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77화 (178/527)

제30장. 내 사람 (4)

아르센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칼리안과 플란츠가 상처에 붕대 감는 법을 배웠다고 한 말도 믿지 않았다. 사실 세상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시종과 시녀들의 손을 빌리는 왕족이, 붕대라니.

만약 백 번 쯤 양보해서 플란츠의 말을 믿어본다 해도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배운 것과, 할 줄 아는 것과, 능숙한 것은 엄연히 달랐으니까.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아르센은 이렇게 대답했다.

플란츠가 저렇게 말도 안되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한 것이 '내 거짓말을 믿으라'는 뜻이 아님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플란츠는 아르센 스스로 의문을 접을 만한 명분을 주었을 뿐.

칼리안이 숨기는 것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플란츠는 알고 있지만, 저 거짓말을 믿어주는 정도의 선에서 알아서 납득하고 넘어가라는 소리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실 아르센도 칼리안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꽤 오래 전부터 느끼고는 있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냥 넘어가라 하니 넘어갈 수 밖에. 알아야 할 때가 된다면 칼리안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까, 그리 믿으면서.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됩니까."

"또 뭐."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는데 또 질문을 하겠다 하니, 플란츠가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당장 잠들 것 같은, 정확히는 졸도할 것 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잠들지 않는 아르센의 입이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그 로브, 왜 부군단장님께서 들고 계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르센의 시선은 왕자의 손에 들린 하얀 로브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뒤 히나에게 돌려주기 전에 아르센을 만난 탓이었다.

그런 아르센을 잠시 쳐다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내가 설명을 해야 하나, 마법사."

"궁금해서 그럽니다, 부군단장님."

저 정도로 다쳤으면 말을 못할텐데 태연하게 참 잘도 나불거린다.

때문에 플란츠의 얼굴에 한번 더 짜증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저 '부군단장님'이라는 호칭이 좋은 심보로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까지 설명하거나 저 호칭을 지적하기 위해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플란츠는 그냥 옆에 놓인 소파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아무래도 사일런트라거나 클린이라거나 슬립 같은 마법을 어떻게 좀 배워볼까, 배우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애써 집어넣은 채였다.

싸우지 말라 하기도 했고.

- 똑똑

때맞춰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타박 타박 걸어와 아르센의 상처를 다시 한 번 살피는 히나를 보던 플란츠가 무릎에 놓인 로브로 시선을 돌렸다.

별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아르센의 어깨는 괜찮다고 했고, 지혈도 됐고, 자신은 이 곳에서 더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다.

라리시움이 몇 송이인지, 어떻게 생긴 꽃인지, 그 하얀 자수를 다시 살피게 됐다. 그리고 지금 플란츠가 있던 곳은 마차보다 밝았다.

그래서였다.

'베······ 른.'

눈에 띄었다.

이름 대신 수를 놓았다는 하얀 꽃들 사이에 작게, 아주 작게 새겨진 글자가 눈에 띄었다.

"베른 경. 이 시간에 이렇게 나오게 해서 미안하네. 경의 오빠도 걱정을 했을텐데."

그리고 이렇게, 아르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히나 역시 같았다. 발칸의 대원이 되었으니 '경'이라 불렸다. 그것은 플란츠 역시 알고 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베른이라 구분이 어렵군. 언제 경의 오빠를 만나면, 키리에라고 이름을 불러도 되는지 물어봐야겠네."

시종과 시녀들은 왕궁 내에서 자신의 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름조차 본명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히나를 발칸에 들인 것은 앨런과 아르센이었다. 플란츠는 기사단의 일로 그에 대해서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생의 시종과 시녀가 같은 성을 쓰는 남매였음을, 그들의 성이 무엇인지를, 플란츠는 몰랐다. 알려준 이도 없었을 뿐더러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베른.'

아르센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플란츠는 하얀 글씨로 수놓아진 히나의 성을 한 번 더 되뇌었다.

'낯이 익은데.'

분명 낯이 익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 날의 플란츠는 --에게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갚지 말고 도와달라 하며 체이스가 건넸던 말.

그 말을 새겨 듣겠다 답했음에도.

* * *

늘 그래왔듯이.

"나와 계셨습니까."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말했다. 그저 왕궁이 아닌 곳까지 플란츠가 나와있었음이 다소 의외이기는 했으나 특별히 놀랄 정도는 아니었던 탓이다.

앨런과 에우리아는 숲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오기로 했다 하였다. 한 밤중 왕궁을 멋대로 벗어났으니,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던 칼리안은 먼저 돌아왔다.

그렇게 이제 막 이동 마법진에 도착한 칼리안과, 아르센의 지혈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플란츠가 마주친 참이었다.

칼리안의 짧은 인사에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감사하다는 말은 물론 다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이.

"왕궁으로 돌아가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앞서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이동 마법진 외부에 세워둔 마차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자개 마차.

이 카이리스에 검은색 자개 마차라고는 딱 하나 밖에 없지 않나.

당연하겠지만 사전에 빌리는 것을 허락받을 수 없었을, 그러니 멋대로 끌고 나온 것임이 분명한 앨런의 마차였다.

"잘 하셨습니다."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 역시 자신의 목숨이 그리 안전하지는 않음을 잘 알았다. 호위들을 대동할 수도, 왕실의 마차를 탈 수도 없는 상황에 앨런의 마차보다 더 안전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니 앨런의 마차를 타고 온 것은 플란츠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선택인 것이다.

