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75화 (176/527)

제30장. 내 사람 (2)

고요했다.

싸움이 끝난 이후에는 언제나 한결같은 고요함이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 번개가 내리치고 물기둥이 치솟던 그 곳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런 고요함의 한가운데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앨런의 눈이 에우리아에게 닿았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였다.

말 없이 계속 이어진 그 시선에, 조용히 서 있던 에우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앨런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의미 없이 흔들리던 그 보라색 머리카락 끝을 잠시 보던 앨런이 침잠하는 목소리를 냈다.

"기만이네."

앨런은 위험을 경고했고, 손을 떼라 했다.

에우리아는 그 말을 어겼다.

제온의 수하들이 실은 에우리아가 아닌 세작들의 뒤를 밟은 것이라 해도, 에우리아가 순수하게 칼리안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보기 위한 참고사항이 될 뿐이다.

에우리아의 잘못을 정당화해주거나, 흘린 피를 다시 집어넣도록 해주지는 못했다.

"교만이고, 방만이고, 자만이네."

이렇게 말하는 앨런의 눈이 길게 가늘어져 있었다. 칼리안만큼, 앨런 역시 화가 나 있던 것이다. 다만 화를 내고 있는 이유가 조금 달랐다.

당장의 칼리안이 아르센의 부상에 화가 나 있었다면 앨런은 지금 에우리아의 짧은 판단을 질책하고 있었다.

"자네가 잘못했을 때 죽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그것을 알아야지. 그것을 잠시 잊은 사이에 죽는 것은 자네를 믿고 목을 걸어놓는 아랫사람이네."

이 말을 들은 에우리아의 눈이 크게 떨렸다. 아르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를 묻는 눈빛이었다.

그런 부분을 오해하게 하여 괴롭힐 생각은 없었으므로, 앨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큰 탈은 없는 듯 하네. 단지 때마침 도착하여 살린 것이니 다행이라 여기지는 말게.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것이 아닌가. 자네 때문에."

에우리아는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앨런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런 에우리아를 보던 앨런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이 있을 방향을 쳐다봤다. 레이븐의 위에 오른 아르센의 기운이 이동 마법진 쪽으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이제 칼리안이 있는 곳에는 둘이 살아 있었다.

"왕자님을 생각해서 한 일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만."

둘은 싸움을 하는 기척이 아니었다. 적을 앞둔 칼리안이 평화롭게 대화나 나누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칼리안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보다 무슨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을지가 더 신경이 쓰이고 안쓰러워서, 앨런이 조용히 말을 맺었다.

"앞으로는 그리 하지 말아주게."

그 후 오래지않아 한 쪽의 기운이 끊겼다.

저 드넓은 곳에 살아있는 이는 이제 한 명이었다.

* * *

스산했다.

밤 공기에 더는 몸을 움츠리지 않아도 될 만큼의 날이었다. 하지만 플란츠에게는 그저 스산하게만 느껴졌다.

덩그러니 어둠 속에 남겨진 마법 등불의 빛도, 그 빛 하나에 의존해 앞으로 달리는 마차의 소리도, 그것에 일부러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마음 속도 전부 다 스산했다.

- 다각, 다각.

발칸의 마법사들은 왕궁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상태의 키리에는 딱 생글거리는 칼리안만큼 믿음이 안 갔다. 그들을 제외하고 칼리안의 이동 마법진이 있는 구역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히나와 얀, 그리고 플란츠 뿐이었다.

그런데 얀에게 히나를 데리고 이동 마법진까지 다녀오라 할 수는 없지 않겠나. 히나를 혼자 보낼 수도 없고.

이러한 사유의 결과로, 플란츠는 그날 밤 무단으로 외출한 두 번째 왕자가 됐다.

사실 르메인을 만났을 때 제대로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잘못 없는 라벤더와 악의 없이 꺼내진 말 때문에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플란츠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정문을 지키고 선 이들이 플란츠가 손에 넣은 기사단 카렌의 사람이었던 탓에 플란츠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는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런 생각에 마차의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풍경을 보다 앞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에 마주앉아 있던 히나가 손을 들어올렸다.

