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 (5)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믿는 이에게 가는 길목의 큰 숲에 마법사와 새가 있고, 부정하는 이가 섞인 '그들'이 새를 찾아갔습니다.
믿는 이는 텐실, 부정하는 이는 대사막의 늑대를 뜻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쪽지에 적힌 수수께끼같은 내용을 확인한 칼리안이, 종이를 태워 없애는 대신 플란츠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대로 테라스를 뛰어 넘어 나가버렸다.
오래지 않아 달리는 말의 발굽 소리가 왕궁을 울렸다. 왕자를 태운 검은 말은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 사이를 유려한 움직임으로 피해가며 그대로 내달렸다.
테라스에서 그 꼴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테라스를 통해 밖으로 뛰어내린 뒤 아르피아 궁으로 향했다.
칼리안이 쪽지를 돌려줬지 않나.
분명 뒷처리를 맡긴다는 의미일테니 아르피아 궁에 말을 전하러 가는 것이다.
"······ 하."
내 동생 도망갔다고.
* * *
동굴 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선 채 마나를 흩뿌려 외부 상황을 살핀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짹짹이들."
동굴을 울린 폭음으로 긴장하던 중 들린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던 노란 울새가 욱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우리아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꼬리 밟혔다."
누군가 이 곳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정확히 이 동굴을 노리고 달려드는 기세를 보아하니 우연히 지나가다 인사나 건네러 오는 모양새는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범상치 않은 낯선 기운을 감지했음에도, 에우리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에우리아의 말에 노란 울새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꼬리가 밟히다니? 무슨 소리인가."
"꼬리가 꼬리지. 누가 뒤쫓아왔다는 말이잖아. 우리 꼬리인지 너희 꼬리인지 모르겠는데. 아마 너희일거야."
노란 울새는, 이미 자신들에게 꼬리를 밟혔으면서도 이번에는 세작들의 꼬리가 밟힌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인 에우리아를 향해 짧게 물었다.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인가."
"어, 몰라. 여기 서서 그걸 알면 내가 사람인가."
곧 에우리아가 양 주먹을 한 번씩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근육을 풀었다. 그렇게 마치 기사들이 전투에 나서기 전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 에우리아가 노란 울새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만 도망가는 건 상관 없는데. 동굴 밖으로 자료 들고 나가면 종이 망가진다. 동굴 무너져도 망가질 거야. 그러니까 알아서 얌전히 자료 지키고 있어."
노란 울새가 험악한 얼굴을 했다. 이번에도 그리 신경쓰지 않는 얼굴을 한 에우리아가 다시 말했다.
"대사막에서 온 늑대 새끼 같으니까 괜히 나왔다 죽어서 골치아프게 하지 말고."
세작들 역시 제온이라는 이들의 힘, 특히 그들 중 '대사막의 늑대'와 같은 강한 무력의 전사가 그 힘을 지녔을 때 어떤 괴물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특별히 에우리아가 그들을 지켜 줄 이유도 없었고 그들이 에우리아를 도울 이유도 없었다. 때문에 어떻게 처신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립]
그냥 두고 가려다 마음을 바꿔먹은 에우리아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훔쳐가려다 자료 다 망쳐놓을 것 같아서 안되겠다."
에우리아는 나란히 쓰러져 잠든 세 명의 세작들을 보며 느긋하게 말한 뒤, 이제 지척까지 다가온 늑대 잡으러 동굴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손 끝에 모여든 보라색 스파크가 파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 *
보이지 않았다.
숲이 울렸고, 칼리안이 공격을 막았다.
멀리서부터 칼리안이 지금 서 있는 곳까지의 바닥에 길고 가는 검흔이 남아 있었다. 아르센은 그것을 본 뒤에야 칼리안이 이동 마법진 쪽에서 왔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바닥을 긁듯 검을 늘어뜨린 채 달려온 뒤, 떨어져내리는 붉은 오러의 검을 올려쳤다는 것도 땅의 검흔을 보고 알았다. 달려오던 힘을 담아 강하게 올려친 칼리안의 검과, 아르센에게 도약했던 힘을 실어 내리친 타미라의 검이 정통으로 부딪혔기 때문에 그렇게나 큰 굉음이 울렸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아니었다면 지금 칼리안이 어떻게 왔는지, 타미라의 검을 어떻게 막은 것인지 절대 몰랐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법사 잡아요. 죽이지 말고."
