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83화 (184/527)

제32장. 나의 검(1)

세크리티아는 겨울이 짧았다.

그리고 카이리스는 여름이 짧았다.

그런 세크리티아의 가을, 어쩌면 카이리스의 겨울. 그 즈음의 어느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 있던 체이스가 뛰어내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한 것이.

과한 것은 아니었으나 버릇처럼 즐겨하던 와인도 오늘은 입에 대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도무지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 없었으나, 테일란의 눈에 간신히 보일 만큼 아주 미약한 빛을 내는 저 통신용 팔찌가 어찌나 감사하던지. 때문에 테일란은 카이리시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지금 머무는 곳에 옥상이 없는 것이 아쉽다 하던 체이스는, 틈만 나면 마셔대던 민트 차 한 잔을 가지고 테일란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서린 달빛 아래 한참을 서성이다 깊은 숨을 들이킨 체이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 칼리안 왕자."

사용하는 법을 몰라서 이렇게, 처음에는 입을 열어 말했다. 테일란이 얼른 옆으로 다가가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주었다.

"소리를 내어서는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아. 그랬었지, 참."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곁에 선 테일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카스트린 경."

이렇게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다 테일란의 덕이었다.

플란츠는 말도 짧았지만 글도 짧았다.

그 커다란 매에게 팔찌 하나를 쥐여 보내주면서 '3왕자가 물어볼 것이 있다던데.'라고만 적어 보냈다. 그래서 그 팔찌가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지, 왜 그것을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적어주지 않았다.

그것을 개조하기 위해 앨런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물론, 행여 데블란의 앞에서 팔찌가 보여 난처해질까 우려한 앨런이 발현되는 빛을 줄여놓은 것도 당연히 말하지 않은 채였다.

다만 그 편지에 적힌 것이 '내 아우님'이 아닌 '3왕자'였던 것에, 플란츠 나름의 배려를 느낀 체이스가 잠시 웃었다.

"다시 해 볼게."

곧 이렇게 이야기 한 체이스가 다시 집중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시작한 듯 보였다.

몇 번을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또 몇 번을 웃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테일란은 조용히 테라스를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체이스로부터 어느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오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으신 것 같다 하셨던가······."

언젠가의 체이스가 분명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체이스는 조금 전, 칼리안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몇 번을 마주쳤을 때 늘 느꼈던 묘한 기분이 무엇인지 이제야 대충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참 많은 것이 체이스와 닮아있었지 않나.

말투며 행동이며, 심지어 둘의 걸음걸이까지도 꽤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던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군."

어찌됐건 체이스의 얼굴에서 큰 그늘 하나가 사라진 듯 보였으니, 카이리스 아니라 텐실의 왕자라 하더라도 환영할 일이다.

테일란은 단비만큼이나 반가운 낮은 웃음 소리가 새어 들어오는 방에서 나와 문을 꼭 닫았다.

항상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에 들던 체이스가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 바다도 좋지 않겠습니까. 카이리스에는 바다가 없으니.

이렇게 물어오는 말에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보냈다.

가는 모래 가득한 모래사장 말고, 동글동글한 검은 돌이 가득한 그런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올 때 들려올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 네. 좋아합니다, 바다.

세크리티아 왕궁의 첨탑은 좋은 곳이기도, 혹은 그렇지 않은 곳이기도 하여서. 언제나 홀린 듯이 찾아가 언젠가의 기억들을 되새기던 곳이었으나 또 그만큼 아려오는 곳이기도 하여서.

그러니 첨탑도 좋지만 바다는 어떻겠느냐고.

체이스가 그렇게 물었다.

그것이 누구의 기억을 열어 대답하는 것인지 둘 모두 신경쓰지 않은 채로. 첨탑이 좋을지 혹은 바다가 좋을지. 와인이 좋을지 다른 술이 좋을지. 그런데 지금 술을 마실 줄은 알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고, 대답하고.

그리 하였다.

- 얼마 전에 작은 바닷가를 선물받았습니다. 사실은 제 값을 주고 사겠다 하였는데, 이번에도 똑같이 동전 하나에 셈을 치렀습니다. 집은 조금 더 커졌지만 작은 바위가 있고 작은 섬이 있고. 달이 뜨고 별이 빛나고. 평화롭고 고요한 그런 곳입니다. 칼리안 왕자도 좋아할만한 그런 곳이 있어요.

칼리안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멀리 언덕 위에 가는 비가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소리로.

