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2)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벌어지고 바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작은 소리로 이어지던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여, 결국은 흐느끼듯 뱉어냈다.
그렇게 웃음이 터졌다.
미치지 않고 못 버틸 세상밖에 안 살아봐서 진작부터 돌아버린 놈이, 돌지 말아야 할 놈을 보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진작부터 돌아있었음을 들킨 것이 웃겨서 웃음이 터졌다. 다시 살려고 보니 눈물 나도록 웃긴 세상이라서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지금.
왜 이러는데.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도로 삼켰다.
그렇게 삼켜온 것이 너무 많아서 체한 것처럼, 토악질하듯 터져 나온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 *
- 레넌 브리센입니다, 왕자님.
칼리안이 삼켜낸 말.
조금 전 칼리안을 찾아온 멜피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그 말.
1년 전 칼리안은, 레넌이 란델을 지지하고 있음을 에반에게 알리며 레넌을 알아서 처리해주도록 요구했었다. 그리 해준다면 심각한 적자로 빚만 쌓여가던 브리센 상단을 사들이겠다 하였다.
그 레넌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자, 칼리안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둘의 곁에 사일런트 막이 둘러졌다.
밖에 선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반투명한 막을 확인한 멜피르가 입을 열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브리센 후작이 레넌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더니, 레넌이 살아있고 곧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짓 소문이다.
자신의 저택 지하에 직접 가둔 레넌을 에반 브리센이 수소문하고 있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에반이 모종의 이유를 가지고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상단에 영향이 있습니까."
칼리안은 에반이 그런 짓을 꾸미는 이유를 가늠해보기 위해 이렇게 물었고, 멜피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대답했다.
"네, 왕자님. 레넌 브리센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폴룬 상단과 거래를 하던 귀족들이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상단 수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비단 상단만의 문제는 아닐 터였다. 브리센의 눈치를 보며 슬쩍 발을 빼려던 귀족들이 다시 브리센 쪽으로 붙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다.
"브리센 눈치 보던 귀족들 마음이나 돌리자고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닐텐데요."
레넌이 무엇 때문에 어디로 사라졌었는지의 진위에 대해 에반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당시 그것을 두고 거래를 주도했던 앨런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지 않았던가.
물론 그 때 앨런을 통해 맹세의 인을 나누게 한 것은 실리케가 레넌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양쪽 모두 진실만 밝히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안전한 계약이라 해도.
레넌을 저택의 지하에 계속 가두어두는 것만큼 안전할까.
"레넌을 끌어와 상단을 다시 꾸려준다 해서 브리센 후작에게 당장의 이득이 생기지도 않을테고요."
이득도 없겠지만, 에반은 애초에 레넌의 상단을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었다. 기사 가문에 상단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늘 불만을 보였다던 에반이 아니던가. 그렇게나 돈을 밝히면서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단박에 상단을 팔아치웠을 만큼, 에반은 레넌의 상단을 눈엣가시로 여겨왔었다.
"굳이 그렇게 해가면서 레넌을 꺼내려 드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고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한동안 말 없이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내고는 멜피르를 보며 말했다.
"폴룬 남작은 하던대로만 해요. 소문에 신경 쓰지 말고."
에반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얼굴을 한 채였으나,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 칼리안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에 대해 멜피르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그레이가 올 것을 알았군.'
에반이, 그레이가 다시 수도로 오리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제 자식을 가장 못 믿는 에반 아닌가.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령에, 그것도 그레이와 꽤 가까운 거리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두었다면 그 사실을 접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레이가 알아서 숨긴 덕분에 에반 역시 그가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님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발칸의 부군단장과 소드마스터인 그레이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에반이 전해들었다면 충분히 그런 소문을 퍼뜨릴만 했다.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브리센의 소가주 자리를 '1년 만에 간신히 찾은 귀한 아들 레넌'에게 주면 그레이가 수도에 오더라도 제 편을 만들지 못할 테니까.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혀를 쯧쯧 찼다.
