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71화 (172/527)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 (4)

- 카이리스의 마법사를 상대하려 들지 마라.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에게 내려지는 지침 중 이런 말이 있다. 싸움이든 말싸움이든 단순한 대화든 상관 없이, 카이리스의 마법사는 일단 멀리 하고 보라는 소리였다.

왜 하필 카이리스의 마법사만 상대하면 안되느냐 묻는다면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독특한 성향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 강국 리베른, 그리고 기사들이 많지만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특별히 나쁘지는 않은 세크리티아.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마법사들이 의외로 정상적이라는 것에 있다.

타국 출신인 앨런만 보아도 그렇지 않던가.

비교적 사고방식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머리가 미쳐있지는 않았다. 입이 미쳐있어 그렇지.

······ 뭐, 아무튼.

카이리스의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넘쳐나고, 싸움을 피하지 않으며, 술을 좋아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전부 다 조금씩 미쳐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들은 확실히 어딘가 좀 많이 달랐다.

그런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우두머리. 즉,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피해야 할 최우선순위 마법사가 말했다.

"거기 짹짹이들."

이 말에, 나란히 무릎꿇린 세 명의 세작들이 일제히 한 쪽을 노려봤다. 그 곳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자세로 바위에 걸터앉은 보라 머리 마법사가 있었다.

"그래, 너희들."

세작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에우리아가 살짝 웃는 얼굴로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세작들은 저도 모르게 옷깃 안쪽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뒤질라고.'

그날 아침.

세작들을 마주한 에우리아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 덩어리 세 개가 생성됐다. 딱 사람 머리만한 그 물덩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세작들의 얼굴을 집어삼키듯 감쌌다. 피하는 것은 둘째 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바로 깨닫지 못했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진득한 젤리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농도 짙은 물이 세작들의 코로, 그리고 입으로 꾸역꾸역 흘러들어왔다. 숨을 쉬는 것은 물론 독을 씹어 삼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저항하지 못하는 채로 세 명의 새들이 하나씩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렇게 나란히 포박되어 있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이 살려두라고 해서 안 죽인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한 마디씩 해, 짹짹이들."

이 말에 세작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 마법사가 자신들을 참새 세 마리 정도로 보고 있음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에우리아. 입 조심하지."

세 명의 리더 격인 '노란 울새'가 이 악문 소리를 냈다. 죽었으면 죽었지 저딴 취급은 못 받겠다 싶은 마음에 한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체 모를 집단의 뒤를 쫓던 세작들이다.

그것도 왕세자 체이스의 직접적인 명령을 수행할 정도로 신임을 받을 만큼의 충성심과 무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그 충성심이 지나쳐서 이 사달을 냈고 에우리아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는 무력이었다는 사소한 문제만 제외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인재인 것이다.

"왕이 아니라 왕세자의 새들인 것 같아서 살려뒀어. 나도 참고 있으니까 입 정도는 그냥 둬."

노란 울새를 흘깃 쳐다보며 말한 에우리아가 손에 들린 종이 뭉치로 다시 눈을 돌리며, 아주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고 있던 독은 다 빼놨으니까 참고하고, 뭐 물어볼 것도 없으니까 혀 깨물 생각 하지 말고. 내일 되면 풀어줄게."

완벽한 무시였다.

세작들이 사나운 눈으로 에우리아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우리아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손에 들린 종이들을 하나씩 넘겨가며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노란 울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몰라도 지금의 체이스가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정보를 확인해 체이스에게 전달할 욕심에 명령까지 어겼다. 체이스에게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결정한 일이다.

정말 쓸데없고 방법도 잘못된 충성심을 지닌 세 세작들, 특히 노란 울새는 이왕 이렇게 된 것 뭐 하나라도 더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몇 시인가. 저하께 보고하지 않으면 추적이 있을텐데."

"밤이야. 다들 잘 자더라. 배고프면 말해. 먹고 남은 돼지 있어."

에우리아는 체이스의 추적이 있으리라는 거짓말에는 신경쓰지 않은채 이렇게 대답했다. 정신 잃은 세작들에게 슬립까지 걸었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였다.

"이곳은 어디지. 누가 지내던 곳인가."

"동굴. 죽은 사람."

너희들이 찾은 걸 왜 나한테 물어, 하고 중얼거리는 에우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종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느낀 노란 울새가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 떼며 말했다.

"우리는 '제온'을 추적하고 있었다. 협력한다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우리아의 눈이, 세작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잠시 빛났다.

제온.

칼리안을 습격한 단체의 이름임을 알아들었다.

