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아직은 아니지만(1)
받아 본 적은 많았지만 주었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체이스, 그리고 베른과 체이스의 두 어머니들을 위해 준비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정확히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어릴 때의 일이었다.
생일 선물을 말함이다.
키가 좀 자란 뒤로는 한 번도 직접 준비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어떤 날을 기념해 선물을 준비할 만큼의 여유를 가지기도 어려웠다. 왕족의 '선물'이란 늘 축하하는 마음 이상의 과도한 의미가 담겼기 때문에, 주변의 이목을 염두에 두느라 체이스에게조차도 직접 나서서 뭔가를 챙겨주지 못했다.
칼리안이 된 이후, 물론 그 이유는 달랐지만 선물 챙기기를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카이리스에서 챙기기 어려운, 달력에도 표기되지 않은 독특한 날에 태어나버린 베른의 생일은 칼리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갔다. 사실 인지할 수 있다 해도 딱히 그것을 챙겨야 할 이유도 이제는 없었고.
앨런의 생일이 얼마 전이었다는 것은 어제 얀이 이야기 해 준 덕분에 알았지만, 생일은 지난 이후에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하여 그냥 모르는 척 했다.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실 것이 분명한 앨런의 생일은 내년부터 챙기면 될 일이다.
"저기 있는 녀석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재채기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하고 하품하다 나온 눈물 한 방울에도 마음이 미어질 우리 히나의 생일만은 넘어갈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익숙하지 않은 생일 선물을 챙기느라 고민이 깊은 것은 당연히 칼리안이었고, 뜻밖의 고생을 하는 것은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였다. 갑작스러운 칼리안의 부탁에 무려 스무 마리의 말을 끌고 왕궁으로 와 칼리안의 앞에 내보여야 했던 탓이다.
아무튼 폴룬 상단이 보유한 최상급의 말들 중 칼리안이 선택한 말을 본 멜피르가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혹시라도 칼리안의 마음에 드는 말이 없을까 걱정했던 탓이다.
"왕자님의 말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좋은 혈통을 가진 말입니다. 지나치게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온순한 성격이니 베른 경과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한 마리 말을 골라낸 칼리안을 보며, 멜피르가 이렇게 말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꺼낸 얘기였다.
사실 이 대륙의 어떤 말이 레이븐만큼 영특하겠나 싶다. 얀과 키리에의 말도 분명 레이븐과 같은 핏줄이지만 확연히 다르지 않던가.
"네. 부족함 없이 훌륭해 보이네요."
때문에 칼리안은 꽤 흡족한 얼굴을 하며 이렇게 답한 뒤 갑작스러운 고생을 하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세크리티아와 루비 거래까지 하게 되어 많이 바쁠텐데 직접 이렇게 와 줘서 고맙습니다, 폴룬 남작."
왕족이 전하는 고맙다는 말에도 멜피르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권위 없이 언제나 솔직한 인사를 꺼내놓는 성격임을 알아서였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그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뒤에 서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얀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칼리안이 고른 말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멜피르가 칼리안을 향해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
그러더니 말을 잇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른 할 말이 있어 그러는 것임을 안 칼리안이 눈짓으로 얀을 다시 뒤로 물린 뒤, 작은 미소가 어린 얼굴로 물었다.
"다른 일로 값을 치러달라는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저 말의 값을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받았으면 하는 듯 보여서 꺼낸 말이었다. 칼리안이 '청탁'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는 멜피르가 저렇게 구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칼리안은 일단 멜피르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칼리안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냈음에, 멜피르가 싱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레넌 브리센입니다, 왕자님."
에반 브리센의 저택 지하에 갇혀 있는 레넌 브리센.
카이리시스 뿐 아니라 브리센과 연관된 귀족들의 영지 인근 상권을 독식하고 제멋대로 휘두르던 이가 아닌가. 심지어 그는, 칼리안이 마신 독차를 포함해 실리케가 사용했던 모든 독을 조달해온 인물이기도 했다.