타미라의 연갈색 눈을 노려보는 채로,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등 뒤의 아르센을 향해서였다.
"네, 왕자님."
어깨에 입은 상처가 깊었던지 피 냄새가 짙었다. 다만 대답은 잘 하는 것으로 보아 당장 죽을 만큼은 아닌 듯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때문에 칼리안은 곧바로 아르센으로부터 관심을 돌렸다. 사고 친 마법사 말고 바로 앞에 서 있는, 검 좀 쓰는 듯한 대사막의 전사 쪽으로.
- 카아앙!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르센의 손에 푸른 빛의 기운이 모였다. 공기중에 퍼져나가다 다시 손으로 흡수되듯 사라지길 반복하는 기운을 갈무리한 아르센이 상대방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아르센을 고생시킨 타미라는 칼리안이 해결할테니, 타미라가 자신을 계속 노리든 말든 그냥 저 마법사 한 명만 사로잡으면 되는 것이다. '마르시타'라 소개 받았으나 아르센의 머리에 하나도 남지 않은, 특별히 기억할 것 없는 바로 그 마법사 말이다.
- 파앗!
뭉클거리며 모여든 기운이 일순간에 아르센의 손바닥으로 빨려들어가듯 회오리치며 사라졌다. 익숙한 냉기가 손바닥 안에 집약되는 것을 확인한 아르센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여러 걸음 떨어져 있던 그 마법사의 코앞에 다시 나타났다.
칼리안의 개입으로 같은 수끼리 싸우게 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던 탓에, 마법사는 당황하지 않고 붉게 빛나는 단검을 휘둘렀다.
- 쉬이익!
그것이 정말 마법사의 공격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빨랐으나, 이미 한 번 당해본 경험이 있는 아르센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아르센의 손 끝이 움직였다.
물안개를 모은 것 같은, 따뜻한 차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모은 것 같은, 높은 산을 휘감은 구름을 모은 것 같은 느낌의 푸른 기운이 단검을 휘감았다.
- 탁! 까드득!
그와 함께 마법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손톱으로 쇠를 긁어내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가 이어졌다.
단검의 표면에 어려 있던 붉은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담금질 직후 물 속에 들어간 쇠처럼, 단검의 표면이 새카맣게 변하다 종내에는 새하얀 실금이 생겨났다.
그레이의 대리석 테이블처럼, 붉은 오러가 어려 있던 단검이 얼어붙은 것이다.
- 째앵!
곧이어 잘 만들어진 도자기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고, 마법사의 단검이 산산히 부서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오러가 담겨있던 검을 깨뜨린 것에 성공했음을 감격해 할 새도 없이, 아르센이 다시 한 번 냉기를 모았다. 마법사의 손에 커다란 화염구가 생성되고 있음을 눈치 챈 까닭이다.
붉게 일렁이는 화염구가 지척에 있던 아르센을 향해 날아왔다. 마법사의 앞에 서 있던 아르센의 모습이 점멸하듯 사라졌다.
- 콰앙!
방금 전까지 아르센이 있던 곳으로 날아간 화염구는 허무하게 바닥을 강타하며 폭발했다. 그 폭발에 대한 화답이라도 보내듯 일순간에 모여든 냉기가 마법사의 주변을 휘감았다. 그리고 네 개의 창이 마법사를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 쌔애액!
처음 세 개의 얼음창은 마법사의 실드에 막혔다. 실드에 박힌 얼음창이 형태를 바꾸며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이전과 똑같이 붉은 빛 실드를 빼곡하게 감싸며 얼어붙었다.
마지막 네 번째 얼음창이 쏘아졌다.
- 쌔액!
- 까드득! 까득!
얼음창이 내리꽂히는 충격에 형태를 잃은 실드가 공기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마법사의 실드를 깨고 나서도 힘을 잃지 않은 마지막 얼음창은, 그대로 마법사의 어깨를 꿰뚫고 바닥에 꽂혔다.
"크윽!"