에반의 행태가 답답하기 짝이 없어서였다.
'가문 명맥 끊어질 건 생각 못하고.'
그레이가 언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지를 걱정하느라, 그레이를 곁에 두고 가문의 검을 완전히 가르칠 생각도 못하고 변경백으로 만들어 멀리 보내버린 에반이 아닌가.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브리센 후작이 자작을 다시 내놓는다 해도 상단을 꾸려주지는 않을 겁니다. 폴룬 상단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테니 우선은 지켜보죠. 다른 일이 있다면 내가 내용을 전하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없어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일단 지켜보자 하는 말에 대해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멜피르는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후 칼리안은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멜피르를 안심시킨 것과는 별개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아무리 그래도 레넌 브리센을 꺼낼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에반이 생각보다 더 생각이 없었음에 기인한 놀라움과 짜증 때문이었다.
그 에반에 그 그레이다.
보고 배운 것이 욕심 뿐이다.
에반이 레넌을 소가주로 만들었을 때 그레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결국 부자 셋이 후작위 하나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형국이 벌어질 지도 몰랐다.
물론 셋이 서로 물어뜯다 공멸하는 것을 칼리안이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그레이 브리센이어야 했다.
플란츠가 20세가 되어 왕궁 밖으로 나서기까지 에반의 뒤를 이은 '소드마스터'로서 브리센 후작가를 문제 없이 지탱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러므로 그레이는 일단 살아있어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일단 아르센을 통해 그레이가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달라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레이가 들을지 듣지 않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시기를 더 앞당겨야 될지도.'
그러니 일을 확실히 해결하려면 에반을 빠르게 없애 버릴 수 밖에 없지 않겠나.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온'이다.
놈들은 에우리아가 카이리시스를 벗어나길 기다렸다는 듯 뒤를 쳤다. 그런 놈들을 등 뒤에 둔 채 에반을 상대하겠다며 전력을 투자할 수가 없었다. 급작스럽게 에반이 죽은 뒤 잠시 혼란할 나라에 아무 일도 없으려면 '제온'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 했다.
플란츠를 살리려면 에반을 없애야 하고. 에반을 없애려면 그레이가 필요하고. 에반이 그레이를 죽이지 않도록 에반을 없앨 시기를 앞당겨야 하고. 그러려면 제온을 파악해야 하고.
그래서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체이스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체이스가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가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에.
썩어가는 제 심장을 또 한번 도려내는 마음이 되어, 플란츠의 심장과 체이스의 심장을 두고 무게를 재어 본 뒤 내린 선택의 결과로.
* * *
더는 웃음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칼리안의 목소리도 플란츠의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이 온 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쓴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 칼리안을 찾아가면 안 된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복도에 서서 칼리안의 방 문을 노크하려다 손을 뗀 키리에가 조용히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갑작스러운 칼리안의 웃음소리에 놀란 표정이 되었던 얀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듣지 못한 것으로 해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묻지 말아달라는 소리이기도 했고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키리에."
"네."
짧게 대답하는 키리에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혹시라도 지금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들려온 것인지를 물을까봐 걱정한 탓이었다. 체이스에 대한 내용은 얀에게 알려줄 수 없었으니까.
다행인지 아닌지 몰라도 얀은 칼리안이 알려주지 않은 일에 대해 캐묻지 않는 성격이었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레릭이라는 시종 기억하세요? 플란츠 왕자님의 상급 시종이요."
"네.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얀이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황금빛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방문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 문 너머에서 칼리안과 함께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행동이었다.
"레릭이 오늘 하는 말이, 플란츠 왕자님이 창가 커튼을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식사도 나름대로 잘 하고 다시 수련장에도 열심히 가고 매일 같이 기사단 둘러보면서. 그래서 너무 다행이라고 좋아하더라고요."