말과 레넌 브리센에 대한 무언가를 교환해달라는 이야기임을 알아들은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달갑지 않은 그 이름이 떠오른 탓에,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나있던 미소가 짙게 변했다.
* * *
마른 잔디의 색, 혹은 옅은 밀크티 색이라고 생각했다.
- 백금색 말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하지만 히나가 백금색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저 말은 백금색이다. 결국 다 비슷한 색이지만 아무튼 무조건 백금색이다. 내일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저 말은 백금색인 것이다.
"이름은 네가 지어. 네 말이니까."
생일 선물로 백금색 말 한 마리를 선물해 준 칼리안이 흐뭇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도 제일 먼저 했다. 어쩌다보니 키리에보다도 먼저 했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칼리안은 히나에게 선물한 저 말의 값을 제대로 치렀다. 돈 대신 다른 것으로 값을 대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금고 속의 금화를 잘 꺼내서 멜피르에게 건넸다는 소리다. 히나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거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레넌에 대해 멜피르가 부탁한 일은 조금 뒤에 다시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히나의 생일 축하가 중요했고, 먼저 살펴보아야 할 다른 일들도 있었으니까.
- 제, 말이요?
몸 전체는 백금색, 그리고 긴 꼬리와 갈기는 아주 옅은 백금색을 지닌 말이었다. 정오의 따스한 햇살 아래 한껏 반짝이는 듯한 신비한 색의 말을 보던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물었다.
로젤리타 기간 동안 히나 역시 말을 탔었으니 말 탈 줄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 왕실에서, 지급해주는, 말이 아니라, 왕자님께서, 주시는, 말이에요?
발칸의 마법사에게도 당연히 말이 한 마리씩 제공되므로 히나 역시 왕실에서 말을 지급해 줄 예정이었다. 그것을 칼리안이 취소시키고 이렇게 직접 마련을 한 것임을 눈치채고 묻는 소리였다.
"응. 맞아."
앨런이 베로니카를 앞에 둔 것과 비슷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안을 본 히나가, 칼리안의 뒤에 서 있는 키리에를 아주 잠시 쳐다보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같아서는 다른 마법사들과 똑같은 말을 타겠다며 거절하고 싶었으나 키리에가 칼리안의 선물은 그냥 받으라며 미리 귀띔을 해 준 탓이었다. 칼리안이 무슨 이유로 히나를 챙기는지는 키리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 감사합니다, 자상한, 왕자님.
이 말에,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본래 선물이란 받는 이보다 주는 이가 더 즐거운 법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는 우리 히나가 고맙다는데.
당연히 기쁠 수 밖에.
* * *
히나에게 맞을 마구를 맞추는 것은 얀에게 부탁을 했다.
키리에는 아주 오랜만에 되찾게 된 검을 가지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육은 물론 뼈와 연골까지 모두 다쳤던 탓에 여전히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던 아르센의 안부를 확인한 뒤, 전시품인 듯 자랑스럽게 걸어둔 검은 로브 자락을 보며 질색한 얼굴로 당장 태워버리도록 말했다.
그리고 앨런의 집무실에 들러 텐실의 왕세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했다. 란델의 심장에 얽힌 맹세의 인을 풀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그 후에는 체르밀 궁으로 돌아온 뒤, 여러 종이뭉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조약돌에 새겨진 문자,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찾아낸 종이에 적힌 문자. 그리고 시간의 축에서 베껴낸 문자들이 적힌 종이들.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가며 며칠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레넌 브리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려니, 머릿속이 복잡하여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아우님에게서 피 냄새가 계속 나는데."
그런 칼리안을 향해, 언제나와 비슷한 낮은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하는 일 없이 소파에 앉아 고양이나 쓰다듬고 있길래 끌고 내려온 똘똘한 완두콩이, 도와달라는 수수께끼 풀기에는 관심 없다는 듯 이런 말이나 꺼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옛 칼리안만큼 꺼려하지는 않았던 탓에 내어놓아도 된다고 말했던 딸기. 그 딸기를 얇게 저민 것을 올려 구워낸 비스킷을 플란츠의 앞 쪽으로 밀어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내 형님께서 어찌나 예민하신지."
