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4)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쟤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는 더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 수록 의문이 늘고 짜증이 무럭무럭 솟구치는 미친놈은 태어나 처음 겪어봤는데 그놈이 하필 내 동생인 그런 문제 때문에, 플란츠는 결국 그냥 다 집어치우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됐다.
하긴, 칼리안 같은 놈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이 세상은 정말 평화로웠거나 혹은 이미 다 망했거나 둘 중 하나일거다. 그러니 저런 놈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던 탓에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면서도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하."
플란츠는 짜증인지 걱정인지 미안함인지 답답함인지 모를 그 모든 것들을 죄 담아낸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실로 미묘한 이 형제의 대화를 적당히 좋게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칼리안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새 화가 풀렸던 플란츠도 적당한 선에서 한 발을 물리려고 했다.
"웃네, 또."
쟤가 웃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비둘기 대신 매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고 매일 왕궁 밖으로 도망갈 놈 뒤치다꺼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뭐 그런 생각까지 했으니, 또 웃지만 않았으면 플란츠는 분명 대화를 잘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저 미친놈이 웃었다.
칼리안은 체이스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다 했고 플란츠는 괜한 말을 했음에 잠시 후회했으며 미친놈이 처웃었다. 칼리안은 걱정할 일은 없으리라 말했고 플란츠는 그 말이 왠지 거북하다 느꼈으며 미친놈이 처웃었다.
저 미친놈은 거짓말을 못했고 플란츠는 똑똑했으며 칼리안이 처웃었다. 조금 전에는 살기 싫다는 듯이 웃더니 이제는 이미 죽은 것처럼 웃었다.
- 저는 저 분의 동생이었고 지금은 형님의 동생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구는 것이 쉽지는 않네요.
체이스가 카이리시스에 들이닥쳤던 날. 체이스를 처음 마주한 뒤에 돌아와서는 짖어댔을 때 딱 지금 같은 얼굴을 하고 웃었던 놈이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분명 플란츠가 알면 안 되는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고. 그리고 칼리안은 플란츠가 내걸고 온 심장을 신경써주느라 체이스 쪽을 내려놨을 것이라고.
그게 아니고서는 세뉴 관의 산책길을 빙빙 돌던 날의 체이스를 그대로 베껴놓은 것 같은 저딴 얼굴을 하며 웃을 일이 없지 않나.
그러니 저 팔찌는 플란츠의 심장 대신 내려놓은 체이스에게 건네는 썩은 밧줄임을, 같이 살자고 꺼낸 것이 아니라 잘 버텨보자고 주는 구렁텅이임을, 플란츠가 알아봤다.
"그래. 쉽지 않겠지."
칼리안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을 꺼낸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숫자를 한 번 세 봤다.
손에 든 것을 전부 다 플란츠에게 넘겼을 때. 원망하라 했더니 욕만 했을 때. 그리고 오늘.
굵직한 것만 생각해도 이미 세 번을 참았다.
······ 미친놈.
몇 바퀴 쯤을 돌아 제 자리에 서 있어서 아무도 못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뜯어보면 세상에서 제일 크게 돌아버린 놈.
자기가 돈 것을 알면서 안 돈 척 하던 미친놈.
그래놓고 플란츠를 미친놈이라 욕했던 진짜 미친놈.
- 제가 그렇게 속만 썩이는 동생은 아니라서요.
장담하는데, 저렇게 다채롭게 속을 썩이는 동생 새끼는 대사막까지 전부 뒤져봐도 쟤 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과 매우 객관적인 감상을 마친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떴다.
연두색 눈이 잠시 테이블 위를 훑다가 칼리안이 옆으로 밀어놓은 찻잔에 가 닿았다. 그것을 묵묵히 눈에 담던 플란츠가 웃었다.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사람을 참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어보이던 플란츠가 돌연 표정을 싹 굳히며 씹어뱉듯 말했다.
"내 아우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군."
그리고는 굳이 옆으로 치워 준 홍차를 도로 가져와 주저없이 마셨다.
자고로 미친놈을 정신차리게 하려면 그 미친놈보다 조금 더 미치면 된다. 나이프 잡아챈 날의 칼리안이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플란츠는 스스로에게 독이 될 것이 분명한 그 향긋한 차를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짙고 짙은 향기에 진저리가 쳐졌지만 생각만큼 지독하지 않아서 스스로도 잠시 놀랐다.
