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76화 (177/527)

제30장. 내 사람 (3)

에우리아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맺고 끊는 것도 깔끔했고 말을 주고 받거나 이해하는 것도 깔끔했고 마법도 깔끔했다.

물론 누군가 새카맣게 탄 40구의 시신을 본다면 에우리아가 생각하는 깔끔함의 기준이 '깔끔하게 떨어진 번개에 살아남는 놈 하나 없이 깔끔하게 싹 태워 죽이는 것'인지를 의심할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우리아의 마법은 깔끔했다.

그런 에우리아였으므로 반성 역시 깔끔했다.

건성으로 듣지 않았고 제대로 잘 새겨 들었다. 이번 일로 배운 것도 많았고 칼리안을 보자마자 죄송하다는 사과도 다시 한 번 했다.

그리고는 담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해당 단체의 이름은 제온입니다, 왕자님."

반성은 반성이고, 해야 할 일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이 사달을 낸 원인을 먼저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발견된 자료입니다만 읽거나 뜻을 알기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런 말과 함께 건네진 종이 뭉치를 살짝 훑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고생했습니다."

빌헬름 관에 모두를 모아놓고 살기등등한 가르침을 내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죄송하다'는 에우리아의 말에도 그저 알겠다는 말만 하고 넘어갔다.

앨런 때문이었다.

이 곳에 오는 동안, 앨런이 칼리안에게 부탁을 했다.

'협회장은 제가 아주 혼쭐을 내어 놓았습니다. 수도로 돌아가면 부군단장에게도 이야기를 할 터이니 더 타박하지는 말아 주시지요.'

칼리안의 성격에 둘에게 얼마나 난리를 칠지 모를 앨런이 아니었다. 유난히 이런 일에 민감한 칼리안 아니던가. 그래서 대신 나섰다. 칼리안이 과한 질책을 할까 우려해서라기보다는 칼리안이 오늘 또 어딘가에 신경을 쓸까 우려해서였다.

그래서 칼리안도 다른 말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둘이 왜 나섰는지 이유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되도록 이것을 그대로 왕궁에 가져가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스승님?"

가능하냐니.

하늘에 떠 있는 저 달을 체르밀 궁에 가져가겠다 하면 달을 끌어다 옮길 궁리부터 해 볼 판에, 이깟 종이 뭉치 따위가 대수겠는가. 동굴을 옮겨서라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줘야지.

때문에 앨런은 가능한지 아닌지 따져보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주시지요."

칼리안으로부터 종이를 넘겨받아 살펴본 앨런이 잠깐 마력을 운용한 뒤 자신의 공간에 쑥 집어넣었다. 다른 두 마법사의 공간에 들어갔을 때에는 흔적도 없이 바스라졌던 종이는 아무런 변화 없이 잘 보관되었다. 종이에 따로 보존 마법을 건 것이다.

역시 스승님은 멋있어요, 하는 눈으로 앨런을 봄으로써 앨런으로 하여금 마법사가 된 일생일대의 보람을 느끼게 해 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저 놈들 처리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고개가 세작들을 향해 돌아갔다. 에우리아가 조금 전 폭발이 있기 전까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하나도 빠짐 없이 이야기를 전했다.

"······ 그래서 우선 재워놓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자님."

이렇게 끝난 말을 들은 노란 울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우리아의 말대로 폭발음을 들은 뒤 잠에 들었고, 눈을 떠 보니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 역시 무력 강한 검사였으며 에우리아를 앞에 두고 긴장한 상황이었음에도 에우리아의 '슬립'에 걸려들었다. 그 정도의 정신력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곧 둘의 실력 차이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그런 에우리아보다 더한 사람 둘이 추가됐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작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온 칼리안이 나란히 포박된 이들 중 노란 울새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탓도 있었지만, 사실 노란 울새가 세 명의 대표 격임을 이미 알고 있던 탓이 더 컸다.

칼리안은 저항할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듯한 노란 울새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름."

"잊었소."

대답은 빨랐고 그 답을 들은 칼리안이 설핏 웃었다.

과거 언젠가 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이기도, 놈의 대답이 꽤 흡족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 이어졌다.

- 화악!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매서운 살기.

칼리안의 붉은 눈빛 만큼이나 섬뜩하고 날카로운 살기가 노란 울새를 찔러들어갔다.

조금 더 서늘해진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이름."

