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내 사람 (1)
투명한 보랏빛의 라벤더 차에서 향이 올라왔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라벤더라는 그 꽃도 차와 똑같은 색을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가라앉히시는 것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전하.'
칼리안이 멋대로 궁을 나갔음을 함께 전해들은 시종장 라울이 이런 말과 함께 내려놓은 차였다. 라벤더라는 그 꽃이 마음의 안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 준 것이리라.
차의 색 때문인지 향이 의외로 짙어서인지 몰라도 그 향기마저 보라색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플란츠는 하얀 잔에 담긴 보라색 차를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시들지도, 그렇다고 피지도 않게 된 꽃이 다른 것을 물들이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참 아름답다 여겨지겠지만. 글쎄.
"마시지 않고 무얼 그리 보고 있느냐."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눈치는 늘지 않는 법이라, 르메인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찻잔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를 가늠하지 못했다. 대신 찻잔을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네, 전하."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질문에 맞지 않는 답이라는 것을 알지만 차를 왜 쳐다보고만 있는지를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실 수도 없어서였다.
그 이상 차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차를 마시도록 다시 한 번 권해올 것 같아서, 플란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봤다. 체르밀 궁에서 들었던 레이븐의 발굽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미친놈.'
당연히 르메인을 향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 레이븐의 등에 오른 채 말도 없이 궁 밖으로 나간 어떤 미친놈 생각이 난 까닭이다.
그 미친놈은 절대로 자신의 앞에 꽃이 든 차를 내려놓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색의 꽃이든, 어떤 향을 내는 꽃이든, 향이 있는 꽃을 앞에 둔 플란츠가 무엇을 떠올릴지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조금 전 그 미친놈은 '아르센을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차마 제 입에 담지도 못했다. 입을 열면 아르센을 구하겠다는 그 말을 같이 하게 될까봐 뒷수습을 해달라는 소리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나가버렸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의 앞에서 꽃을 치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센을 구하러 뛰쳐 나가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 괴리 위에 어떻게 버티고 서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기 이름이 '칼리안'이라 말하는 연세 모를 그 놈은 분명 미친놈이 맞다.
미친 칼리안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마나실 백작이 함께 갔다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로구나."
르메인이 이런 말로 플란츠의 시선을 다시 잡아당겼다.
조금 전 플란츠가 르메인을 찾아왔을 때. 르메인은 플란츠의 가벼운 차림을 보고도 별반 놀라지 않았다. 플란츠가 무슨 말을 전하러 급히 왔을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탓이었다.
르메인이 말하기를, 발칸의 인원을 늘리는 것과 관련하여 앨런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열린 창문으로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이 시간에 왕궁 안에서 말을 달릴 이가 없지 않나 하고 의아해하니 발굽 소리가 아르피아 궁 앞에서 멈췄단다.
그 뒤로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뜬금없게도 앨런이 일어나더니 '칼리안 왕자님과 다녀올 곳이 있으니 남은 일은 전하 혼자 다 해라'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을 건네고는 그냥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플란츠가 찾아온 것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조금쯤 무뚝뚝한 대답이었으나, 플란츠로서는 최선이었다. 누굴 안심시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앨런 마나실은 능력 있는 마법사이지 않습니까."
잠시 틈을 둔 플란츠가, '앨런 마나실은 능력 있는 아버지'라는 말을 대신해 이렇게 덧붙였다.
앨런이라면 당연히 말을 타고 온 이가 칼리안임을 알았을 것이다. 다급히 달려와서는 아르피아 궁 앞에 선 채 들어오지 않으니 그 뜻이야 뻔하지 않겠나. 그렇게 앨런을 불러 함께 나갔다 하니 칼리안이 다칠 일은 없을 터였다.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칼리안 하나만은 알아서 잘 지킬 앨런이니까.
"그래. 과한 걱정인 것을 안다."
그렇게 말하던 르메인이 무언가를 퍼뜩 떠올린 듯한 얼굴을 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앨런이나 시종장 라울, 혹은 기사대장 렌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칼리안에 대한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 탓이다.
"플란츠. 혹여 셋째를 유난히 아낀다 서운히 여기지는 말아주려무나."
말을 꺼내고 나니 변명 같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오해가 없을까 잠시 말을 고른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없이 조용하다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그렇게 달라져서는 온갖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있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아서 이러는 것이니."
플란츠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런 플란츠를 보던 르메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모순된 탓에, 나는 또 그것이 기껍게 느껴지기도 하더구나."
말이 없고, 나약하고, 겁이 많고, 항상 주눅들어 있다던 모습 보다는 지금이 기껍다는.
그런,
말.
"전하."