지금 노란 울새는 에우리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거래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에우리아가 궁금해 할 만한 정보, 하지만 비밀은 아닌 것을 슬쩍 흘려가며 에우리아의 흥미를 끌도록. 그래서 서로 아는 것을 어느정도 교환하게끔.

호기심 강한 마법사 아니던가. 궁금한 것이 생긴다면 무조건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다.

"뭐하러. 됐어."

만약 에우리아가 일반적인 마법사였다면 그랬겠지만 지금 에우리아는 마법사 협회장이 아니라 정보조직의 유능한 보스로서 앉아있는 상태였다.

"보고 있는 것은 그들과 관련된 자료인가."

"어, 아마도."

그래서 이렇게 반대로, 노란 울새가 궁금해 할 정보를 슬쩍 흘렸다. 읽지도 못하면서.

다른 집기는 다 부서져 있었으나 종이만은 멀쩡하지 않았던가. 분명 중요한 자료일 것이다. 때문에 노란 울새는, 어떻게든 저것을 가져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했지만, 에우리아. 우리가 추적하던 이들과 네가 조사하던 이들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마법사들은 겁이 많아서 누구랑 손 안 잡아."

아마 이 말을 아르센이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세작들은 불신 가득한 얼굴을 했다. 노란 울새는 방금 들은 말을 거절의 의사 정도로만 잘 알아들은 뒤 다른 것을 물었다.

포박된 세작이 감시중인 에우리아를 향해 질문하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발칸의 부군단장은 어디에 있나."

"이 종이 여기서 나가면 없어질 것 같아서 심부름 갔어."

세작들이 잠들어 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굴 밖으로 종이 쪼가리 하나를 들고 나갔었다. 그러자 동굴의 경계를 벗어남과 동시에 모두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에우리아나 아르센의 공간에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동굴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까닭이다.

"동굴 전체에 '종이'에 대한 보존 결계가 걸려 있나 보더라고."

보존 마법은 두 마법사가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의 영역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이동 마법진 인근에 머무는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받고자 그들을 찾아간 참이었다. 세작 세 명과 함께 있는 에우리아보다는 에우리아와 함께 있는 세작 세 명을 걱정하면서.

어찌됐건 범상치 않은 자료임을 다시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곧 노란 울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가 고프군. 먹을 것이 있다 했던가."

"어, 잠깐만."

가볍게 대답한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 콰과과광!

동굴 밖에서 폭음과도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동굴이 우르르 울리며 바닥이 진동할 만큼의 거대한 소리. 천장에서 돌가루가 잠시 떨어져 내릴 정도로 큰 파장이었다.

물의 장막을 펼쳐 쏟아지는 돌가루와 먼지를 막은 에우리아의 눈이 사납게 바뀌어 있었다.

꼬맹이 아르센이 아직 밖에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리라.

* * *

세 명.

세 명이었다.

- 지지직!

첨예한 얼음의 끝이 갈라지는 소리가 숲을 울렸다. 조각난 얼음의 끝이 수 십, 수 백 개의 가느다란 실처럼 가지를 늘려가며 상대방의 붉은 막을 뒤덮었다.

빠르게 형태를 변경한 얼음이 서로 뒤얽히며 붉은 방어막 위를 감쌌다. 곧 아르센의 손을 따라 마력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얼음이 서로 조여들며 방어막 전체를 사방에서 압박했다. 그렇게 약화시킨 방어막 위로 네 개의 얼음창이 한꺼번에 꽂혀들어갔다.

- 콰직!

- 콰지직!

두 개의 얼음창은 방어막을 뚫지 못했고 두 개는 뚫었다.

목과 심장을 한꺼번에 뚫린 전사 한 명이 생명을 잃은 채 바닥에 무릎을 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힘 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 쿠웅!

곧 그의 머리가 바닥을 찧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아르센은 그의 죽음을 인지했으나 그가 천천히 쓰러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얼음창을 쏘아보냄과 동시에, 그의 앞에서 사라진 아르센의 신형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제 두 명.

고작 두 명인데!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라 했나."

조금 전 자신을 마주한 아르센이 건넨 말을 기억한 전사 한 명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은 그녀의 검 끝은 바닥을 향해 있었고 아르센을 바라보는 얼굴은 평온했다.

"나는 타미라. 그리고 저 쪽은 마르시타. 방금 네 놈이 영면시킨 자는 유르카다."

관심 없다.

아르센은 그저 인사를 건넸을 뿐, 상대방의 이름이 궁금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위대한 전사의 이름을 듣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죽거라."