"뭐 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변한 플란츠의 태도에, 칼리안이 이렇게 물어왔다.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속 썩이는 형님 노릇."
칼리안에게 배운 것을 잘 활용해 보여준 플란츠가 찻잔을 세게 내려놨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건네 준 팔찌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쾅!
그래서 칼리안은 당황했다.
플란츠가 뭘 알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서.
대놓고 동생 속을 썩이겠다고 선언하는 사춘기 형님은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것도 모르겠어서.
* * *
그리고 앨런도 당황했다.
난데 없이 찾아온 푸성귀 같은 2왕자가 듣도보도 못한 요구를 해 온 탓이다.
"창문 열어봤고. 보온 마법 걸어봤고. 그러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법사."
칼리안이 가져간 팔찌를 플란츠가 가져왔다.
그리고는 생떼 같은 요구를 부탁처럼 했다. 아니, 요구같은 부탁을 들어달라며 생떼를 부렸다.
난생 처음 보는 플란츠의 모습에 앨런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플란츠의 말마따나, 앨런은 시스파니안의 보안 마법을 풀어서 플란츠의 방 창문을 열어 준 적이 있었다. 히나의 로브에 각종 마법도 걸어준 적 있었다.
하지만 지금 플란츠가 하는 말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시스파니안님의 힘이 닿는 곳에서 개인을 위한 통신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풀어달라 하시면······."
"내가."
앨런의 말을 끊은 플란츠가 비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하든 놈 앞길을 막게 되는 게 짜증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까 했는데."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앨런의 집무실 창 밖으로 보이는 헤이시아 궁의 터를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놈이 저딴 짓만 안 했어도 죽은듯이 살았을텐데. 사람을 살려놨으면 살게 해야지. 살려놓고 숨막혀 죽게 만드는건 또 뭔데."
여기까지 말을 들은 앨런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입맛 까다롭고 성격 사납지만 칼리안 말은 잘 듣는. 그래, 꼭 레이븐 같은 2왕자의 앞 뒤 없는 얘기를 아주 잘 알아들은 까닭이다.
"칼리안 왕자님이 또 고약한 일을 저질렀나 봅니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눈꼬리만 찌푸렸다. 그것을 보며 설핏 웃은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제가 가진 것이 커피와 민트밖에 없으니 다른 차를 준비해달라 하겠습니다."
찾아오자마자 어울리지도 않게 말을 쏟아낸 플란츠 덕분에 아직 차도 내오지 못해서 하는 말이었다.
"······ 민트."
사실은 커피 쪽이 나았지만 짙고 짙은 사과 단 내가 아직도 입 속을 맴돌았던 탓에, 플란츠가 이렇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문제 많은 내새끼랑 놀아주는 유일한 친구를 대하는 표정을 또 지어보이는 앨런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플란츠를 향해 웃어보인 앨런이 집무실 한 쪽에서 차를 준비했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비춰오는 맑은 햇빛이 소파까지 들어와 플란츠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데블란은 뱀 같은 자입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 때, 고요함을 깨고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데블란, 플란츠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냉철하고, 가차없고, 도전적인, 결코 실수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는 평가가 늘 함께 붙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왕세자위에 등극하자마자 제 손으로 형과 누이들의 목을 쳤던 사람입니다."
달칵, 하고 플란츠의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였다. 아주 연하게 풍겨오는 민트 향이 스치듯 지나갔다.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보라색 꽃이 무엇을 보여주는지조차 모르는 이도 있지만, 불신의 근원을 뽑아버려야 마음을 놓는 이도 있으니."
다른 나라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새들. 끝없는 의심.
"누군가를 상처입혀 자신을 지키는 아비로부터 제 형제를 보호하는 것밖에 하지 않아서, 자신을 상처입혀 누군가를 지키는 법만 압니다. 그러니 그것이 너무 야박하다 여기지는 마시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건네는 앨런을 보던 플란츠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안 그래. 알아, 나도."
놈이 뭘 보고 자랐는지, 뭘 하고 살았는지는 몰라도 왜 그러는지는 알았다. 그러니 그것을 두고 어떻게 야박하다 생각하겠나.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거지.
"팔찌. 세크리티아의 왕세자한테 보내려는데."
