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81화 (182/527)

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3)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버릇이 됐다.

"버릇이라는 게 원래 다 그렇게 들던가. 아니면 나만 그런 건가. 잘 모르겠네."

어느새 비어버린 와인잔을 채워 넣으며, 체이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 앉아 그렇게 술을 기울이는 날이 하루에서 이틀, 사흘로 늘어나면서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버릇이 됐다고.

별 말 없이 그런 체이스의 곁을 지켜보던 테일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기도, 혹은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가."

큰 뜻 없는 목소리로 대꾸한 체이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빛의 달과 파란 별 아래, 비슷한 색을 내는 청은발이 함께 흔들거리다 가라앉았다.

"저하께서 카이리스 3왕자의 기호를 따르려 일부러 들이신 버릇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갑작스럽게 버릇처럼 입에 대고 있는 민트차를 말함이다.

조용히 이어진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체이스가 테일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 독하지 않은 와인이었으므로 체이스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 방금 전에 테일란이 한 이야기도 잘못 들은 말은 아닐 터였다.

"아, 들켰구나."

그래서 체이스는 이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웃음의 끝에 깊고 서글픈 한숨이 매달렸다.

본래의 체이스는 그런 얼굴을 내비친 적 없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누구든 언제나 웃어보였을 뿐. 서린 한기같은 표정도, 곧 스러질 것 같은 물안개같은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체이스의 시종보다 더 오랜 시간 그를 보아왔고 또 가르쳐왔던 테일란은 그것을 알았다.

그랬으니 갑작스레 마시는 민트차가 무엇 때문일지, 그것 하나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체이스."

때문에 테일란은, 언제나 붙여오던 정중한 말 대신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하나하나 흩어져 떨어지는 마른 낙엽같이 웃고 있는 체이스를 붙들었다.

세자위에 앉은 뒤로는 들어본 적 없는 호칭에, 체이스가 조금은 놀란 듯 혹은 우스운 듯한 표정이 되어 테일란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내가 취한 것이 맞나······. 내 스승님이 이름을 다 불러주시고."

그리고는 이렇게 농담같은 말을 꺼내놓았다.

그만 묻고 더 이상 관심 가지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말을 돌리려 한 것이기도 했으나 테일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이 되어 이러는 것이 아니냐."

체이스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발 아래 이어진 작은 도시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버릇처럼 술을 마시고, 내 스승님은 버릇처럼 내 옆을 지키고. 나는 버릇처럼 꿈을 꾸고, 내 스승님은 버릇처럼 나를 걱정하고."

그 동안 버릇이 된 것이 참 많아서 떠오르는 것도 많았다. 때문에 이런저런 버릇들을 읊어나가던 체이스의 보랏빛 눈이 테일란을 향해 움직였다.

"그 정도로 족합니다, 스승님. 민트차 말고."

칼리안의 기호를 체이스가 왜 따라하고 있는지, 그에 대해서는 스승 테일란에게조차 이야기해줄 수 없다는 말. 그것까지는 걱정하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아달라는 말.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 지금 당장 저 아래로 뛰어내릴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지 말고."

발 아래 놓인 것들을 향해 미련 없이 뛰어내릴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다고. 하나뿐인 제자를 보며 그리 말하는 테일란의 얼굴에 수심이 깊었다.

테일란이 체이스를 제자로 대하고 있었으므로 체이스 역시 잠시동안 제자의 모습이 되어 고요한 목소리를 냈다.

"당장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은 것을 참았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요."

아, 오래 전이 아닌가.

이런 말을 덧붙인 체이스가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체이스."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테일란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을 뿐이었다.

꿈이 버거워도 잊지는 않아야 했고, 휘청거려도 넘어지지는 않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일로 다 내려놓을 만큼 가벼운 생이 아님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소리 없는 웃음같이 소리 죽인 바람이 한번 불어오다 흩어졌다. 그 끝을 따라가듯 먼 어딘가를 눈으로 좇던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 * *

검을 들어 지키겠다 하였으니.

원하는대로 해보거라.

지켜내든 버텨내든 어디 한 번 해보거라.

해 내면.

그 놈을 살려 내 자리에 앉히마.

네가 원하는대로.

* * *

짜증을 내지도 않았고 눈을 감지도 않았다.

앞에 앉은 이의 웃음이 멈추도록, 그냥 가만히 앉은 채 자리를 지켰다.

웃음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모를 것이 다 멈추도록. 선명히 타오르는 붉은 눈이, 선명히 빛나는 연두색 눈을 바라볼 때까지.

"······ 처음에는."

한참을 웃다가 숨을 쉬다가 다시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간신히 다시 숨을 쉬듯 말했다.

"꿈을 꾸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고 나면 모든 것이 꿈 속의 일이 되어버리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요."

한 팔을 잃고, 피를 흘리고, 가슴에 구멍이 난 채로. 그보다 더한 것들을 잃은 채로 서서히 식어 죽어가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고.

"사실 생각이라기보단 갈망했다 하는 것이 맞겠지만."

말 사이에 숨긴 것을 들었을까, 듣지 못했을까.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칼리안의 시선에서 자신의 눈을 떼어냈다.

