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70화 (171/527)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 (3)

"연락은?"

왕궁 안을 오가는 작은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마중나와 있던 시녀 메를린을 향해 물었다.

얼마 전 회의에서 르메인이 언급했던, 사망했다는 하울핀 남작의 영지를 하사받게 된 새로운 남작이 인사를 올리러 왕궁을 찾아왔다. 사실 왕궁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지만 어찌됐건 휴일인 일요일이었고 왕궁에 들어오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었다. 다만 이 일을 조속히 진행하고자 했던 르메인의 뜻에 따라 이런 날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것이었다.

때문에 칼리안과 플란츠 역시 세뉴 관으로 가 짧은 대면을 했다. 그 후 칼리안은 앨런을 만난 뒤 이제 막 체르밀 궁에 도착한 참이었다.

"없었습니다, 왕자님."

"그래. 고마워."

칼리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뒤 발을 옮겼다. 아르센으로부터의 연락이 없어 걱정이 된다는 티를 더 내 보아야 좋을 것 없음을 알아서였다.

- 이동 마법진 구축은 이미 완료되었다 합니다. 협회 쪽으로도 별다른 소식은 없었습니다.

앨런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동 마법진 구축이 지연되어 둘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레이 브리센이 있는 변경백령 쪽에서 무슨 일이 있다면 이를 알려왔을 마법사 협회의 지부 쪽에서도 다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약속된 기간을 놓칠 사람이 아닌데.'

다른 이도 아니고 아르센이 아닌가.

그런 아르센이 말 없이 기한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3층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 칼리안의 시선이 조용히 발 끝을 향했다.

사실상 앨런을 제외하면 카이리스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둘이 함께 있었다. 그러니 어련히 알아서 잘 오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맞겠으나 칼리안만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중에는 칼리안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가 섞여있었으니까. 그랬으니 그 둘이 얼마나 능력이 있든 일단 마음이 놓이질 않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통신용 반지라도 들려 보낼 것을.'

이렇게 잠시 후회 섞인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 아르센 헤르츠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 우스웠던 탓이다.

그렇게 3층으로 와 방 앞에 선 칼리안은, 손을 들어 문을 열어주려는 얀의 행동을 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얀을 향해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니. 그냥 혼자 있을게."

"네, 왕자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괜찮을겁니다."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얀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계단 쪽으로 다시 발을 옮겨 멀어졌다.

- 달칵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칼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테라스로 다시 나갔다.

봄의 끝자락을 붙든 바람이 느껴졌으나, 한가롭게 그것을 감상할 시간은 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러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래서 그냥 이렇게만 물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더없이 한가로운 태도로 테라스 의자에 앉아있는, 옅은 에메랄드색 뒷통수를 향해서였다.

마차에 앉아 체르밀 궁에 들어설 때 3층 테라스의 난간 너머로 완두콩같은 저 머리꼭지를 이미 알아봤다. 어두운 밤이었으니 시력 남다른 칼리안만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얀도 물리고 혼자 방에 들어온 터였다.

칼리안의 질문에, 미동도 없이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뜨며 낮은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전서구 노릇 하러."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플란츠를 전서구로 쓸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 * *

- 똑, 똑, 똑

천장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퍼졌다. 그 정도로 조용했다.

지금 있는 곳이 숲 속의 한 바위 동굴이었던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그 안에서 입을 연 사람이 아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퍼지는 가운데, 스산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튀어나왔다.

"얌전히 가라고 보내줄 때 갔어야지."

그 옆에 있던 이가

"오늘 한 번만 더 참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협회장님."

물론 당연히 아무 일 없이,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아무 일 없이 잘 있었던 에우리아와 아르센이었다.

에우리아를 말리는 말을 꺼낸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와서 잡기에는 상황이 안좋지 않습니까."

"마법사가 언제부터 상황 보고 사람 잡았다고."

"저는 항상 봤는데요, 협회장님."

이렇게 두 마법사가 숲 속 동굴에서 이런 한가한 이야기나 나누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며칠 전, 아르센이 감자튀김을 얼렸던 그 다음 날.