그 말에, 앨런이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하는 생각을 삼키는 것이 보여서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양이 대신."
고양이 대신 팔찌를 체이스에게 보내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면 칼리안이다. 적어도 앨런은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어휘능력을 가졌으니까.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안 플란츠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사. 당신 아들 당신이 살리라고. 능력 있잖아, 당신은."
아들이라는 말을 이 곳에서 이렇게, 그것도 플란츠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던 앨런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하지요."
연한 빛을 내는 민트차를 보니 어떤 놈이 생각난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또 놈의 앞길을 막든 말든 내 할 일 내가 알아서 계속 할 거니까 아우님은 골치가 아프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가만히 주는 것만 받으면서 살지는 않을 거니까.
체이스와는 다르니까.
* * *
그 후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간이 흘렀다.
칼리안과 플란츠는 여전히 가끔 함께 밥을 먹고, 거의 매일 마주보고 앉은 채로 종이뭉치를 들여다보며 골머리를 썩였다.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벽의 조형을 샅샅이 뒤졌다. 한 발을 담그게 된 할 일 많은 마법사 아르센도 한 두 번 와서 밤을 샜다.
체이스로부터의 서신은 없었다. 플란츠는 분명히 세작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했으니 하늘을 날아가는 매를 누군가 붙들었거나 체이스가 시간의 축을 떠올리는 것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쯤.
칼리안의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빛을 냈다.
체르밀 궁의 3층에서, 종이에 적힌 문자의 기원보다 루시가 왜 자꾸 허벅지를 꾹꾹 눌러대는지를 더 궁금해하던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리고 루시를 안은 채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칼리안 왕자.
하늘에 떠 있는 푸른 별과 은빛 달이 꿈결같이 빛나던 시간.
이런 곳에서 이렇게나 빠르게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꿈결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칼리안이 조용히 일어나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이 사태가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지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놈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플란츠 왕자로부터, 칼리안 왕자가 나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하니 직접 말을 걸어보라는 내용으로 전서응이 왔는데. 내가 마력을 다룰 줄을 몰라서, 카스트린 경의 도움을 받느라 늦었습니다.
······ 망할 놈.
시간의 축에 대한 기억이 필요하다는 말을 안 전했다.
필요하면 직접 하라는 소리다.
나는 안 할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하라는 소리다.
저 목소리를 듣고서도 할 수 있겠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소리다.
- 아······.
칼리안이 양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잠깐, 꿈을 꾸는 것 같아서.
- 칼리안 왕자?
마음의 준비도 없이 언젠가의 꿈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똑같이 들려온 바람에,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서.
해야 할 말을 잊어버리고 할 수 있을 말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얼굴을 덮었다.
검은 하늘 아래 은색의 달이 비추면 그것이 꼭 별빛처럼 아른거리던 베른의 긴 머리카락이 자꾸 떠올라서 얼굴을 덮었다.
그 기억을 닫아 둔다고 해서 닫아질 줄 아느냐고.
미친놈이 그렇게 묻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 같아서 할 말을 다 잊어버렸다.
- 제가.
- 얘기해요. 뭐든. 괜찮으니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모르면서 선뜻 대답을 해오는 바람에, 칼리안의 어깨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 아직은 아니지만.
날개 접은 새들이 고이 울던 그 새벽처럼, 칼리안이 한번 더 숨을 참았다.
- 나중에······.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면. 정말로 괜찮아지면 그때.
- 체이스 왕세자님과 저와, 그리고 키리에까지, 다 같이. 왕궁 첨탑에서. 술이라도 같이 마셨으면 해서. 그래도 괜찮은지.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 더 자라면 오세요. 얼마든지.
흔쾌한 대답이 흘러내리듯 내려앉았다.
[외전] 순백의 맹금
새까만 밤.
푸른 빛무리가 하늘을 밝힌다.
어둠에게 종말을 고하는 태양은 틀림없이 붉었다.
그런 붉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푸름으로도 밤을 내몰 수 있음을 알려주려는 듯, 한밤에 모인 파란 빛무리가 검은 밤을 밝히다 눈처럼 내렸다.