혼잣말처럼 속삭이는 말이었으나 키리에가 알아듣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작은 의문을 가졌다.
칼리안의 방 안에서 들려오다 뚝 끊긴 저 웃음소리를 들은 얀이, 왜 플란츠의 변화를 입에 담는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저는 레릭의 말에 잘 됐다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선뜻 대답이 안 나와서요."
플란츠가 좋게 변하는 것이 싫어서도 아니었고, 칼리안이 플란츠의 과거를 묻어두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플란츠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이 칼리안의 결정이라면 얀 역시 어떻게든 따를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플란츠가 변했다며 좋아하는 레릭이 아니꼬워서 대답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왕자님은 다른 왕자님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셨었는데, 무슨 다짐을 하셨는지 몰라도 갑자기 바뀌셨거든요. 키리에가 이 곳에 오기 얼마 전에 갑자기요. 갑자기 거울을 보시고 앞머리도 자르시고. 그리고는 다른 왕자님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면서 그렇게 지금 이 자리까지 오셨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변해가시는 것이 너무 불안해서요."
키리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칼리안의 변화가 의심된다거나 이상하다 여긴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변명을 해줄텐데 얀은 그렇게 여기고 있지도 않았다.
"점점 더 위태로워 보여요. 재작년보다, 아니. 지금까지의 어느때보다도 훨씬 더 위태로워 보여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까마득한 곳으로 추락할 것처럼.
누구의 앞에 서든 칼리안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얀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랬으니 지금 얀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얀의 눈에만 그렇게 보여진다는 소리였다.
그 누구보다 칼리안의 속내를 정확히 보는 얀이었으니, 아마 틀리지는 않을 터였다.
"언젠가 왕자님께서 하셨던 말대로, 가느다란 칼날 위에 간신히 서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아서 그냥 좋다고만 생각이 되지를 않아요. 나도 레릭처럼 마음놓고 안심하고 좋아하고 싶은데, 그게 안돼요."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던 칼리안의 웃음 소리가 정말 기쁘고 좋아서 웃은 것이 아님은 곧바로 알았다. 왜 그렇게까지 감정적인 소리를 냈는지는 몰랐으나, 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었으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걱정이 될 뿐.
"오늘 일만 해도 그렇고요."
잠시 멜피르가 간 뒤의 일을 곱씹어보던 얀이 다시 말했다.
"폴룬 남작과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왕자님이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계속 신경이 쓰이거든요."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브리센 후작과 관련된 소문이 있을 거야. 내 형님 귀에 그 얘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해줘. 절대로.
레릭의 입단속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아스트리샤 거리에 도는 소문을 왕족이 접할 방법이 시종의 말 전달 외에 또 있겠는가. 실제로 칼리안 역시 얀을 통해 이런저런 소문을 접하고 있었다. 흥미 때문이 아니라, 처세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릭 역시 그들에 대한 이런저런 말을 플란츠에게 전하고 있을 터였다.
의뭉스러운 에반은 그 일에 대해 플란츠에게 말하지 않겠지만 레릭은 그렇지 않았으니 그것을 막아달라 부탁을 한 것이다.
때문에 얀은 레릭을 만났고, 이유도 모르는 채 '어쨌거나 플란츠 왕자님을 위한 일이니 협조해달라'는 뜬구름 잡는 말로 레릭을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릭은, 그것이 칼리안의 부탁이기 때문에 수락을 했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 믿겠다는 말, 그리고 칼리안 덕에 플란츠가 많이 바뀌어서 요즘 굉장히 기쁘다는 말도 함께.
그래서 같이 기뻐할 수가 없다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떨어지지 않고 잘 버틸 것이라는 말.
키리에가 한 저 말에 믿음보다는 바람이 더 많이 들어있으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새끼코끼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런 길로 가겠다 하시니, 믿어드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이 플란츠를 지키겠다며 무엇을 접어두었는지 제대로 깨닫게 된 탓에, 플란츠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함께 접은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