- 걱정이 되어서, 그러세요? 표정, 안 좋아요.

플란츠가 특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 않았음에도 히나가 이렇게 물어왔다. 그런 히나를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 스산해서."

뭐가, 아니야, 됐어, 안 해, 등등.

충분히 이렇게 대답하고 넘겼을 법 한 플란츠가 조금 길게 대답을 했다. 딸기에 대한 보답이나 히나에 대한 배려, 혹은 별달리 의미 없는 변화일지도 몰랐으나,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한 히나가 웃었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하얀 로브를 주섬주섬 벗어 플란츠에게 건넸다.

플란츠가 '왜' 라고 물으려다 팔을 뻗었다. 이유를 들으려면 손이 비어야 할 것이 아닌가. 덕분에 일단은 주는대로 로브를 건네받은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말했다.

- 보온, 마법. 따뜻해요.

히나는 여전히 체르밀 궁의 본래 지내던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 숙소와 빌헬름 관을 오고가다 감기 걸릴까 걱정한 칼리안이 앨런에게 보온 마법을 부탁했다. 성인식에 사용하기 위해 준비했었던 마차에도 마법을 걸어줬던 앨런이니 로브 쯤이야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고나니 곧 다가올 여름에 우리 히나가 행여 더위라도 탈까 걱정이 됐다. 체르밀 궁과는 달리 빌헬름 관에는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것도 앨런에게 부탁을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늘어난 요청사항 덕분에, 아무 마법도 걸려있지 않은 다른 발칸 대원들의 로브와 달리 히나의 것에는 온도 조절, 경량화, 모든 속성의 기본 마법 저항, 3회까지 자동 발현되는 실드 등등, 칼리안의 걱정만큼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앨런의 마법이 걸리게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클린' 까지도 부여됐다.

- 덮고 계세요.

그런데 플란츠가 스산하다 하니,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그 귀한 로브를 건네주고 있는 것이다.

칼리안이 카이리시스에 없어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바람에 생명줄이 이어졌음을 모르는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됐어."

어차피 추워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스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니까.

때문에 이렇게 거절하며 돌려주는 로브를 보던 히나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따뜻하면, 마음이, 폭신폭신해져서, 좋아요.

플란츠는 히나의 '폭신폭신' 이라는 말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알아들었다. 지금 짓고 있는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 뭘 안다고."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 위로의 말을 하고 말고. 어쩌면 날 선 말로 들릴 수 있을 소리를 꺼냈다. 엄한 곳을 향한 화풀이라기보다는 그저,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건네는 사람에 대한 경계였다.

그런 플란츠를 잠시 바라보던 히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플란츠의 손에 들린 로브를 받아들어 펼치고는 제멋대로 플란츠의 무릎을 덮었다.

-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것도, 있어요.

당당하기도 하다.

지금 왕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인지. 그래서 이렇게 멋대로 구는지.

하고 물어보려던 플란츠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창 밖을 봤다. 그러다가는 앞 쪽으로 고개를 되돌렸다. 그 뒤에는 습관처럼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으면 말을 못 꺼낼 테니까. 히나가.

그러다 문득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로브에 새겨진 자주색의 표식이 들어왔다. 치유사를 뜻하는 것이니 발칸에서 히나의 것만 유일하게 자주색인 셈이었다. 히나가 어디에 있든 눈에 띄도록. 다쳤을 때 빠르게 찾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늦지 않게 치유 받을 수 있도록.

그 자주색 표식을 잠시 보던 플란츠의 눈에, 동그란 원형 표식의 안쪽에 함께 새겨진 다른 무늬가 보였다. 별처럼 생긴, 아주 작은 것.

"또 꽃이군."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하얀 로브에 하얀 실로 새겨졌기에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것은 분명 꽃이었다.

안 그래도 꽃 때문에 질려있던 참이었는데 또 꽃이다. 그래서 로브를 들어 히나에게 다시 돌려주려는데, 히나의 말이 멋대로 눈에 보였다.

