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73화 (174/527)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 (6)

녹빛 가득했던 숲은 어느새 짙은 잿빛 어둠에 잠겨 있었다.

유난히 푸른 별이 많은 계절이었으나, 깊고 울창한 숲은 한 조각의 하늘도 온전히 보여주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간신히 드러난 하늘이 잠시 보이다가도, 바람을 마주한 잎사귀의 흔들림에 이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때 푸른 별똥별 하나가 짧은 잔상을 남기며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보며 소원을 웅얼거릴 수 있는 이는 이 곳에 없었다.

일단 하늘이 보이지 않았고, 하늘을 바라보다 탄성을 지를 만큼 한가로운 이들도 없었다.

- 파직, 파지직!

대신 떨어진 별똥별의 꼬리를 손아귀에 쥔 듯한 모습의 마법사 한 명은 있었다. 모여드는 보랏빛 마나에 바람이 깃들어, 바닥에 닿을 만큼 긴 로브가 크게 부풀며 펄럭였다.

먼 곳을 보거나 어둠 속을 식별할 만큼 시력이 좋지도 않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마법도 배워두지 않았다. 하지만 에우리아의 눈은 적이 다가오는 방향을 정확히 주시하고 있었다. 디디고 서 있는 바닥에 얇고 거대하게 펼쳐둔 마나에 어느 곳에서 몇 명이 다가오고 있는지 감지되고 있었으니까.

"두 명."

말 발굽 소리도 없을 뿐더러 큰 동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있으니, 분명 두 다리로 달려오는 속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다.

그것을 느낀 에우리아가 슬쩍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래 바람만 쐬다 숲에 오니까 신이 났나. 늑대새끼들."

말과 몸짓, 표정에서는 그 어떤 긴장감도 없었으나 눈빛만은 아니었다. 다가오는 이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아르센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던 탓이 더 컸다.

- 파직, 파직!

에우리아의 손에서 명멸하기를 반복하던 번개의 힘이 손 끝으로 모여들었다. 땅에 내려온 보라색의 별처럼 빛을 내던 그것이 조금씩 크기를 줄여가더니 이내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뒤 에우리아가 앞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넓은 소매 자락에 항상 가려져 있던 긴 손가락 끝에서 색깔과 빛이 전혀 없는 가느다란 번개가 조용히 뻗어나갔다. 발 밑이 뭉클거리는 느낌이 잠시 들었다 사라졌다. 물의 움직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번개와 물을 적들에게 보내고 오래지 않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보라색의 빛이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시작됐다.

- 콰광! 콰아앙!

소리없이 응집된 물이 바닥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다가오는 두 전사의 몸이 완전히 물에 젖은 그 때, 대기중에 퍼뜨려 둔 번개의 힘이 물에 닿았다.

- 파지지직!

아직 실드로 보호하지 않은, 그리고 물에 완전히 젖은 전사들의 몸으로 전류가 흘러들어갔다.

숲에 사는 그 어떤 짐승이든 한 번에 숨을 끊어 놓을 정도의 선제 공격을 가한 에우리아가 한참 멀리 떨어진 나무의 굵은 가지 위로 텔레포트했다.

놈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신속한 움직임이다. 어차피 저 정도로 죽을 전사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파앗!

아르센과 달리 에우리아는 칼 든 놈들과 붙어 싸우지 않았다. 공격자의 위치를 확인한 이들이 달려들기 전에 재빨리 몸을 이동시키며 마법을 난사하는 것이 에우리아의 싸움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놈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와 검을 휘두를 틈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지지지직!

다시 한 번 번개의 힘을 움직인다. 조금 전 공기 중에 퍼뜨려 둔 마나를 모아 놈들의 온 몸을 감싸안은 뒤 전기의 힘을 쏟아냈다.

숲이 번쩍일 때마다 이제 지척까지 다가온 놈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보였다. 둘 모두 검을 들었고, 얼굴이나 몸에 큰 상처가 없다. 놈들이 재빨리 두른 붉은 실드를 없애지 못한 것이다.

조금 전의 공격이 그리 큰 효과가 없었음을 깨달은 에우리아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것은 치료를 하고, 번개는 못 부르겠고.'