그 때까지만 해도 둘의 일정은 매우 평화로웠다. 물론 맥주 네 잔 때문에 아르센의 머릿속은 그리 평화롭지 않았으나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브리센 변경백령 이곳저곳도 구경해가며 적당히 시간을 보낸 둘은 저녁이 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그레이를 찾아갔다.

그날 오기로 했던 아르센이 하루가 다 가도록 오지 않자, 괜히 생각할 시간을 달라 말하는 바람에 마지막 기회를 놓친걸까 하는 생각을 한 그레이는 애가 타다못해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 아르센 뿐 아니라 마법사협회 협회장이 함께 들어왔으니 그레이는 다른 조건을 언급할 생각도 못한 채 아르센과 손을 잡겠다는 답을 내어 놓았다.

무사히 칼리안의 부탁을 잘 수행한 아르센은 곧 마법사 협회의 지부를 찾아가 칼리안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그래.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날 밤 에우리아는 히몰리카를 딱 한 병만 마셨고, 아르센도 딱 세 잔의 맥주만 마셨다. 그레이의 수하들이 뒤를 쫓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여기까지도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적당히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난 다음날. 이제는 아르센이 자신의 일을 도울 차례가 되었음을 에우리아가 설명하던 그 시점부터 문제가 생겼다.

"여기서 하루만 가면 클램 숲이 나오는데, 그 안 어디에 살았다는 것이 마지막 목격담이랬어."

신물을 만들 수 있다 주장했던 학자. 이름도 없이 그냥 '어떤 학자'라고만 적혀있던 그가 마지막으로 발견됐다 되어 있던 곳. 그곳이 바로 국경 인근의 클램이라는 숲 속이었다.

클램 숲은 칼리안이 카이리스 이곳 저곳에 구축중인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동 마법진은 눈에 띄는 곳에 세울 수가 없었으니 그것 역시 숲 속에 세워두게 된 것이다. 덕분에 에우리아가 마법진 핑계를 대고 이 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

아르센이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클램 숲 말씀이십니까?"

"어, 거기."

대체로 에우리아의 말을 한 번에 잘 알아듣는 아르센이었으나 이번은 아니었다. 아르센이 거듭 확인이 필요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숲 속 어딘가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됐다는 사람의 흔적을 찾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지."

"그 넓은 숲에, 이제는 살아있지도 않은 사람을요."

"한 300년쯤 전 기록인데, 살아있으면 그게 사람인가."

그런 말을 이제서야 해주는 협회장님 너는 사람인가, 하는 눈빛으로 에우리아를 쳐다보던 아르센이 얼른 다시 겁대가리를 찾아왔다.

아르센을 본 에우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와줬으니까 꼬맹이 너도 갚아야지."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도운 일이라고는 같이 하루종일 돌아다녀주다가 그레이를 만나 한 두 마디를 한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이 매우 억울했지만 약속은 약속이 아닌가. 때문에 아르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감자튀김을 얼린 잘못이 있었고 에우리아는 언제든지 감자 대신 아르센을 튀길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아르센은 '에우리아와 함께 클램 숲을 들렀다 갈 예정이니 늦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전서구를 칼리안에게 다시 한 번 보냈다. 분명히, 보냈다.

그 후로 숲에 왔고, 생고생을 해가며 숲을 뒤지다 결국 일요일이 됐다.

이른 아침 새 소리에 잠을 깨어 이번에도 야생 닭 한 마리를 잡아 노릇노릇 구워먹은 뒤, 포만감 어린 하품을 하던 에우리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새집이네."

에우리아의 이 말대로 적당히 높은 나무 위에 새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보던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향해 웃어보였다.

"알 먹자."

"새알 말씀이십니까?"

아르센은 그 흔한 토끼며 사슴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익숙한 닭과 돼지만 사냥을 했다. 지금까지 괜히 야생 닭과 멧돼지만 잡아온 것이 아니었다. 아르센 나름대로의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것의 기준 안에, 야생 새의 알은 없었다.