상황이 반대로 되고 보니 이보다 더 짜증나는 일이 없었다. 스승님께서는 그래서 인사부터 건네라고 하신 걸까 하는 생각에, 아르센이 실소했다.

그와 함께, 아르센의 앞에 수십 개의 작은 창이 생성되어 타미라라 말한 대사막의 전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 쐐애액!

달빛에 반사된 얼음 결정이 푸른 잔상을 남기며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먼 발치에 있던, 마르시타라 불린 마법사의 손이 잠시 붉게 빛나며 타미라의 앞에 붉은 막을 만들어냈다.

- 타다당! 타당!

감각 없던 왼팔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보다 방금 전의 공격이 무력화된 것이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르센이 한번 더 손을 움직였다. 타미라 쪽을 향한 거대한 얼음창이 쥐를 발견한 매와 같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마법사 쪽에서 붉은 기운이 돌며 타미라에게 두 번째 보호막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마법사의 뒤에서 만들어진 얼음창 두 개가 정수리와 심장을 노린 채 떨어져내렸다. 이전에 40명이 모여 있던 놈들을 처리할 때 아르센이 한 번 썼던 수법이었다.

- 쌔액!

죽음의 선고와 같은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뼈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카앙! 캉!

대신 타미라가 던진 단검 두 자루가 마법사 쪽으로 날아간 얼음창을 쳐내는 소리가 들렸다.

한 손으로 들어올린 검으로 아르센의 창을 막고, 마법사 쪽으로 향한 얼음창을 단검으로 막아낸 것이다.

- 쐐애액!

마법사 뒤로 부서져 떨어진 얼음이 일제히 떠올라 다시 한 번 마법사를 공격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파편이 순식간에 마법사를 덮쳤다.

- 카드드득!

순간을 노린 공격이었으나,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마법사의 뒤에서 붉은 막이 잠시 빛났다. 그리고 얼음 조각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욱씬.

깊이 베인 왼쪽 어깨에서 다시 한 번 통증이 찾아왔다. 흘러내리는 피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가 역하다.

아르센의 팔을 타고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던 타미라가 검을 들어올렸다.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없던 아르센이 한번 더 몸을 이동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아르센의 신형이 상대 마법사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그 앞으로 붉은 기운이 가득한 단검 하나가 바람을 찢으며 달려들었다.

정말 놀랍게도 그것은, 마법사가 휘두른 공격이었다.

- 카득!

푸른 빛이 허공에서 잠시 일렁이며 아르센의 실드가 휘청였다.

얼굴을 굳힌 아르센의 오른손 끝이 잠시 움직이자, 실드가 단단하게 재구성됐다. 그와 동시에 아르센은 마법사의 심장 앞에 얼음의 구체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것으로 마법사의 몸을 완전히 뒤덮어버릴 심산이었다.

- 쉬이익!

구체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온 냉기가 마법사의 몸뚱이를 완전히 휘감았다. 그것을 그대로 얼리려던 찰나,

- 타아앙!

날듯이 달려온 타미라의 대검이 아르센의 실드를 강타했다.

'젠장!'

아르센이 재빨리 뒤로 몸을 빼며 조금 전 타미라가 서 있던 곳을 향해 얼음 창 여섯 개를 쏟아냈다. 무엇이든 꿰뚫을 것 같은 창 끝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타미라는,

이미 그 곳에 없었다.

- 우우웅!

텔레포트로 몸을 이동시킨 아르센을 향해, 이미 지척까지 따라붙은 타미라가 대검을 들어올렸다. 당장이라도 아르센의 몸을 양분하겠다는 듯 그녀의 손에 든 검이 진동하며 짙은 오러를 만들어냈다.

피하지 못한다.

막을 수 없다.

타미라의 입에 걸린 웃음이 보였다.

- 쉬이익!

그녀의 검이 아르센을 향해 내리쳐졌다.

검에 어린 붉은 빛이 번뜩임을 느낀 그 순간.

- 콰과과광!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괜찮습니까."

검붉은 기운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검을 든.

아르센의 목을 향해 내리떨어지는 붉은 오러를 가로막은.

타미라의 붉디 붉은 오러보다 더 붉은 눈을 지닌 이가, 자신으로 하여금 두 번이나 누군가의 앞을 막아내게 한 따까리들 중 '미친'을 담당한 마법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헤르츠 경."

그렇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칼리안의 등을 보며 아르센은 굳은 결심을 했다.

"죄송합니다."

칼리안의 동상은 녹지 않는 얼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전신 동상으로.

멋짐과 잘생김 많이 넣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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