-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하네요. 많이 가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서.

그곳이 어디에 있는 바다인지 둘 모두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곳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 때의 칼리안이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을지, 말을 하고 웃을 수 있을지, 그 때에도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을지, 이번에는 잊히지 않을 수 있을지.

그 날의 세크리티아가 여전히 평화롭고, 소소하고, 아름다울지. 그 모든 것들을 다 접어 둔 채로.

처음으로, 아무것도 불안해하지 않는 목소리로 꿈을 꾸었다.

- 그래서.

그 꿈이 끝나갈 즈음이 되어 체이스가 이렇게 말을 해왔다.

- 내가 무엇을 알려주면 되겠습니까, 칼리안 왕자.

현명한.

여전히 현명한 체이스.

그곳까지 매를 보내고 매의 발목에 팔찌 하나를 보내고. 그렇게 건넨 이야기가 어쩌면 모닥불 끝의 불티 같을지 모를, 빨갛고 작은 불꽃이 눈에 보여 손으로 잡고 나니 어느새 식어 까만 재만 남겨져 있을지도 모를 그런 꿈 이야기만은 아니리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꿈 이야기 말고 정말로 무엇을 알려주어야 할지, 이제는 그것을 말해달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 다음 번에, 그 때에도 여전히 부족하다면 그 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플란츠의 생각대로.

저 목소리를 듣고 나니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생각보다 체이스가 더 많은 것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 칼리안은 이런 말로 질문을 미뤘다.

- ······ 시간의 축.

그리고 체이스가 이런 말을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 나의 새들이 그 날 동굴에서 무언가를 보았는데 알 수 없는 문자였다 하더군요. 그것 말고는 지금 칼리안 왕자가 나를 통해 알아보려 할 만한 정보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그 문자와 시간의 축에 새겨져 있던 것을 비교해 볼 생각인지. 이야기를 해줘도 괜찮겠습니까.

체이스는 헤이시아의 지하에 그것이 다시 나타났음을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상황에 칼리안이 무언가를 궁금해한다면, 그것에 대해 체이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 한다면, 시간의 축 외의 다른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까지는 하고 있었다.

칼리안으로부터의 대답이 없자 또 멋대로 결정을 내린 체이스의 말이 다시 들렸다.

- 사실 그것을 그리 떠올려보지 않아서 나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할 수 있겠지만. 한번 돌이켜 보겠습니다. 생각이 나는대로 보낼게요.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칼리안은 또 한 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하는지, 설명하고 변명하고 사과하지 못했다.

- 그리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칼리안 왕자.

왜 체이스에게 썩은 밧줄을 건넸는지 그것 역시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말 역시 할 수 없었다.

- ······ 감사합니다.

- 혼자 있을 때. 아니면 답답한 일이 있을 때도 좋겠고. 그도 아니라면 혹여.

다만 체이스는 마력에 담겨 전해진 말과 전하지 못한 말을 모두 알아 들었다. 알아듣고, 이해했다.

- 혹여 아무 이유 없을 그런 때. 다시 연락을 하겠습니다.

당장 예전의 이름을 불러주고, 혹은 함께 앉아 민트 차를 마셔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연락은 하겠다는 그런 말.

- 얼마든지, 언제든지. 좋습니다.

칼리안이 대답했다.

가느다란 풀잎 끝을 스치는 바람같은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 * *

다시 며칠이 지났다.

일상인듯 일상이 아닌 듯, 기묘하게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얼마쯤 흘러갔다.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아침.

"그러니까 저게······."

앨런의 집무실을 찾은 칼리안이 아르센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칼리안이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종종 그래왔던 것처럼 웃음을 참는 것이다.

"대체 저게······."

칼리안은 지금 말을 두 번이나 잇지 못할 만큼 힘들게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지금 절대로 웃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 후 칼리안은 자신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어나 있는 파란 머리의 얼음 마법사를 최대한 노려봤다.

분명 칼리안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 키리에와 함께 빌헬름 관을 찾아왔다. 앨런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않습니까."

칼리안은, 앨런의 널찍한 집무실의 테이블 옆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고급스러운 액자를 쳐다봤다. 하얀 배경의 액자에 검고 긴 천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검은 로브 자락이었음을 칼리안이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우라고 했는데. 헤르츠 경."

"마나실 군단장님께 보존 마법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제가 꼭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줄 겁니다, 왕자님."

"피 냄새 심해요."