계란도 오리알도 아닌 새알이라니.

새끼 새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것을 먹겠다니!

"새알 안됩니다, 협회장님. 카이리시스 돌아가면 제가 계란 많이 사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잘만 죽여대면서 새알은 못 건드리겠단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섬세한 감성의 마법사를 한참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던가."

그래도 아주 조금쯤 아쉬운 마음에 다시 나무 쪽을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새 둥지가 있던 나무 뒤쪽을 집중해서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 뭔가 움직이는데. 혹시 보여, 꼬맹이?"

자고로 제 눈과 귀로 보이는 것이 아니면 믿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시력 강화 마법은 아예 수련하지도 않은 에우리아였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대신해 그곳을 확인한 뒤 말했다.

"동굴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굴 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집중해서 살핀 아르센이 말을 덧붙였다.

"······ 아무래도 새들한테 새치기 당한 것 같습니다."

신나게 닭 잡아먹고 새알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에게 새치기를 당했다.

에우리아나 아르센은 앨런처럼 항상 시야를 넓혀둘 수가 없었다. 그만큼의 마나도 없었고 그것을 항상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력도 되질 못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잠시 살폈을 때에는 인근에 아무도 없었는데, 그 사이에 저 가까운 곳까지 와서 먼저 동굴에 들어선 것이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에게 여전히 뒤를 밟히고 있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된 에우리아가 곱게 웃었다.

* * *

에우리아는 돌의 흔적을 찾아 숲에 갔다.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은 '그들'을 뒤쫓았다.

에우리아가 자신을 뒤따라오던 '그들'을 죽였고,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은 그 사실을 체이스에게 알렸다.

- 마법사들을 자극하지 말고 둥지로 돌아가도록.

그 뒤 체이스로부터 이런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

에우리아, 그리고 아르센과 부딪히지 말고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라는 의미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세작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곳까지 힘들게 뒤쫓아온 이들이 하루아침에 에우리아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에우리아도 분명 '그들'의 뒤를 쫓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따라가면, 다른 단서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은 이런 욕심을 부리게 됐다.

물론 세작들은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얼마나 위험한 이들인지는 잘 알았다. 그래서 정말로 조심스럽게 둘의 뒤를 쫓았다.

얼마 후, 아르센이 브리센 변경백령에 마련된 마법사 협회 지부에서 전서구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하루 뒤에는 두 번째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첫 번째 전서구는 놓쳤으나, 두 번째 전서구는 잡았다.

- 세이렌 경이 이동 마법진 인근에서 확인할 것이 있다 합니다. 제가 함께 움직일 예정이라, 카이리시스 도착이 다소 지연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세작들은, 두 번째 편지에 적혀있는 위치로 먼저 움직였다. 혹시라도 조사 중 에우리아를 마주쳐 사망할 것을 대비해 체이스에게 미리 연락도 보냈다.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움직인 것에 대한 사죄, 그리고 자신들이 어디로 향할지를 적어서.

그 뒤에는 에우리아보다 조금 빠른 시기에, 인위적으로 입구를 닫아둔 듯한 의심스러운 동굴 하나를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조용한 움직임으로 동굴에 접근한 세작들은,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덩굴과 입구를 막아둔 돌들을 치운 뒤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 등불에 밝혀진 동굴 내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조금 안으로 들어서니,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썩거나 삭아버린 집기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온 벽을 빼곡히 채우듯 붙어 있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적힌 종이들 역시 보였다.

집기들이 썩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 종이가 멀쩡한 것을 본 세작들이 긴장한 얼굴을 하며 주변을 샅샅이 훑어나갔다.

그렇게, 생경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둘러보고 있던 그 때.

"지나가라고 했더니 여기에 와 있었네."

자박, 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또렷한 음성이 동굴 속을 메아리치다 흩어졌다.

한낮의 사신.

에우리아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새들의 귀에 내리꽂히듯 울려퍼졌다.

"······ 뒤질라고."

어두운 기운 가득한 피어가 뭉글뭉글 퍼져나와 동굴 속을 채워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