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내 사람 (5)
한겨울의 새하얀 백사장.
그 위를 노닐던 파도의 포말이 가만히 잠겨드는 목소리.
모든 것을 품을 듯 잔잔하게 오가다, 어느새 눈을 돌리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밀어닥치는 파도같은 목소리.
고요한 듯 혹은 몰아치는 듯.
관대한 듯 혹은 가차없는 듯.
"내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그런, 목소리.
"발을 물리라는 이야기를 전한 것 같은데. 꿈을 꾼 걸까."
언제나 숲과 같던 목소리에 파도가 깃든 느낌에, 새벽 이슬을 머금으며 날아온 새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새를 내려다보는 눈은 깊이 눌러 쓴 하얀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그 속에 감춰진 것이 자비가 아님은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세 명의 세작을 바라보며,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꿈이라면 이미 지치도록 많이 꾸어서 나는 이제 잠에 들기에도 버거운데. 그래도 내가, 꿈을 꾼 걸까."
마법사들을 쫓지 말라는 말.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라 했던 말. 분명 그런 말을 전했던 것 같았는데 그것이 내 착각이었는지.
노란 울새가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전했던 말을 그렇게 가볍게 저버릴 리 없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명령을 어기게 되었다 대답하라고.
차라리, 그렇게 변명을 해달라고.
그런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체이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노란 울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면목이 없습니다, 저하."
체이스의 명령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따르지 않았다는 말. 변명할 것이 없다는 그런 말.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멋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독단이라······."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명령을 어겼다는 답이 돌아오자, 하얀 로브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내가 꿈 속에서 만났던 새들은 그런 것을 몰랐는데. 참 이상하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어 웃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원망이 치밀어서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 새들에게 머리가 생겼을까."
칼날과 같은 싸늘한 말.
그 짧은 비수가 향한 곳은 새들이 아니라 체이스 자신이었음을, 새들은 알지 못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노란 울새는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차라리 그 이유라도 이야기해준다면 좋으련만. 분명 체이스를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을 텐데도 그조차 말하지 않고 사과만 하고 있었다.
그런 태도에 또 화가 나고 먹먹하여, 체이스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스러지듯 사라졌다. 모래 속으로 스며 사라지는 파도의 잔재만큼이나 무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이곳에 와서 나는 오로지 기대를 버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는데. 너희들은 남겨둔 내 새들에 대한 기대까지 전부 내려놓게 하는구나."
노란 울새는 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체이스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무엇에 대해 환멸하고 있는지, 어떤 기대를 버려두고 왔는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고개만 숙였다.
- 스릉
차게 벼려진 소리가 노란 울새의 귓가를 울렸다.
마치 도자기를 구워낸 것 같은 새하얀 검.
이제는 구할 수도 없다 알려진 순백의 강철을 녹여 만든, 생명을 취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결한 그 검신에 새벽의 햇살이 가늘게 반사됐다.
"남길 말이 있다면 하거라. 내가 들을 테니."
그것이 체이스의 결정임을 알아들은 노란 울새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더 숙였다.
- 돌아가면 말해. 나를 만났고, 칼은 거두셨으면 좋겠다 했다고.
칼리안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노란 울새도 알고 있었다. 그 이후에 칼리안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정보보다 목숨을 무겁게 쓰라고. 그러니 분명, 체이스에게 선처를 부탁하려 한 말일 터였다.
그래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없습니다, 저하."
노란 울새는 군인도 아니었고, 기사도 아니었다.
그들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곳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새였다. 그런 새들이 상부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노란 울새를, 그리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무릎 꿇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세작을, 체이스가 한동안 내려다봤다.
꽤 오랜 시간이 말 없이 지나갔다.
- 탁!
꺼내진 칼이 아무것도 베어내지 못한 채 제 집으로 되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언뜻 반사되어 보이던 칼날이 사라졌음을 안 노란 울새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체이스를 쳐다봤다.