"······ 잊었다고, 했잖소."

목소리는 흔들렸으나 대답은 같았다.

마법사보다 감각이 좋은 검사들은 살기에 대한 감응도도 더 높다. 게다가 지금 칼리안은 꽤나 날이 서 있었다. 그만큼 살기도 짙었으나 놈의 행동은 똑같았다. 세작명이 그리 큰 비밀이 아님에도, 그조차 일러주지 않는 것이다.

한동안 노란 울새를 보던 칼리안이 살기를 거두며 다시 말했다. 언제 죽일듯이 노려보았냐는 듯 평소와 다름 없는 목소리였다.

"돌아가면, 너희 다 죽어."

지금의 체이스는 예전과 많이 달랐다.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세작의 반을 다 죽였지 않나. 명령을 어긴 새들을 용서할 리 없었다.

만에 하나 용서하겠다 마음을 먹었더라도, 자신의 말을 전해들은 칼리안이 직접 나섰고 덕분에 대사막의 전사들과 또 대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죽일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이유가 있다 한들 그것까지 용서할 리는 없을 사람임을 칼리안이 안다.

"대충 알고 있었을텐데 왜 고집을 피웠어."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셋을 찾아온 전사들에게 죽었을 확률이 높았겠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그들이 아니라 체이스의 손에 죽게 되지 않았나.

이번에도 노란 울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다른 두 놈도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옆에서 칼리안을 지켜보던 에우리아가 물었다. 죽이라면 죽일 것이고 살려보내라 하면 살려 보낼 것이었다. 칼리안과 체이스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을 에우리아도 알고 있으니까.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눈을 내리떴다. 어찌해야 할까, 그것을 고민했다.

카이리스의 내부 정보를 캐고 있다면 카이리스의 왕자로서 처벌했겠으나 지금 이들이 뒤를 쫓는 것은 제온이라는 조직이었다. 체이스와의 관계를 차치하고 보더라도 왕실에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칼리안에게는 도움이 될 테고.

곧 칼리안이 노란 울새를 향해 시선을 움직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이렌 경, 내가 잠깐 이들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자리를 피해달라는 소리였으니 에우리아는 가타부타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앨런은 여전히 옆에 있었으나 앨런에게 비밀로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앨런에게까지 나가달라 하지는 않았다.

"돌아가면 말해."

그래도 모든 놈이 하얀 수리나 푸른 솔새처럼 제 잇속 채우자고 달라지진 않았음을 알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일이니 지금껏 그리 했던 것처럼 관심을 꺼야 할지.

"나를 만났고, 칼은 거두셨으면 좋겠다 했다고."

노란 울새, 서베인.

살려두시라고.

무력도 무력이지만 감각이 좋고 포기할 줄도 모르던 우직한 세작. 항상 위험을 감수하고 정보를 물어오던 그런 놈이었으니, 이제는 새들의 충성을 완벽히 믿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눈 감아 주시라고.

제 손으로 제 살 도려내는 일, 이번에는 하지 마시라고.

그런 의미임을 체이스는 알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넌. 네 목이랑 정보 중에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제대로 재보고 움직여. 정보 하나 물어다주고 죽는 놈보다는 정보 하나 포기하고 살아 오는 놈이 더 쓸모있으니까."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조금만 더 오지랖을 부렸다.

"······ 알겠소."

의외의 말을 들었음에,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노란 울새가 대답했다.

어차피 새들에게 더 할 말이 없었다.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굳이 이들을 두고 심력을 쏟지 않더라도 체이스가 알아서 연두색 전서구한테 전해줄 테니까.

따라서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그들을 내버려둔 채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동굴 밖에 서서 숲을 바라보고 있던 에우리아에게 말했다.

"이제 가죠."

"네, 왕자님."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뒤를 따라 한 발을 옮기던 칼리안이 잠깐 멈칫하며 에우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 새들이나 경 가방 속의 돼지나 질겨서 못 먹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두고 가요."

세작들을 죽이면 오게 될 여파가 걱정되니 살려두기로 했다는 소리이기도 했고, 먹고 남았다는 돼지고기 놈들에게 전해주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배고프다 했다 하니, 밥은 먹여야 하지 않겠나.

* * *

어둠이 짙었다.

이런 시간에 왕궁 밖을 나온 것이 딱 두 번째였다.

한 번은 그들의 습격에 당했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찾는다 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이 지금이었다. 그러니 두 번 모두 칼리안과 연관이 있었다.