밤을 물리치는 것은 똑같을진대, 그 붉고 푸름의 차이는 또 어찌나 확연하던지.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눈, 녹빛 눈, 갈색 눈. 그 다양한 색의 눈들에 새파랗게 반짝이는 밤 하늘이 담겼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별빛 가루가 그들의 머리와 이마와 손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세렌티의 시간.
2월의 마지막과 3월의 처음 사이.
어느 해에는 찾아오고 또 어느 해에는 찾아오지 않는 그 황홀한 날이 왔음에,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잊고 있었는데."
하늘에 모여든 빛이 눈처럼 흩뿌려지다, 어느 순간 다시 하늘로 떠올라 저물면 그제야 다시 밤이 되었다. 한 밤을 대낮처럼 밝히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 마치 빠르게 지나가버린 날처럼 느껴진다 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시간에 '하루'를 담자 했다.
다만 그 시간은 결코 매년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달력에 없는 날을 만들어 그 시간을 기념하였다.
그렇게 찾아온 짧은 하루. 2월 30일.
베른은,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내 생일이었구나."
달력에는 없는 아름다운 하루.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세렌티의 축복과 같은 시간.
"아버지는 알았을텐데. 하필 이런 날에 나를 보냈네."
이런 소년의 말에 두려움 가득한 얼굴의 사내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툭, 하고.
소년이 사내의 숨을 앗아간 탓이다.
붉은 피가 방울방울 맺힌 검에 파란 별이 비쳤다. 겨울의 끝을 담은 듯한 연보라색 눈이 한 번 더 빛을 잃는다.
쏟아지듯 내려오는 푸른 반짝이의 한 가운데, 소년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날. 오로지 소년 홀로 땅을 보았다.
깊이 눌러 쓴 검은 후드에 배인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아서. 제 손으로 막을 내린 그 많은 생명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아서. 소년은 고개 숙여 걷기만 했다.
세크리티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가장 빛나는 곳의 그림자 속으로, 비척비척.
그 날이 생일임을 이제는 알았음에도.
* * *
2월 30일.
기억되기 힘든 짧은 하루.
그런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의 어머니가 지어주었던 이름.
베른.
그것은 소년이 받았던 첫 생일 선물이었다.
* * *
세크리티아 왕궁.
그 한 구석의 넓은 방으로 돌아간 베른은 버릇같은 말을 꺼냈다.
"혼자 있을 거야."
한밤. 검은 로브와 검을 들고 밖으로 나선 베른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은 데블란, 테일란이 아닌 데블란의 다른 호위 기사, 그리고 데블란의 서신을 전달해주는 베른의 상급 시종 뿐이었다. 살아있는 이들 중에는 그 셋이 전부였다.
기사들이나 테일란은 의심을 했다. 시도때도 없이 묻어있는 지독한 피 냄새를 모를 리 없으니까.
하지만 베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들은 왕자나 왕자의 상급 시종을 추궁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했다.
"네, 왕자님."
검은 로브를 걸친 베른이 돌아올 즈음이면 베른의 시종은 분주히 움직였다. 그 날이 겨울이든 여름이든,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을 활활 피워 두고 커다란 욕조에는 차가운 물을 받아 두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깨끗한 붕대와 약을 올려두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베른을 위한 최선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 탁!
문을 닫고 굳게 잠근 베른이 벽난로 앞으로 가 섰다.
검은 옷과 로브에서 피 비린내가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라, 베른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 그것을 전부 던져 넣었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의 크고 작은 목숨들을 차가운 물로 씻어내렸다.
그렇게 물이 닿은 팔뚝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팔뚝에 난 얕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서늘한 눈을 한 베른이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아프다."
오늘, 죽은, 그들은, 더, 많이, 아팠을텐데.
베른의 검이 아무리 빨라져도, 다른 곳을 손대지 않고 오로지 목만 베어도, 그래도 많이 아팠으리라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채 차디찬 물 속에 몸을 담근다.
- 똑똑
찬 기운이 가득한 침묵을 깨고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욕실 밖 방문 건너 먼 곳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분명 혼자 있겠다 하였는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던 베른이 퍼뜩 놀란 얼굴을 했다. 시종이 굳이 베른을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베른이 떠올린 이유가 맞았음을 알려주듯 시종이 이렇게 말을 해왔다.
반가움, 기쁨, 난처함, 당황, 등.
베른의 얼굴에 처음으로 제 나이 다운 표정이 스쳤다.
"아······."