"둥지로 돌아가도록."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소리 없이 그들의 뒤로 다가와 있던 것은 체이스의 호위기사, 그리고 검술 스승인 테일란이었다.
"필요할 때 연락하겠다."
그것은 곧, 살려주겠다는 의미였다.
* * *
며칠 전, 르메인은 앨런에게 혼이 났다.
잔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혼이 났다. 플란츠에게 내어 주었던 라벤더 차 때문이었다.
'세상 천지에 제 자식이 품은 상처 들쑤시는 아비는 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칼리안 왕자님이 저 궁을 왜 무너뜨렸는지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아프지마라 서럽지마라 보듬기만 하기에도 아깝기만 한 것이 자식인데, 간신히 제 발로 걷겠다고 일어난 놈을 그렇게 흔들어놓고 그것도 관심이니 되었다 여기셨습니까?'
그리고는 칼리안의 앞에서 커피를 꺼내놓지 말고, 플란츠를 대할 때는 꽃이든 뭐든 향기나는 것은 싹 치우고, 란델의 장미는 스쳐 만지지도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려면 아픈 것부터 살피라는 소리였다.
'아비 노릇이 처음이라 서툴다는 변명 마시고 이해를 좀 해보시지요. 또 그리하시면 아비 경험 있는 제가 세 왕자님 싹 다 챙겨서 남쪽으로 가 버릴 터이니.'
뒤이어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안 그래도 제 무덤이라도 직접 파고 들어갈 기세로 반성하고 있던 르메인은, 국왕의 앞에 선 백작이 왕자 셋을 한꺼번에 납치해버리겠다 하는 그 말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르메인은 칼리안과 플란츠의 무단 외출은 그냥 묻기로 했다. 란델의 근신도 해제했다.
왕자들이 무슨 일을 벌였어도 전하가 한 짓거리보다는 낫다는 앨런의 말에 스스로도 공감했던 까닭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던 덕분에, 칼리안은 무리 없이 다시 숲을 찾을 수 있었다. 체르밀 궁과 달리 장미 향이 묻지 않은 공기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청아했다.
"밤에는 별이 좋았는데, 아침에는 바람이 좋네."
생각해보니 이 곳을 밤에만 찾았다.
사실 밤에만 찾았다 하기에도 어려운 것이, 이 곳에 온 일이 딱 두 번 뿐이었다. 그러니 그것을 늘 밤에만 왔다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어찌됐건 칼리안은 세 번째로 숲을 찾아왔고 지금은 이른 아침이었다.
시스파니안의 기운을 꺼려하는 험한 짐승은 살지 못해도 새들은 둥지를 트게 마련이라,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는 여러 지저귐이 예쁘게 울렸다.
- 노란 새가 제 말을 전한다면 살려주시고, 전하지 않는다면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새의 지저귐을 듣다 보니 얼마 전 체이스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기사단 카렌을 찾아갔을 때 너무 잘 아는 이가 그 안에 있던 탓에 놀랐던 것도 함께 생각났다. 체이스가 정말 소식이나 전할 용도로 쓰기 위해 심어 둔 세작이었는지, 베른이었을 때 잘 알던 이가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분명 칼리안이 그를 알아보고 필요하다면 사용하도록 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연두색 전서구를 통해 카렌의 기사에게 편지를 전했다. '이 자를 살려달라'는 칼리안의 말을 그 세작이 직접 한다면 살려놓고, 만약 하지 않는다면 정말 믿을 수 있을 사람으로 여겨달라는 뜻이 담긴 편지였다.
유일하게, 정말 유일하게 베른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이를 기억해주는 체이스가 아니던가. 비록 과거를 함께 보냈던 바로 그 체이스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도 칼리안의 부탁은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후로 매일 이 곳에 와 있었습니다. 모자람 없이 늘 좋은 곳이었습니다."