장난스럽게 말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조금 놀란 채였다.
기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피 냄새는 일반인이 코로 냄새를 맡는 것과 달랐다. 피의 기운 자체를 감지하는 감각을 확장시켜 느끼는 것이다.
특별히 숨길 생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먼저 알려줄 만한 것도 아니었는데 플란츠는 지금 그것을 묻고 있었다. 체르밀 궁의 어떤 기사도 눈치채지 못한, 칼리안이 꺼내 온 두 개의 조약돌에서 흘러나오는 그 기운에 대해서.
"좋은 머리 써주시라고 모셔왔는데 냄새나 맡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짖으라고 물어본 말 아닌데."
조금 전 칼리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배워 돌려준 플란츠가 눈꼬리를 가늘게 좁혔다. 다른 소리 그만 하고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그날, 대사막의 늑대들이 지니고 있던 조약돌을 꺼내 온 겁니다. 며칠은 더 지나야 사라질텐데 불편하시면 이만 올라가세요."
그 말에 플란츠가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에게서 돌을 '꺼내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들은 듯 했다.
"됐어."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며 말린 배와 함께 우려낸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이 꽤 의외의 반응이었던 탓에 칼리안이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예민하기로는 카이리스에서 제일 갈 것 같은 파릇파릇한 놈이 아니던가. 피가 배어 나오는 스테이크도 안 먹으면서 굳이 이 냄새를 참겠다 하니,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해야 하나.
"네."
참 많은 의미를 섞은 짧은 대답을 내어놓은 칼리안이 다시 종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붉은 빛의 힘. 생명을 태워가며 사용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짙어지는 것 같다 하고요. 완전히 검게 변한 돌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른다 했습니다."
찻잔을 내려놓던 플란츠의 손이 잠시 멈췄다.
똑똑한 플란츠는 지금 칼리안이 누구에게서 어떻게 얻어낸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지 잘 알아들을 터였다. 대사막의 전사가 아닌가. 단순히 앞에 앉혀놓고 노려본다고 정보를 일러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플란츠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칼리안이 아르센을 구해 왔던 그날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풍겨오던 피 냄새가 무엇 때문에 밴 것이었는지도 이제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 그래."
플란츠는 이렇게만 말하며 내려놓은 찻잔을 도로 들어올려 다시 한 번 차를 마셨다.
알려달라 해서 알려주는 것이니, 그것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든 잘 받아들이는 것도 플란츠의 몫이었다. 궁금해하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그런 궁금증에 무엇이 뒤따르는지에 대해서도 배울 차례였으니까.
말 없이 종이뭉치를 뒤적이던 칼리안이 문득 떠올랐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전서구 노릇 한 번만 더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계속해서 기사단 카렌의 영역에 발을 디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플란츠를 통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왜."
귀찮다는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은 질문에, 칼리안이 앞에 놓인 종이를 툭툭 쳐 보이며 말했다.
"시간의 축이 일부 뿐이니 혹시 기억을 하실 수 있을까 하고요. 기억해보실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체이스의 기억 속 시간의 축에 새겨진 글자들을 혹시라도 체이스가 모두 기억하고 있을지 그것을 물어보고자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그렇게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의 입이 짧게 열렸다.
"······ 당신."
이렇게.
칼리안일지, 베른일지, 혹은 둘 다일지 모를 누군가를 불러냈다.
"모든 사람이 다 당신같이 잘 미쳐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디에서 온 믿음일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칼리안은 묻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을 한 채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이야기를 하라는 뜻일테니, 플란츠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당신보다 어리다고."
베른에게 있어 체이스는 언제나 형이겠지만, 사실은 베른보다 어린 사람. 그러니 그만큼 불안정할 수 있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얻게 된 기억 때문에 분명히 괜찮지 않을 사람.
칼리안만큼 잘 미쳐있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체이스에게, 모든 일의 시작인 시간의 축에 대한 기억을 들춰보란 말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고.
그렇게 말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플란츠가, 칼리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