아르센이 웃었다. 칼리안이 매준 저 로브자락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낸 웃음이었다.

"제 피라서 괜찮습니다."

"나. 내가 안괜찮은데."

이런 식의 소득 없는 대화 끝에,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칼리안이 한 발을 물렸다. 다른 것이 또 있던 탓이다.

엉뚱하다 못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 액자에서 간신히 시선을 뗀 칼리안의 눈이 이번에는 앨런의 테이블 위에 가 닿았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사람 형상이 그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이리 줘요. 녹여버리게."

칼리안이 아르센의 앞을 막아섰던 바로 그 날의 모습이 고스란히 새겨진 얼음 조각이었다.

저 미친 따까리가 진짜로 만든 것이다.

칼리안의 조각상을!

칼리안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키리에가 숨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그 키리에조차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

아직 세자위에 오르지도 않은 왕자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칼리안에게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않으리라는 이유 때문에, 실제 칼리안의 키 만한 크기로는 만들지 못했단다.

나중에 카밀론에 가서 개 키우실 때가 되면 그 때는 제대로 된 크기로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열의까지도 보이고 있었다.

"드리는 것은 상관 없습니다만, 왕자님. 제 생각에 이것을 드리면 저는 어차피 또 만들 것 같습니다."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칼리안에게는 거짓말하지 않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그러니 정말로 진심에서 하는 말이었다.

다만, 앨런의 집에 놓인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석상처럼 그날 칼리안이 내뱉은 멋진 말을 하는 기능을 조각상에 넣을 수 있을지, 앨런에게 그것을 묻기 위해 와 있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면, 정말로 눈 깜빡 할 새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경을 괜히 구해왔지, 내가."

거짓말 못하는 칼리안 역시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는, 언젠가 아르센이 퇴근한 뒤에 빌헬름 관에 들러 여전히 걸려있는 로브자락이며 저 소름끼치는 조각상을 꼭 없애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본 앨런이 슬쩍 웃으며 마력을 움직였다. 칼리안과 똑같이 생긴 작은 조각상이 금세 녹아내리더니 증발하듯 사라졌다.

또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까.

"우선 앉으시지요. 자네도 앉게."

무려 아르센이 칼리안의 앞에서 고집을 부리게 한 원흉을 손끝 하나로 없애버린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제대로 만들어도 될 때가 되면 그때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럼."

"하지 마요. 절대 하지 마요."

마법사들 미쳐있는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괜찮았는데. 아르센이 제일 가는 놈이었음을 이제야 여실히 깨달은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키리에를 불러 함께 자리에 앉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런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이렇게 물었다.

화제를 좀 돌려보기 위함이었다.

정확히 앨런의 입맛에 꼭 맞을, 지나치게 많은 시럽이 올라간 수플레 케이크의 단 맛을 본 키리에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을 때 쯤.

"기사들 합류하면 훈련 시킬 사람이 부족할 것 같아서요, 스승님."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교육을 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기사들 대련 상대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플란츠가 관리를 시작한 기사단, 카렌과 라온. 그곳에 속한 기사들과 대련을 해 줄 만한 인물로 키리에를 두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보던 앨런이 키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벌써 그리 자랐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앨런은, 도박장의 사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른 뒤에도 꿋꿋하게 서 있던 키리에의 눈과 지금의 눈빛은 조금 다른 데가 있었음을 알아봤다.

본인을 앞에 두고 꽤 대견해하는 듯한 앨런의 말에도, 키리에는 별다른 말 없이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스스로의 능력을 평가하는 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아직 잘 알지 못해서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전하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곁에 앉아있던 아르센이 키리에를 보며 웃었다.

"축하하네."

그리하여 키리에는 매우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벌써 그리 자랐습니까' 라는 앨런의 말부터 지금까지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하나도 이해하지를 못했다.

칼리안은 아무 설명 없이 키리에를 데려왔으니 말이다. 카렌이나 라온의 기사들과 대련을 하는 것 까지는 그리 어려울 것 없이 이해를 했는데, 난데 없이 무슨 축하란 말인가.

그런 키리에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아르센이 설명을 했다.

"호위 시종이 기사들과 대련을 할 수 있겠나."

그 말을 들은 뒤에야 무슨 이야기인지를 조금 이해한 키리에를 향해, 칼리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방패 말고 다른 것 해야지. 키리에."

기사 서임. 칼리안의 검.

키리에에 대한 기사 작위를 내려주겠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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