서둘러 가운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온 베른의 눈이 벽난로를 향했다. 이미 전부 타 버려 까만 재가 된 옷가지가 보였으나 베른은 그조차도 체이스의 앞에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나갈게요, 형님."
때문에 이렇게 말하며 팔의 상처를 붕대로 꾹꾹 감싸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 * *
세크리티아 왕궁의 첨탑 꼭대기에 서면, 온 세크레타가 발 아래 펼쳐졌다. 베른은 먼 곳이 보이는 그 첨탑 위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 베른과 나란히 선 채로 베른의 시선 끝에 이어진 긴 성벽을 함께 보던 체이스가 말했다.
바다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지금이요?"
그 말을 들은 베른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느냐?"
"지금이 아닌 언제든지요."
체이스는 생각이 깊었고,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고, 항상 부드럽게 웃었다.
대신 조금 뜬금없었다.
조금 많이 뜬금없었다.
"나는 지금 가고 싶은데. 내 동생이랑."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싱긋 웃었다.
바로 조금 전 베른이 무엇을 하고 왔는지 모르는 채로.
데블란의 사촌 동생과 가까이 지내오던 한 백작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안 돼요."
죽을 때까지 체이스에게 알리지 않을 비밀 하나를 늘린 베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새벽에 일국의 왕자 둘이 수도를 떠나 바다를 가자고 한다. 아무리 바다가 가깝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모르지도 않으면서 가자고 했다.
물론 베른이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습격이 아니었다. 그 부분도 우려되는 것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문제가 더 컸다.
"형님 감기 걸려요."
감기, 걸릴까봐서.
베른이 열 살이 되던 그 날 밤에도 세렌티의 시간이 왔었다. 그 밤이 지난 아침, 데블란은 두 형제를 데리고 바다에 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방법으로 체이스를 시험했다.
베른을 물에 빠뜨렸고 체이스가 뛰어들었다.
세크리티아의 겨울이 아무리 짧다지만 어린 아이가 물에 들어가도 될 만큼은 아니었다.
결국 체이스는 감기에 걸렸다. 심한 감기는 심한 폐렴이 됐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때문에 베른에게 있어 감기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병이 되었다. 그리고 데블란은 더 이상 베른의 혈육이 아니게 되었다.
"감기 정도야. 나으면 되지."
하지만 정작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는 아니었던지, 체이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스승님과 함께 가실 생각 아니잖아요. 누가 따라오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요."
"네가 있는데 무엇을 걱정할까."
"형님 목숨이요."
그 말을 들은 체이스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다만 그것이 결코 생각을 접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체이스의 고집은 그의 어머니인 후궁 루이즈도 꺾지 못했으니, 베른이 그 고집을 이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결국 베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사들은 알아서 물려주세요. 아버지에게도 직접 얘기하세요. 저는 모릅니다."
데블란이 체이스에게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었다.
데블란은 체이스가 무엇을 하든 그냥 두었다.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고, 체이스에게 세자위를 주겠다고도 약속했다. 베른이 데블란을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대신이었다.
체이스를 살리는 것이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 정도 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같은 체이스의 대답에, 베른이 피식 웃었다.
세렌티의 시간도 다 지나버린 어두운 새벽.
두 왕자의 말이 결국 바다를 향해 달렸다.
* * *
바다를 가자 하기에, 당연히 왕실 바다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체이스는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먼 곳으로 왔다.
은빛 달이 물 위에 떠올랐다 이지러지길 반복하는, 달에 비친 윤슬이 고요하게 반짝이는 그 바다를 말없이 지켜보던 베른이 입을 열었다.
"선물이라기엔 너무 큰데요."
"생각을 하다보니 점점 그리 되더구나."
작은 바위가 하나 있고, 작은 나무집이 하나 있었다. 파도 소리가 좋은 좁은 백사장이 있는 아주 작은 바닷가였다.
"아리안느는 검이 좋겠다 하였는데, 그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멀리 달릴 수 있을 말을 사줄까 했는데 말은 이미 세 마리나 있고. 그래서 별장을 사줄까 하였는데 그것도 어머님께 물려받았으니. 네게 없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바다를 샀지."
작은 바닷가를 동생에게 선물한 체이스가 칭찬이라도 바라는 얼굴이 되어서는 이렇게 설명을 했다.