상대는, 한 떼로 몰려와 에우리아와 아르센을 공격했던 놈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하늘에 먹구름을 불러내고 번개를 내리꽂는 동안 에우리아는 움직이지 못한다. 보조해 줄 다른 마법사가 없는 상태에서 그런 대형 마법을 부리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지 않나. 제대로 쓰기도 전에 달려들어 검을 들이댈 테니까.

그러니 그냥 죽일 수 밖에.

에우리아의 몸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놈들이 달려온 방향, 즉 놈들 뒤쪽의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서 나타났다.

바닥이 젖었고 놈들 주변에는 여전히 마력이 퍼져있었다. 놈들은 아직 에우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고. 에우리아는 놈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물줄기같은, 그러나 그 끝은 단련된 무쇠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예리한 창 두 개가 에우리아의 앞에 떠올랐다. 그 표면에 휘감긴 속성 다른 마력이 엉켜들었다. 보랏빛 스파크로 뒤덮인 물의 창을 만든 것이다.

에우리아는 지체하지 않았다.

- 쌔애액!

에우리아가 아니라면 만들어내지 못할, 물과 전기를 모두 담은 창이 놈들을 향해 하나씩 뻗어나갔다.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순식간에 치닫는 창을 본 두 전사가 각각 검을 들어 그것을 쳐내려 했다. 에우리아가 만든 것이 '물'의 창이었음을 간과한 채였다.

- 촤악!

칼에 닿은 창이 곧바로 형태를 잃으며 쏟아졌다.

- 파지직! 파직!

물에 스며있던 전기의 힘이 칼을 타고 손으로 전해졌다. 몸 주변을 실드로 보호하고 있다면, 실드 밖에 나와 있는 손을 직접 공격하면 되는 일 아니던가.

순식간에 몸 속으로 파고드는 전기 공격에, 놈들은 검을 떨구지도 못하고 멈춰섰다. 감전에 따른 일시적인 마비였다.

때를 놓치지 않은 에우리아가 득달같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마치 그 팔을 따라 움직이듯, 대지가 진동하며 사방으로 흙을 흩뿌렸다. 땅을 뚫고 올라온 물의 힘이었다.

- 콰아아!

그 정도로 예리한 기운을 담은 물기둥 두 개가 놈들을 가두고 회오리쳤다. 동시에, 에우리아의 손에서는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빛을 띤 번개의 창이 연거푸 쏘아져 나갔다.

빠르게 회전하는 물 속에 갇힌 이들은 온 몸이 베이고 찢긴다. 물의 창 끝이 무쇠처럼 단련되어 있다면, 물기둥의 회오리는 칼날처럼 벼려져 있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사들은 죽지 않았다.

용솟음치는 물기둥에 갇힌 채 번개 공격까지 허용한 놈들의 몸이 붉게 빛났다. 치유력이 발현된 것이다.

- 콰아앙! 콰앙!

두 줄기의 번개가 물기둥 한 가운데로 떨어져내렸다.

놀랍게도, 두 놈 중 한 명이 간신히 움직여지는 팔을 들어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하는 진동음과 함께 그 검에 붉은 오러가 어렸다. 그러자 강하게 회전하는 물기둥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오."

아무 의미 없는 순수한 감탄사가 에우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물기둥 안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이를 보지 못했던 탓이었다.

에우리아의 눈에 흥미 가득한 기색이 떠올랐다.

번개의 빛에 비춰진 놈의 녹색 눈이 에우리아를 직시하고 있었다.

- 타악!

여전히 물기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행은 도와 줄 생각도 않은 채, 놈의 몸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에우리아의 앞까지 도달한 놈은 텔레포트를 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검을 들어올려 비스듬하게 내리쳤다.

- 카앙!

검격을 막아낸 푸른 실드가 크게 흔들렸고, 동시에 에우리아의 몸이 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표를 다시 잃어버린 놈이 이를 악물었다.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우리아가 팔을 뻗었다.

- 쌔애액!

물과 번개의 힘이 함께 담긴 마력의 창이 놈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을 내리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이미 배웠던 놈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 창은, 이제 막 물기둥에서 벗어나 달려오던 또 다른 전사의 허리를 스치듯 베어낸 뒤 바닥에 꽂혀 사라졌다.

"크읏!"

조금 전의 공격 이후 아직 실드가 재구성되지 않았던 놈이 이를 악물었다. 스치듯 베인 상처로 스민 전기가 온 혈관을 지나가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런 일행을 쳐다볼 틈도 없이, 에우리아에게 달려들었던 전사는 마력의 창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에우리아와 놈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 카아앙!