"아쉽게도 그것이 꿈은 아니더군요."

꿈 속에서 옛 칼리안을 만났고, 꿈 속에서 체이스를 만났다.

이제는 없는 이들을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다. 손에 잡히지 않도록 지나가버린 이들을 꿈 속에서 만나고 잃었다.

이제 칼리안은 그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꿈꾸지 않는 이가 어떻게 그 안에서 깨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칼리안에게 있어 그것은 꿈이 아니라 끝이었다.

- 달칵

식어버린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 얼마 전, 이 곳에 머무르던 세크리티아 세작의 절반이 죽었다 들었습니다."

꿈 얘기를 하더니 누군가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여전히 뜬금 없이, 그렇게 한결같이.

"크게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만약에 저였다면 그리 했을 것이라서,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지 곧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실 수 밖에 없게 되었음을 알게 돼서. 그것이 조금쯤 생소했다 해야 할까요."

제가 키운 세작들을 제 손으로 거두는 일을 그렇게나 담담하게 입에 올린 칼리안은 플란츠의 다른 감상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과거와 지금의 사이에 생긴 빈 자리를 느끼셨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빈 자리를 직접 채워놓으셔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셨으리라고,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체이스는 여전히 현명했다.

현명하기만 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이곳 저곳에서 균열이 생겼다.

그러니 체이스는 기억 속에 남은 베른이 해온 일이 무엇이었을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 일을 대신 해줄 이가 더는 없었음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체이스를 현명한 성군으로 남기기 위해 베른이 무엇을 했는지를, 체이스 홀로 빛에 두기 위해 베른이 어디에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을 터였다.

그 빈 자리가 얼마나 크게 보일지.

그 자리를 홀로 채우는 것이 얼마나 버거울지. 끝없이 이어질 꿈에서 깨면 찾아오는 악몽같은 현실이 얼마나 끔찍할지.

"제가,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베른의 빈 자리가 체이스의 균열이 되고 있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칼리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스를 찾는 것이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신 차를 들어 한 모금을 더 넘겼다.

"알기 때문에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스를 찾는 것은, 과거의 체이스보다 지금의 체이스가 몇 배는 더 단단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베른이 있었을 때보다 상황이 나쁘겠지만. 체이스를 대신해 베른이 뒤집어 쓴 피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을지 이제야 깨닫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그 빈 자리를 잘 채워놓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 한다고.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거는 것이 있어야지. 그러니 어디 한번 해보거라. 그 놈 지키는 것이 네 꿈이라 하였으니.

체이스를 대신해 그림자 속을 걸었던 베른은 지금의 체이스보다, 지금의 플란츠보다, 지금의 칼리안보다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았다.

돌아버리긴 했어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 사람의 아들로 살아왔을 만큼은 강한 사람이니까."

체이스와 베른은 아주 많이 닮은 형제가 아니던가.

그 지옥같은 데블란을.

그것은, 베른이 있고 없고를 떠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니, 혹여 흔들리실지는 몰라도 주저앉지는 않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달칵

플란츠가 대답 없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손을 뻗은 칼리안이 그 잔을 빼앗듯이 건네받아 멀찍이 내려놨다.

식은 홍차 속에서 지나치게 우러난 사과의 단 냄새가 마치 꽃향기만큼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음을, 찻잔이 치워진 이후에야 느꼈다.

"······ 게다가 어디 계시는 누구처럼 손이 많이 가는 분도 아니시니."

짖지 말라고 해야 할지. 짖지 마시라고 해야할지.

플란츠가 잠시 그것을 고민하는 동안, 칼리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놨다.

"전서구 노릇,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테이블에 놓인 것을 본 플란츠가 소리 없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로젤리타를 떠나는 칼리안에게 비슷하게 생긴 반지를 건넨 앨런의 손목에 있었을, 아무 무늬도 없는 은색의 팔찌였다.

왕궁 안에 있을 때에는 소용이 없겠지만 밖에서라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 없이 목소리를 전달해 줄 그것을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가 필요하겠군."

편지보다 무거운 것을 들고 가야 할 테니 비둘기로는 안 되겠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의미를 함께 담아 대답을 전한 플란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왕궁 밖으로 잘 도망가는 동생놈이 이제는 얼마나 더 자주 도망갈지 가늠이 어려웠던 탓이다. 대화를 하려면, 왕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형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자 시간을 할애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으니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 저 팔찌는, 그래도 될 만큼 여유로운 날을 만들어 보겠다는 칼리안의 약속이기도 했고 그런 날을 만들 수 있도록 정신 차리고 도우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필요할 때라면 언제든 말을 걸고 무엇이든 도움을 청할테니 떼어놓지 말라는 이기심 가득한 부탁이기도 했다.

"제가 그렇게 속만 썩이는 동생은 아니라서요."

더는 꿈 꾸지 않게 된 이가, 악몽같은 현실과 현실같은 악몽의 사이에서 길을 잃어가는 이를 불러낼 목소리를 선물하면서 습관처럼 웃었다.

고양이 키우는 것보다 조금 더 좋은 꿈을 꾸었으면 하는 이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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