙겨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왕자님. 하지만 그래도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작위를 내려주시면······."
여기까지 이야기하던 키리에가 뒷말을 흐렸다.
"아."
칼리안이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키리에가 무엇때문에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는지, 그 진짜 이유를 이제야 알아낸 까닭이다.
"충성 서약 때문이구나. 키리에."
"······ 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키리에가 조금 주저하는 듯 하다 대답을 했다.
르메인이 직접 기사 작위를 내려주면 기사가 주군 될 이의 앞에서 충성을 서약하는 절차가 생략된다. 키리에는 그 점이 싫어서 계속 다른 핑계를 대고 있던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추고 뒤따르던 키리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올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안 받을 건데. 나는."
키리에가 베른에게, 베른이 체이스에게 맹세했던 것.
기사가 될 이가 주군으로 모실 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약속하고. 주군보다 앞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맹세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
- 허락하겠다.
"이번에는 허락 못할 것 같아서."
분명 신성하고 숭고하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키리에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의식이자 절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허락하겠다는 간단한 대답을 절대로 내뱉지 못할 것 같아서.
칼리안이 허락하지 못하는 그 한가지가 무엇인지 가늠한 키리에가 조용히 가라앉은 눈을 했다.
"키리에. 여기서 들었던 대답으로 나는 이미 충분해."
'과거'의 칼리안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준 것이 자신의 등이었으리라 말하던 그 순간 이미 모든 것이 충분했다.
"그날 너는 이미 나의 검이 되었는데.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
키리에에게 다시 검을 전해줬던 그 순간이 칼리안에게는 서약이었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소리 없이 미소만 지었다.
다른 이들보다 청각이 좋은 키리에에게는, 그 조용한 왕궁조차 언제나 소란했다. 그런 곳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이 곳은 키리에에게 휴식이었다.
늘 좋았던 물 소리. 청량한 바람이 내는 소리. 들이쉬고 내쉬는, 칼리안의 작은 숨 소리. 내리비치는 햇볕에서도 즐거운 소리가 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그렇게나 좋은 곳에서 무엇이든 다 기꺼운 마음이 된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 히나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왕자님 도우면서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 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잘 몰랐는데, 그 때 히나가 저를 왜 멍청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를 했습니다."
사실은 키리에 뿐만 아니라 칼리안에게도 멍청이라 말했던 것이지만, 그것까지 알릴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운을 뗀 키리에가 칼리안을 제대로 마주 보고 섰다.
숲속 한 가운데, 그것이 꼭 칼리안과 키리에의 마음 속처럼 뭉개지고 베어지고 전부 불타버린 그 너른 폐허 위에 칼리안을 세웠다.
"제가 아직 기사 서임을 위해 맹세하는 내용을 다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검게 퇴색된 그 땅 위에서, 칼리안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키리에."
"그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칼리안의 말을 막은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런 키리에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 다른 사람들처럼 딱딱한 인사치레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칼리안의 말은 무조건 다 듣는 키리에였지만, 충성 맹세를 받지 않겠다는 칼리안의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 왕제님을 대신해 검을 잡고, 방패를 들겠습니다. 왕제님을 대신해 죽겠습니다.
- 뭐야. 다른 기사들 맹세랑 결국 다 같은 말이잖아.
- 진심만 말씀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의 기억이 또 한 번 떠오른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 그냥 외워 말하기 싫다고 해.
- 미사여구 없어도 제가 드리고 싶은 말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키리에는 모를 거다.
그때도 이미 제멋대로 기사 서약을 했었다는 것을.
그 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칼리안을 보며,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제멋대로 정한 약속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이 다른, 그런 약속이었다.
"언젠가 또 힘에 부치시거나 술에 취하실 때가 있으면 업어드리기도 하고, 잡아도 드리겠습니다. 왕자님 혼자 앞서 가시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지겠습니다. 걱정하고 지켜주시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기사들의 멋드러진 말 말고 이렇게 또 한번. 키리에가 할 수 있을 약속들을 칼리안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혼자 남지 않도록, 혼자 잊히지도 않도록, 지켜드리겠습니다."
그것이 키리에의 맹세였다.
흔들림 없이 약속되는 그 말에, 키리에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로 작게 웃었다.
그 때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라서.
"······ 그래."
웃음 소리, 그리고 들이쉬고 내쉬는 작은 숨 소리가 다시 들렸다. 칼리안의 그 무엇 하나 허투루 듣지 않는 키리에는 그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허락하겠다."
좋은 날.
흐르는 물이 청량하고 내리비치는 햇살이 따스했던 그런 날.
키리에가 칼리안의 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