놈이 뛰어올라 휘두르는 검이 또 한 번 실드를 강타했다. 그것을 빠르게 복구한 에우리아가 놈의 배를 향해 번개와 물을 함께 쏘아냈다. 형태를 갖추지도 않은 채 쏘아진 공격이 놈의 복부를, 정확히는 복부를 감싼 붉은 실드를 강하게 때렸다.

- 콰앙!

거대한 나무가 흔들거릴 만큼의 굉음이 터져나오며 뛰어오르던 놈이 바닥으로 집어던져지듯 내리떨어졌다. 강한 충격에, 놈의 입에서 피 섞인 기침이 토해져 나왔다. 놈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른 쪽을 보니 온 몸에서 치유의 붉은 빛을 내뿜는 다른 전사가 에우리아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피 토하는 놈과 달려드는 놈.

찰나의 순간, 두 개의 선택지.

피할까, 말까.

빠르게 결정을 내린 에우리아의 손 끝에 체리만한 크기의 물방울이 하나 만들어졌다. 투명한 물방울 한가운데 보랏빛의 스파크가 뭉친 채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퍽 예쁘다.

번개의 힘을 손톱만하게 응집한 뒤 압축된 물로 감싸 고정시킨 것. 아직 사람에게 써본 적 없고 이름조차 붙이지 않은 자신만의 마법을 발현한 에우리아가 손가락을 까닥이듯 움직였다.

- 슈욱!

손 끝에 맺혀있던 그것이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놈의, 벌어진 입 속으로.

꿀꺽.

제 입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하지 못하고 삼키는 것을 본 에우리아가 재빨리 나무를 박차고 몸을 띄웠다.

- 쿵!

거의 동시에, 달려들던 놈의 검이 방금 전까지 에우리아가 서 있던 나뭇가지를 강타했다. 에우리아는 이미 허공에서 사라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던 놈의 몸 속으로 들어간 마법이 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목구멍 속으로 들어간 물방울이 형체를 잃었다.

그 속에 숨겨둔 번개를 몸 속으로 풀었다.

온 몸을 감싼 강력한 실드조차 내장을 보호할 수는 없었다. 연약한 위벽에 달라붙은 전기가 내장 벽을 타고 온 몸을 헤집었다.

- 파지직! 파지지직! 파직!

에우리아의 번개는 사라지지 않는다.

놈의 입 안에서 보랏빛 스파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성대가 타버린 놈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력을 잃어 백탁된 눈에서도 스파크가 흘러나왔다. 온 몸을 뒤틀며 저항해보지만 인간의 몸 속에 가두어진 번개의 힘은 그 속을 모조리 태울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 풀썩.

더 이상 숨 쉬지 못할 이의 손이 바닥에 떨궈졌다. 그 입에서 시커먼 연기가 풀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료의 끔찍한 죽음을 본 전사가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멀찍이 선 채 자신을 향해 번개의 창을 내쏘는 에우리아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적으로 마주치면 무조건 죽음을 내린다던 저 마법사의 목을 사정 없이 비틀어버리려 했다.

- 우뚝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발이 땅에 묶인 것처럼. 혹은 갑작스럽게 몸무게가 열 배로 불어난 것처럼 느껴져서 손 끝 하나 고개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저 보라색 머리의 마법사가 지금까지 써왔던 방식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번개를 떨어뜨리고 바닥에서 물을 솟아오르게 하는 마법을 부렸다. 투명한 구슬 하나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다니며 마법을 부리면서도, 달려드는 전사의 발을 묶지는 못하지 않았던가.

'뭐지?'

온 힘을 다해 손 끝을 움직여 보았으나 몸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몸에 마비가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거웠다.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알고자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이 들어왔다.

작은 크기의 선홍빛 구체가 먼 곳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피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몰라도 그 속도가 굉장히 느렸다.

'실드를!'

놈은 날아드는 그 구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실드를 펼쳐냈다. 에우리아의 번개를 막고, 물기둥의 폭격에서도 몸을 지켜냈던 그 두텁고 강력한 실드로 온 몸을 둘러쌌다.

- 툭

검을 쓰지 않는 이가 돌덩이 하나를 집어던진 정도의 느린 속도로 다가온 그것이 붉은 실드에 닿았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작은 소리에, 여전히 잘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웃음이 나왔다.