별과 바람이 좋았다는 칼리안의 말에 대해 조금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 말을 꺼냈던 칼리안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잠시 기다렸다 답을 한 것은 키리에였다. 칼리안이 깊은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
"내가 잔뜩 어지럽혀 놨는데, 그래도 괜찮았어?"
앨런과 대련하며 그 숲을 어지럽힌 것이 칼리안이었으니 하는 말이었다. 겉보기에만 멀쩡하지 속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두지 않았던가.
"익숙해지니 그것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모두 숲의 일부가 된 것 같아서, 왕자님의 칼자국도 좋게만 보였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에의 속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물론 칼리안이 장담하고 함부로 안심하기에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큰 문제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랗고 까만 키리에의 눈이 칼리안을 볼 때, 더 이상의 혼란스러움이 없었으니까.
"이제 히나를 만나러 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칼리안에게 확신을 심어주듯 조심스럽지만 주저하지 않는 목소리로 키리에가 물었다. 칼리안이 일부러 히나를 떼어놓았음을 이해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이 이제 더는 가름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마든지."
오랫동안 걷고 싶은 생각에 숲의 입구에 레이븐을 두고 왔다. 키리에의 말 '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은 흙을 밟아가며 말 없이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기만 하다가,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제가 왕자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물어보라는 허락을 했음에도 키리에는 섣불리 말을 하지 않았다. 답답해하는 대신 칼리안은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숲으로 들어서는 깊은 오솔길을 지나, 물 소리 가득한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쯤. 키리에가 칼리안을 향해 섰다. 칼리안의 발이 함께 멈추자 키리에의 조용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에게 자격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왔다.
칼리안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자격인지 묻지 않았다.
칼리안이 잠시 거둬들였던 그 검을 키리에가 다시 쥘 자격. 언젠가 칼리안의 기사가 되어도 될 자격. 칼리안의 곁을 계속 지킬 자격. 그런 것들이 전부 포함된 말일 테니까.
어쩌면, 사람을 벨 자격이 있을지 묻는 말일 수도 있었고.
"키리에."
"네, 왕자님."
키리에를 마주보고 선 칼리안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키리에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체이스의 집무실에 들어올 때 키리에가 고개를 수그리던 날. 그래서 체이스에게 금화 한 개를 받게 했던 날. 그 때에도 여전히 키리에의 나이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 기특하다 생각한 베른이 그리 했던 기억이 나서.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큰 키리에의 물빛 머리카락을, 어린아이 달래주듯 칭찬해주듯 그렇게. 슥슥 쓰다듬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여준 것이 뭐였을 것 같아?"
그리고는 이렇게 담담한 목소리로 마지막 날을 입에 담아 물었다. 그 날의 마지막에 키리에가 베른에게 무엇을 보여주었을지 알겠느냐고.
"제 등입니다."
고민같은 것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대답.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
- 정신 차리십시오. 멈추지······ 마십시오.
여전한 키리에.
키리에의 답이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얼굴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를 부드러운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그 대답이 네 질문에 대한 답도 되어줄 것 같은데."
그 마음을 두고 칼리안이 어떻게 자격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감사하다 생각할 뿐이야."
왕의 어미도, 왕의 기사도, 왕의 마법사도, 왕의 신하들도, 모두가 미쳐버렸을 나라.
그 곁에서 홀로 미치지 않아 홀로 미쳐있었을 왕.
그가 무엇을 결정하고 또 무엇을 결심했을지. 무엇을 각오하고 검을 들었을지. 무엇을 위해 매를 날려보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이들이 죽었던 것인지 여전히 의문 투성이지만, 무엇을 위해 베른이 돌아왔을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내가 너를 다시 찾았으니."
모두에게 등을 보여야 할 칼리안의 앞을 유일하게 막아서 줄 사람을 다시 얻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지."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에 들린 묵빛의 검을 내밀었다.
두 번 다시는 되돌려 받지 않으리라 자신하면서. 두 번 다시는 먼저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이번에는 보은하겠다 약속하면서.
키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