"마침 어머님께서도 근처에 계시니, 더 좋지 않겠느냐."
한 달 전 사망한 세크리티아의 왕비.
바다는, 베른의 어머니인 디에나 왕비의 묘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귀족들 말이 많을 텐데요."
귀족들은 안그래도 말이 많다.
동생의 생일 선물로 바다를 선물하는 형이라니. 분명히 또 여러 말이 나올 터였다.
체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리안느의 소유였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눈에 안 띄도록 이렇게 몰래 와서 주기도 했고."
두 형제의 오랜 친구이자 체이스의 정혼자인 아리안느. 그녀라면 자신의 이 작은 바닷가를 1왕자에게 팔아 치웠다는 비밀을 잘 지켜주리라는 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이 새벽에 베른을 데려왔으니, 그것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말이었다.
결국 베른은 더 거절하지 못하고 이 대단한 선물을 받기로 했다. 어머니를 잃은 지 오래 되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티를 내지 않는 베른을 걱정하여 챙겨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어머니와 가까운, 게다가 잔잔한 파도소리와 좋은 냄새가 나는 이 선물이 아주 마음에 들기도 했고.
"언제 찾아오든 아무도 없을테니 아무때나 오려무나. 아무때나 와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리하거라."
모래사장은 맨 땅보다 달리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종종 이 곳에 와서 달리기나 연습하면 되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는 베른을 보며, 체이스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니. 가끔은, 아니. 자주여도 좋으니 언제든 와서 편안히 지내거라. 그리했으면 좋겠구나, 나는."
이제 고작 열 네 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하나 뿐인 동생.
그런 동생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마디마디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베른은 하루의 대부분을 기사 테일란과 함께 보냈다. 매일같이 물집이 터지고 피고름이 새도록 검을 잡았다. 어머니를 잃었던 그 며칠을 빼고는 언제나 검을 잡았다.
누구를 위해 그리 하는지, 체이스는 알았다.
그 손에 이미 얼만큼의 피가 묻었는지는 몰랐으나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 동생에게 바다를 선물했다. 숨을 좀 돌리고 쉬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베른은 그냥 웃기만 했다.
밀려왔다 나가는 파도소리가 듣기에 좋아서.
피 비린내 말고, 소금기 가득한 바다 비린내가 마음에 들어서.
"베른."
그런 베른을 보던 체이스가 가만히 베른을 불렀다. 체이스와 꼭 닮은, 단지 체이스보다 머리가 길고 눈 색이 더 옅을 뿐인 베른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 아무래도 나는 네가 기사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일까?"
"언제는 듬직하니 좋다고 하셨으면서."
"그것이 진담인 줄은 몰랐지."
베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거짓말 못하는 것 아시잖아요."
"그때는 그것도 미처 몰랐으니. 정말 하겠다 할 줄 내가 알았겠느냐."
"이미 다 늦었어요. 검이 좋은 것을 어찌합니까."
고집 세기로는 체이스나 베른이나 똑같았다. 비단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었으니 다를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이번에는 체이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둠 짙은 바다.
푸른 빛이 모두 사그라들어 이제는 달빛과 별빛만 아득한 그 암흑 속에서도 동생의 손이 너무 잘 보였다. 상처 가득한 것이 어디 손 뿐이겠냐만은, 그 손이 유난히도 속상하여 더 말을 못했다. 체이스의 목소리만큼 가만가만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삼켜진 말을 대신했다.
"자주 오겠습니다. 선물 잘 받을게요, 형님."
영특한 베른, 생각이 깊은 아이.
언제나 안타까운 소중한 동생.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바람이 부는 숲 같은 목소리가 파도 위에 흩어졌다.
체이스의 짧은 청은발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그 뒤를 따라 베른의 긴 청은발도 함께 흔들렸다.
"그 자리는 너의 것인데."
베른의 나이가 열 넷이 된 그 날.
날이 밝으면, 데블란은 세자위를 체이스에게 주겠노라 했다. 그것이 또 마음이 쓰였나보다.
"제 자리 아닙니다."
이 땅의 주인이 앉을 자리.
신성한 이의 핏줄이 앉아 신성한 대지를 지켜야 할 자리.
누군가는 그 자리를 가지기 위해 피를 묻히고, 또 누군가는 그 자리를 가지지 않기 위해 피를 묻히는 끔찍한 모순의 대상.