- 라, 리, 시, 움, 이에요. 향기 없는, 꽃. 그래서, 좋아요.

라리시움.

히나는 그런 이름의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 꽃은, 향기가 없고, 저는, 말을 못하니까. 그래서 이름 대신, 넣었어요.

향기가 없는 것이 말 못하는 자신 같아서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름을 새겨 넣듯 수를 놓았다는 말이었다.

플란츠가 로브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향기 없는 꽃이 있다는 것이 플란츠에게는 오히려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세상 모든 향기를 르니에리로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지 않은가. 세상 모든 향기가 르니에리 같다 해도, 이 꽃만은 무조건 르니에리가 아닐 테니.

그러니 향이 없든, 말을 못하든.

그게 뭐 어때서.

플란츠의 말에,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알아요. 그냥, 저랑 닮았다고, 한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향기 없다는 꽃이, 작은 별처럼 생긴 그 꽃이, 플란츠에게는 달 없는 밤의 오롯한 별 같아서였다.

싫어하는 보라색 꽃이 하나 생겼고.

싫지 않은 하얀색 꽃을 하나 배웠고.

그것을 더하고 빼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을 기댔다.

루시 대신 무릎을 덮은 로브가 루시만큼 따뜻해서, 등을 기댔다.

* * *

적막했다.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던 칼리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선 채로, 바닥을 향해 시선을 둔 채로 그저 그렇게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 자박

조금 먼 곳에서 바닥 밟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은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의식하거나 경계하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리일지 알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저 소리를 경계할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 자박, 자박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 소리가 칼리안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칼리안의 옆에서 조용히 멈췄다.

다급해보이던 칼리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이 곳까지 함께 온, 칼리안의 의사에 따라 이 곳은 그대로 두고 에우리아를 도우러 갔던 앨런이었다.

앨런은 주변에 남은 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있다는 동굴에 에우리아를 다시 들여보냈다. 그 이후 칼리안에게 되돌아와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칼리안의 귓가를 울렸다.

칼리안이 성장했음을 알았고, 이 곳의 이들이 칼리안에게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이렇게 물었다.

그 물음이 인사치레가 아님을 아는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칼리안의 주변에 시신은 없었다. 이미 처리를 한 것인지, 혹은 시신을 두고 다른 곳으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앨런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다행입니다."

따뜻한 말에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잠깐 주변을 둘러보며 단조로운 목소리를 냈다.

"오늘 이 곳에 온 이들과 세이렌 경을 처음 습격했던 40여명의 무리의 목적이 서로 달랐나 보네요. 처음 습격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더군요. 무력의 차이를 보아도 그렇고, 그쪽은 세이렌 경을 노렸고 이번에 찾아온 이들은 세작들의 뒤를 밟았다 하였으니 거짓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런 말마따나, 오늘 숲을 찾은 것은 제온의 일원 중 대사막의 전사들이었고 처음 에우리아를 습격한 것은 제온의 일원은 맞았지만 대사막의 늑대들이 아닌 일반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곧 칼리안은 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 앨런의 앞에 꺼내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앨런이 침통한 얼굴로 물었다.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두 개의 조약돌이었고, 칼리안이 지니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던 것은 그 색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짙은 회색, 그리고 조금 더 연한 회색의 두 조약돌은 색깔을 제외하면 칼리안이 지니고 있던 것과 그 모양이 완전히 같았다.

"한 개는 파괴됐습니다. 심장이 망가져서요."

아쉽다는 듯, 별 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으나 그 말에 숨은 의미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나머지 두 개는 온전한 심장 속에 있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한 번 생명을 다하면 두 번 사용할 수는 없다 하였으니, 다른 시신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앨런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거기까지 들은 앨런은 칼리안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직 모두 자라지 않아 여전히 앨런보다 작은 칼리안을 제 품에 꼭 안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토닥토닥, 칼리안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꼭 진짜 열 다섯 살 아이를 달래는 소리 같이 들린 탓에, 앨런의 품에 푹 파묻힌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 네, 스승님."

등을 툭툭 두드리는 손이, 그 품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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