뭐야. 별 것도 아니었네.

그냥 빨갛기만 한······.

- 스윽

놈의 생각대로 구체는 실드를 파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한다면, 파괴하지 않았다.

그저 통과했다.

그 두껍고 강력한 실드를 그대로 통과해 안으로 들어왔다. 놈의 눈에 그제야 구체의 모습이 정확히 비춰졌다.

사람의 눈알만한 작은 구체. 선홍색의 용암이 유리구슬 안에서 미친듯이 회오리치고 있는 듯한 모습의 그것을 사용하는 이는, 이 대륙에 단 한 명 뿐이었다.

'아······.'

사람에게 가해지는 중력을 멋대로 조종하는 사람.

온도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열기의 마법을 부리는 사람.

그것이 누구인지, 그렇다면 이 구체는 무엇인지.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진 구체가 손 끝에 툭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가장 먼저 닿은 것이 손이었음에, 대사막의 전사는 큰 아쉬움을 느꼈다.

왜 심장이 아니고 손에 닿았는지.

왜 자신은 치유력을 지녔는지.

그런 아쉬움이었다.

손 끝에서부터 시작해 아주 천천히 온 몸을 태워낸 뒤 가장 마지막에 심장을 태워낼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 화르륵!

그렇게, 고요하고 잔인한 앨런 마나실의 불이 전사의 몸을 섭식했다.

* * *

어깨의 부상이 가볍지 않았다.

살펴 볼 필요도 없이 피 냄새가 달랐다.

시퍼렇게 변한 아르센의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숲 속을 향해 고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레이븐."

'다각' 하는 낮은 발굽 소리와 함께 세상 어디에 두어도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을 듯한 검은 말이 칼리안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 레이븐의 목덜미를 몇 번 쓰다듬은 칼리안이, 레이븐의 안장을 가리켜보이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마법진 이용해서 왕궁으로 가요. 형님께서 아마 히나를 불러두셨을 테니 바로 치료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의문 가득한 얼굴을 했다.

어깨가 충분히 아픈 상태였으니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이 의문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말하는 '형님'이 플란츠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한 의문도 아니었다. 플란츠가 히나를 불러두었을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특별히 의문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아르센의 얼굴을 가득 메운 의문은, 칼리안이 말하는 것이 마치 레이븐을 타고 가라는 것처럼 들린 탓에 생긴 것이었다.

"왕자님의 말을 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아르센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이렇게 물었다.

레이븐의 안장에 매여 있던 로브 자락을 길게 찢은 칼리안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감싸기 시작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더 늦으면 위험할텐데요. 이제 감각도 없을 것 같고."

게다가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크게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중간에 아르센이 기절하더라도 문제 없이 왕궁까지 잘 배달해 줄 녀석이 레이븐 말고 또 있을까.

그러니 칼리안은 지금 최선의 판단을 내린 셈이었다.

"제 말은······!"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앞에 있는 저 시커먼 것이 누굴 태우고 다닐 요량으로 태어난 놈이 아닌 듯 하다는 데에 있지 않느냐 물으려던 아르센이 말을 멈추고 눈을 찌푸렸다. 상처를 다 감싼 로브의 끝을 칼리안이 힘주어 묶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아르센이 하필이면 왼쪽 어깨를 다친 것을 하필이면 칼리안이 응급처치해주고 있는 상황이라니.

치료받지 못할 만큼 망가진 왼쪽 어깨를 직접 잘라냈던 기억을 밀어낸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요. 나 지금 화가 좀 나있어서."

화를 더 돋우지 말고 시키는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마음을 잘 읽은 레이븐이 옆에서 '푸릉' 하는 소리를 냈다.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자는 뜻이었다.

아르센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되어 한 팔로 레이븐의 안장을 잡은 뒤 위에 올랐다.

- 탁!

바닥에 발을 한 번 구르는 것으로 정말 싫지만 참아준다는 기색을 드러낸 레이븐은, 아르센이 칼리안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출발했다. 배를 차는 것은 물론 고삐를 쥘 필요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알아서 갔다.

칼리안은 그런 아르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몸을 돌렸다.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자박 자박 걸어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마법사를 툭 건드린 칼리안이, 간신히 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안녕."

그리고는 참으로 어여쁘게,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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