칼리안의 칭찬을 들었음에도, 플란츠는 여전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실소한 칼리안이 히나와 아르센을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타고 왔던 아르센의 말 고삐를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말이 한 마리 남으니 말을 타고 가라는 뜻이었다.

"마차가 편하시면 마차를 타셔도 좋고요."

어차피 아르센은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는 상태였으니, 마차에 플란츠가 함께 있어 보아야 좋을 것이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거절 않고 칼리안이 건네는 말 고삐를 받았다. 그 손에 여전히 들려있는 히나의 로브에 칼리안이 잠시 눈을 두었으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대단한 마차에 놓인 대단히 편안한 소파에 앉은 아르센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칼리안을 보고 긴장이 풀린 것인지 몰라도, 다른 인사나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것이 잠인지 기절인지 알 수 없었으나 칼리안은 아르센을 걱정하는 대신 짧은 한숨만 쉬었다. 아르센과 히나가 함께 있었고, 또 별 탈은 없으리라 했기 때문이다.

- 다각, 다각

곧 한 대의 마차와 두 필의 말이 왕궁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지혈도 하고 급히 해야 할 조치를 했다고는 해도 치료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되도록 빠르게 왕궁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이번에도 말 발굽 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것을 조용히 듣고 있으려니 칼리안이 말을 건네왔다.

"굳이 나와 계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피곤하시겠습니다."

조금 전에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

'피곤하겠다'는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잠시 심기 불편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자신을 무슨 온실 속의 파릇파릇한 화초 쯤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서였다.

"안 피곤해."

그렇다고 피 냄새 풀풀 풍기며 돌아온 아우님에게 짜증을 낼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니 적당히 대답을 해 줄 밖에.

"넌."

곧 플란츠가 이렇게 되물었다.

오히려 피곤한 것은 칼리안이 아닌가, 하고.

플란츠가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것은 처음일 터였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그냥 어깨만 으쓱해보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것이 다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그런 것을 물을 사이는 아니었으니. 짧게 안부 묻기를 끝낸 둘은 말 없이 마차의 뒤를 따라 말을 몰기만 했다.

다시, 다각 다각.

평온한 말 발굽 소리만 카이리시스의 넓은 왕도를 울렸다.

그러다 문득, 플란츠의 말이 들려왔다.

"남매였나."

"키리에와 히나 말씀이십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매입니다."

히나와 키리에가 함께 왕궁에 들어온 것도 알았고 둘이 친한 것도 알았지만, 그 살기등등한 키리에와 히나가 너무 달라서 몰랐다.

물론 히나의 귀에 생긴 흉터가, 그리고 히나가 지닌 치유력이 하프엘프이기 때문에 생긴 것임은 플란츠도 알고 있었다. 그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키리에는 아니었다.

하프엘프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와 둘이 남매인 것을 상기하고 생각해보니 키리에의 귀가 그렇게나 밝았던 이유를 가늠해보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는데도 몰랐다.

키리에를 생각하면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에 대해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 한 탓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렇게······."

플란츠는, 히나가 키리에의 동생이라서 그렇게 신경을 썼느냐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이 키리에를 아끼는 이유. 키리에가 플란츠를 경계하는 이유. 그 근원이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임을 떠올린 탓이다.

"세크리티아 사람인가."

대신 이것을 물었다.

그런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궁금하십니까."

"추측만 하고, 넘겨짚고. 그러기는 싫어서."

그것이 히나에 대한 궁금증일지, 키리에에 대한 궁금증일지. 혹은 칼리안에 대한 궁금증일지. 정확한 것은 칼리안은 물론 플란츠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난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웃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입니다."

그리고는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아르센은 물론, 히나도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있지 말았어야 했을 그런 일이요. 그래서 키리에만 세크리티아로 왔습니다."

이것은 베른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칼리안의 이야기일까.

시간의 축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수많은 죽음들에 대한, 베른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전쟁과 관련 없는 일이라 여긴 것인지 몰라도, 비 오던 그 날 이후로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를 칼리안이 선뜻 입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검을 가르쳤는데 꽤 잘 배웠습니다. 많이 친했던 탓에, 다시 눈을 뜬 뒤 키리에부터 찾았습니다. 히나가 함께 있었고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두서없는 이야기.

어느 정도 키리에에 대해 짐작을 하고 있었던 탓에, 플란츠는 그 두서없는 말을 잘 알아 들었다. 칼리안이 왜 그렇게 히나를 아끼는지, 그것 역시 이해했다.

"······ 다행이군."

그래서 언젠가의 칼리안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다행이라고.

더 이상 베른과 관련된 일에 대해 괜스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냥, 향기 없는 꽃이 있음을 알려줄 이가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물론 그 의미를 칼리안이 정확히 알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냥 그런 뜻을 담아 꺼낸 말이었다.

"네. 다행입니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잊혀져야 할 이의 이름.

그러니 그것을 기억하는 다른 이를 통해서는 더 이상 전해질 수 없을 이름.

그 이름을 새로 이어가게 된 히나를 떠올리며 웃었다.

베른을 대신해 살고 있는 히나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보다 소중한 생이 또 있을까.

그것이 다행이다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음에, 칼리안은 진심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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