순식간에 입은 상처의 아픔보다 뼛속까지 얼릴 듯한 한기가 더 참을 수 없었다. 마법사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자신의 어깨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주고 받은 셈 치면 되겠군.'
땅에 꽂혀 여전히 녹지 않은 얼음의 창에 어깨가 꿰인 채인 마법사에 비한다면 아르센의 상황이 훨씬 낫다 하겠으나, 아르센은 그렇게 계산했다.
곧 아르센의 마력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커다란 돌처럼 둥글게 뭉쳐진 얼음 조각이, 피하지 못하는 마법사의 뒷통수를 향해 내리쳐졌다.
- 빠악!
상당히 뼈아픈 소리가 울려퍼지며, 마법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무게감 없는 검은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빠르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타미라의 검을 힘주어 올려친 칼리안이 들어올려진 자신의 검을 곧장 내리그었다.
그 속도에 깜짝 놀란 타미라가 뒤로 도약하며 몸을 뺐다. 허공을 가른 칼리안의 검이 다시 방향을 바꾸며 집요하게 타미라를 공격해갔다.
- 카아앙!
발칸의 마법사들을 향해 쏟아내던 것과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피하지 못할 죽음의 저주와 같은 살기가 타미라의 숨을 틀어막는다.
타미라의 붉은 오러와 극명한 차이가 있는 칼리안의 검붉은 오러. 갈라진 심장에서 울컥 쏟아진 핏덩이와 같은 그 섬뜩한 빛이 검의 궤도를 따라 번뜩였다. 검의 궤적은 숲에 내려앉은 농밀한 어둠조차 베어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르센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검을 내지르던 대사막의 늑대는, 찰나의 실수로 목이 떨어져나가지 않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 쉬이익! 캉! 카강!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검이 실드를 내리치는 소리가 뒤따랐다.
강력한 실드가 없었다면 검이 두 번 얽혀들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벌어진 상처가 빠르게 치유되지 않았다면, 칼리안과의 첫 공방에서 이미 영면에 들었을 것이다.
- 카가각!
어김없이 잘려나가는 실드를 본 타미라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타미라를 마주보고 있던 붉은 눈이 일순 사라졌다. 똑같이 붉은 입술이 그려낸 긴 호선이 타미라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강하다.
이제 막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 뜯은 맹수의 그르렁거림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포식자의 만족감 가득한 그 소리와 꼭 닮은 검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짓쳐드는 공포에, 당장이라도 검을 내려놓고만 싶은 피식자의 패배감.
강하다.
전해들은 말로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죽을텐데. 그러다."
의문 가득한 시선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직 앳된 목소리가 타미라의 뒤에서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타미라의 검이 반응했다.
- 부웅!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은 타미라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한 바퀴 회전하며 주변을 샅샅이 베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끝에 닿는 것이 없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오러의 빛이 짙게 변했다. 주변이 일순 밝아진 느낌이 들었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그때,
'탓!' 하고 작게 발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며 하늘 위에서 검붉은 검이 떨어져 내렸다.
- 카앙!
순간적으로 검을 들어올린 타미라가 칼리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날듯이 도약하여 내리쳐진 검의 힘이 그리 묵직하지 않은 것을 느낀 타미라가 눈을 빛냈다.
제대로 된 근육조차 없는 몸, 그리고 가벼운 검.
그것을 깨달은 타미라가 온 팔에 힘을 주어 칼리안의 검을 밀어냈다. 뒤로 넘어갈 검에 휘둘릴 때 드러나는 상체를 공격할 생각을 했다.
곧 타미라의 검에 느껴지던 무게감이 일순 사라졌다. 그리하여 다시 검을 휘둘러 앞에 선 이를 베어내려던 찰나.
- 쉬이익!
검과 함께 밀려나 중심을 잃었어야 할 칼리안이 오히려 타미라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밀려난 검을 미련 없이 없애버린 칼리안이 타미라 쪽으로 뛰어들었다.
- 우우웅!
어느새 다시 형태를 갖춘 검붉은 검이 타미라의 목을 향해 치달았다.
"······ 죽는다니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 때.
똑같은 빛의 무언가를 갈구하듯 뻗어나온 검이 거침없이 살을 가르고 생명을 취해냈다.
- 툭
더 이상 숨 쉬지 않는 전사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