동생놈이 치는 사고의 뒷수습에 항상 불려다니는 신세가 된 플란츠가 잠시 눈꼬리를 찌푸렸다.

"직접 이 곳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 직접 움직이는 동안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머리색만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도 저딴 말을 지껄이는 마법사를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괜히 왔군."

그냥 왕궁에 있을 것을 괜히 왔다, 라고.

칼리안은 플란츠가 히나를 불러놓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 직접 와서 기다릴 줄은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센 역시 마찬가지겠고.

그러니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을 하든가.

하여튼 좋게 보려 해야 볼 수가 없는 놈이 아닌가.

- 다각

게다가 곁에 서 있는 저 검은 말.

이 어둠 속에 깊이 잠긴 그림자 같은 털과 갈기. 그 때문에 새하얀 오른쪽 발목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말. 게다가, 두 발로 걷는 하찮은 동물 셋이 앞에 모여 있다는 듯한 저 표정까지. 두 번 볼 것도 없이 레이븐이 아닌가.

칼리안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플란츠는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레이븐을 아르센이 타고 온 것이다. 그것을 보니, 레이븐의 본래 주인이었던 플란츠의 짜증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입을 다치지는 않았나본데."

매우 아쉽다는 말투여서, 아르센이 무언가 대답하려다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입은 안 다쳤지만 어깨는 많이 다쳐서였다.

그것을 본 히나가 플란츠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아르센도 대충은 알아듣겠지만 플란츠만큼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아서였다.

- 싸움, 그만.

이대로 두면 말싸움이 번질 것이 뻔해서 미리 말린 것이었다.

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모르지 않았다. 평생 누구에게 지고 살 일 없을 왕자와, 칼 때문에 지는 것은 용납하더라도 말 때문에 지고 싶어하지는 않는 마법사가 아닌가.

- 우선 안으로, 들어가요. 치료부터, 해요.

히나의 말을 본 플란츠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밥 안 먹던 플란츠에게 기어코 음식을 먹게 했던 저 엄한 표정 때문이 아니라, 어찌됐건 다쳐서 올 놈 치료하자고 온 길이었음을 상기한 탓이다. 정말로.

말싸움을 접은 플란츠가 아르센을 보며 히나의 말을 통역했다.

"치료부터."

주요 단어 딱 하나만.

그리고는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따라와서 치료 받든지 밖에 있다 그냥 죽든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보며 슬쩍 웃은 아르센이 건물 안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건물을 지키던 마법사들이 안심한 얼굴을 하며 아르센을 자리에 앉혔다. 안 그래도 초죽음이 된 채 곧바로 왕궁으로 가겠다는 아르센을 혼자 보내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았는데 히나가 함께 들어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 놈들 짓인가."

아르센을 향해 플란츠가 물었다.

밝은 곳으로 오니 어느 정도로 다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얀 로브의 절반이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네. 생각보다 강합니다."

언제 말싸움을 했냐는 듯 아르센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사이, 히나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칼리안이 매어 두었던 로브 조각을 풀어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센이 말했다.

"그건 내가 가지고 가겠네. 왕자님께서 해주신 것이라서 버릴 수가 없으니."

가서 마법사들한테 자랑하려는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이 직접 묶어준 붕대라고.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나 하는 것을 본 히나가 풋 웃으며 그것을 넘겨줬다. 그리고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 괜찮을 거예요. 여기서 지혈 하고, 돌아가서, 치료하면, 돼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인 뒤 통역했다.

"괜찮다는데."

의미가 조금 변질되기는 했으나 아르센이 오해를 한 것은 아닐 터였다. 때문에 히나는 다른 말 없이 바로 지혈부터 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되었을 때, 히나가 잠시 깨끗한 붕대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방 안에 사일런트 막이 둘러졌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부군단장님."

아르센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 눈이, 칼리안이 매어줬던 로브 조각에 닿아 있었다.

"왕자님께서 상처에 붕대를 직접 감아주셨습니다만 그런 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어떤 왕자가 붕대 매는 법을 배우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뿐 아니라 칼리안이 보여준 능력이며 살기며. 의심이라기 보다는 많은 의문들이 쌓여왔을 터였다.

"배웠는데. 나도."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아우님께서 워낙 거짓말을 못하시니.

형님 된 입장에서 이 정도는 도와줘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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