르메인의 말을 막은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옛 칼리안이 한없이 조용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탓이었으나 '그렇게' 달라지게 된 것은 둘 모두의 탓이었다.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르메인이 그것을 두고 기껍다 말하지는 않아야 했다.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르메인만은 절대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부탁하듯 말했다.
"기껍다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르메인이 그런 플란츠를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 말을 '기꺼워 하기에는 칼리안이 사고를 너무 많이 일으킨다'는 정도로 이해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다. 그리 여기지 않으마."
플란츠는 그에 대해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눈을 떠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남겨두고 급히 왔습니다. 이만 나가보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꺼낸 말이기는 했지만 거짓 핑계는 아니었다. 기사들을 보내 칼리안의 뒤를 쫓지 말아달라는 말을 전했으니 다른 것을 하나 더 해야 했다. 히나를 불러 이동 마법진 방향의 외성문 쪽에 보내는 일이었다.
아무리 레이븐이 빠르다지만, 전속력으로 달린다 하더라도 왕궁 외성 밖의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족히 1시간은 걸린다.
체이스가 말한 '그들'이 아르센을 언제 공격할지 몰라도, 만약 시간이 맞지 않는다면 아르센이든 에우리아든 다쳐서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소드마스터이기 이전에 일국의 왕자인 이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놈들이니, 둘의 지위와 무력으로는 상대하지 못할 이들일 수 있었다.
"그래, 가보려무나."
허락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정적이 내려앉은 집무실 안에 남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보랏빛 차를 한동안 쳐다보던 르메인이, 깊고 깊은 한숨을 한참 내쉬었다.
또 소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서였다.
* * *
마법사의 눈이 공포에 젖어들었다.
마법사를 굳이 깨워낸 칼리안은 잠깐 잊은 것이 있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목이 잘려나간 이와, 아르센에게 죽은 이의 시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신의 품을 확인하는 손과 얼굴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아직 굳지 않은 피가 흐르든 말든, 하얀 손에 그들의 피가 묻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마법사의 상처가 아물었다.
마력도 있었고 단검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다른 행동을 할 생각도 못한 채 그런 칼리안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역시."
한참 뒤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생각한대로 놈들의 시신에서 나오는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곧 다시 마법사에게로 돌아온 칼리안이, 마법사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 번 웃었다. 흠잡을 곳 하나 없을 예쁜 웃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는 게 별로 없을 것 같기는 했는데, 혹시 몰라서 살려두라고 했어."
소름이 끼쳤다.
사로잡힌 상대방에게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웃던 놈들은 많이 만나봤다. 하지만 달랐다.
마법사는 칼리안이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르센에 의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니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웠다.
- 자박
칼리안이 마법사를 향해 한 발을 더 다가섰다.
마법사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있는대로 입을 벌린 살모사와 눈을 마주친 개구리가 된 것처럼, 그 붉은 눈을 보는 순간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사 역시 대사막의 전사였다. 칼리안의 실력에 비견될 만큼은 아니었으나 그 역시 마법을 부리고 검을 쓸 줄 알았다. 거기에 더해 칼리안은 사용하지 못할 힘이 있었음에도 다시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사락
재킷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의 얼굴이 가까이 내려왔다. 살짝 무릎을 숙여 마법사와 눈을 마주친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발현하며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 줄 생각이 있으면 들을게."
무엇에 대한 말인지, 칼리안은 제 입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알아서 칼리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꺼내놓기를 종용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 쉬익!
어느새 손에 들린 짧은 단도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통증이 찾아왔다. 조금 전 어깨를 관통당한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말 그대로 끔찍하리만치 고통스러운 감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빠르게 뻗어나온 칼리안의 손이 마법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가는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강한 압박에 마법사의 비명소리가 가로막혔다. 칼리안은 조용히 하라는 듯 다른 쪽 손의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소리지르지 말고 말을 해.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 아니잖아."
숨긴 것을 강제로 알아내는 일은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이전에 만났던 이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손해인 것을 알면서도, 더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내가 사실 이런 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서 저번에 찾아온 놈들은 그냥 다 죽였어. 하기 싫어서."
직접 하고 싶은 생각도, 누군가에게 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 푸욱!
아물기 시작한 상처의 끝에 다시 한 번 칼날이 닿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마법사를 보면서, 칼리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얌전히 나만 건드리고 갔으면 나도 얌전히 기다렸을 텐데."
그리고는 한 번 더 칼을 쥐었다.
마법사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다 할 대답을 꺼낼 시간도 주지 않은 채였다.
오러인지, 혹은 마법사의 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검붉은 것이 짧은 검신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나 말고, 내 사람 건드리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치유력을 가진 대사막의 전사.
그리고 어떤 곳을 헤집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되어버린 카이리스의 3왕자.
승자가 결정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