"누구의 것이든 상관 없잖아요."
누구의 것이든, 정말로 아무 상관 없는 자리.
하지만 둘 모두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이스의 것이어야 하는 자리. 그러니 베른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탐나지 않는 그런 자리.
"저는 안 가질래요."
이렇게 말한 베른이 큰 숨을 들이켰다.
바다 비린내, 조금이라도 더 담아가려고.
* * *
중앙 귀족이 모두 모인 곳에서 데블란은 단 한 마디만 했다.
체이스를 세자위에 올리겠다고.
그 이상의 다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후궁의 소생이 아닙니까."
귀족들은 반발했다.
데블란의 권력이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발했다.
데블란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입으로는 체이스를 언급하면서도, 그 시선은 베른에게 닿아있음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1왕자님이라 하지만, 왕비님의 아드님 되시는 2왕자님을 두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반발은 거세기만 했다.
다른 이성적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데블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베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이것도 한번 이겨보거라.'
베른의 눈이 차게 식었다.
베른의 이런 살기등등함을 꺼려하여 절대로 베른과 독대하지 않던 데블란이 제 아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베른이 세자가 되면 체이스는 죽는다. 귀족들은, 지금껏 보여온 체이스의 거대한 날개를 완전히 꺾어버리려 들 것이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깟 왕관 하나 때문에, 그깟 왕좌 하나 때문에.
체이스를 잃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다.
톡톡톡, 하고.
베른의 손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몇 번이고 이어진 그 소리에 귀족들의 시선이 베른에게로 모였다.
데블란 역시 베른을 쳐다봤다. 베른도 데블란을 쳐다봤다.
베른의 손 끝이 둥글게 움직였다.
그 끝을 따라, 베른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보시죠.'
아버지.
- 드르륵
묵직한 의자가 뒤로 밀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데블란의 눈에 날이 섰다.
- 저벅
한 걸음.
높이 묶은 긴 머리가 그 걸음을 따라 흔들렸으나, 그 뿐. 그것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베른. 멈추거라."
데블란의 목소리를 흘려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데블란의 말을 어긴다.
- 저벅
다시 한 걸음.
멈추지 않고 올곧게.
오로지 체이스만을 향해.
걸었다.
그의 동생이 무엇을 할지 이미 깨달은 체이스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리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아서, 왜 거절할 수 없는지 너무 잘 알아서.
죽어도 잊지 못할 만큼 아픈 미소를 지었다.
"······ 일어나시어."
나지막한 목소리.
"서약의 언을 들어주십시오."
베른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것은 태풍이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체이스의 보랏빛 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동생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 베른 세크리티아가 세렌티의 이름을 빌어, 나의 유일한 주인이 되실 체이스 세크리티아 왕자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기사의 맹세는 세렌티의 가호를 받기에, 그것이 시작되면 그 어느 누구도 막아설 수 없었다.
"나의 검은 주군을 위해 쓰일 것이고, 나의 방패는 주군의 앞을 막을 것이며, 나의 죽음은 주군보다 앞설 것이니."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베른의 말을 막지 못했다.
"기사의 명예를 지니고, 주군을 위해 싸우다 죽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핏줄의 힘을 가진 왕자가, 고작 그것 하나가 부족했던 형을 살리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체이스는 그런 베른을 이기지 못했다.
그 고집을, 절대로 이기지 못했다.
검은 바다의 파도 소리가 체이스의 귓가를 스쳤다.
"허락······."
소금기 가득한 바다 비린내가 베른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것을 잊지 않는 한, 피 비린내 따위는 얼마든지 몇 번이고 견뎌낼 수 있었다.
"허락하겠다."
그리하여 베른은 기사가 되었다.
왕좌를 위한 길을 내려놓고 체이스의 기사가 되었다.
왕의 동생으로, 왕의 신하로, 왕의 기사로. 그 모든 모습으로 오로지 체이스 하나를 지키고자 하여서. 그렇게 살다 죽기를 진심을 다해 바랐으므로.
* * *
순백의 맹금, 체이스.
그 이름의 뜻과 같이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제왕이 되어, 이 땅의 오롯한 빛으로 남으시기를.
다른 모든 어둠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몫으로 기꺼이 받들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