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4)
아르센의 파란 눈은 서늘한 빛을 띤다.
아르센의 눈 역시 르메인이나 란델처럼 푸른 색이지만 또 조금 달랐다. 두 왕족의 눈이 깊고 어두운 심해를 담았다면, 아르센의 눈은 어느 맑은 겨울날의 새벽 어스름을 담은 서늘한 파란 빛이었다.
그런 아르센의 눈이 앞에 서 있는 멍청이를 응시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십니까, 변경백님."
칼리안의 검 키리에. 국왕 친위대 카에라의 기사단장 렌 아드리안. 카이리스의 유일한 공작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칼리안을 따르는 기사가문 연합의 대표, 백작 아이즌 에이프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검을 다루는 이들이라는 것. 그리고 아르센의 기준 상 평범한 인간 혹은 평범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의 머리를 지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똑똑한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다.
"왜 그런 얼굴로 보기는. 왜 나를 찾았는지, 그 진위를 물었지 않나."
"방금 전에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그레이 브리센은 그냥 칼 쓰는 멍청한 생물이다. 그래도 에반보다는 조금 나은가 싶긴 한데 그래봐야 머리카락 두께 차이다.
칼리안의 둘째 형이 이들과 같은 핏줄이 정말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물론 그 머리색과 눈을 보면 틀림 없는 에반 브리센 후작의 핏줄이 맞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될 정도로, 브리센의 나머지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했다.
'원래 기사들은 다 멍청해. 꼬맹이 네 주변이 이상한거지.'
변경백의 저택 앞에서 잠시 헤어진 에우리아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기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럭저럭 똑똑하면서 검까지 잘 다루는 칼리안의 측근들이 이상한 것이지, 일반적인 기사들은 그리 똑똑하지 않았다. 어차피 검을 배워 먹고 살 수 있는데 글을 배워 무엇하고 머리를 써서 무엇하겠는가.
브리센 역시, 굳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지나치게 덩치가 큰 가문이었으니 그들의 지능을 전부 카이리스의 둘째 왕자에게 넘겨주고 마음껏 멍청해져도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이해는 한다.
때문에 아르센은 조금 전에 했다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꺼냈다.
"집이 좁고 불편하기에, 조금 넓은 터전이 있을지 둘러보려 왔다고 말입니다."
알아듣기 어려울 말도 아니었다. 칼리안의 품을 떠나 브리센과 손을 잡아도 될지 그것을 가늠해보러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예 그냥 대놓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런데 못 알아 듣는다. 아니, 적당히 알아는 들었지만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르센은 답답하다는 얼굴을 쉬이 숨기지 못해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레이가 이 정도로 머리를 못 쓰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화가 이뤄지질 않는 것은, 맞은편에 앉은 아르센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진한 술 냄새가 원인일 터였다. 한 마디로 어젯 밤 퍼마신 술이 아직 안 깬 것이다. 전날의 비 오는 밤, 술이 생각난 것이 비단 에우리아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매일 퍼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성함 뒤에 변경백 말고 조금 더 큰 것을 달 생각은 없으신지 여쭤보고 있는 겁니다, 변경백님."
그래서 아르센은 숙취 해소에 딱 좋을 만한 말을 했다. 돌려말하기도 아니고 귀족들이 나누는 고상한 언어도 아니고 그냥 직접적인 말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 말고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될 생각은 없는지에 대해서.
'경이 마음을 바꿀 것처럼. 변경백이 수도에 올 생각이 있는지 알아봐줘요. 혹시 아직도 란델 형님과 연락을 하는 상태인지 확인해주면 더 좋고.'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으니, 지금 아르센은 혼신을 담은 연기를 펼치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런 속내를 꿰뚫어보지는 못한 그레이가 가늘게 변한 눈을 하며 대꾸했다.
"조금 더 큰 것이라니······."
내가 가질 수 있는 작위 중에 변경백보다 조금 더 큰 것이라면 후작 뿐이지 않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레이가 말을 멈췄다. 갑자기 찾아와 면담을 요청한 발칸의 부군단장이,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레이가 아르센을 노려봤다.
"무슨 말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지금의 자리보다 큰 것을 원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레이는 이렇게 발뺌을 했다. 당장 아르센의 말에 반색하며 달려들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일 도와주면 후작위 주겠다던 실리케의 말에 넘어가서 카이리시스로 오던 중에 허리 부러지고, 여기로 다시 실려오셨던 것 아닙니까?"
돌려말하기를 때려치니 단어 그대로 뼈 아픈 소리가 줄줄 나온다.
"그래서 요양이나 하다가 시키는대로 하면 후작위를 넘겨주겠다는 1왕자님의 말에 또 넘어가셨던 것 같습니다만. 덕분에 남몰래 수도로 왔다가 들켜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셨고. 그러니 묻는 겁니다. 더 큰 자리에 정말로 욕심이 없으신지를."
이 말에, 그레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기는 했으나 단 두 번 카이리시스로 발을 옮겼던 것이 모두 후작위를 탐냈기 때문이 맞았으니까.
다만 아직 그것을 입 밖에 내어 인정하지는 않았으므로, 아르센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여전히 장미 향에 취해 있느라 새끼 늑대 쪽으로는 눈을 안 두시는 겁니까?"
아직 란델과 손을 잡고 있는지. 그래서 플란츠 쪽에 발을 둘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르센의 말을 들은 그레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실리케와 브리센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은 플란츠를 새끼 사자라 불렀다. 왕세자라는 날개만 얻으면 제대로 된 그리핀이 될 새끼 사자.
그리핀이란 그리핀을 가문의 문장으로 쓰고 있는 브리센을 뜻했으니, 사람들의 이 말은 플란츠가 세자위를 받으면 브리센 가문에 무한한 힘을 안겨 줄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리라는 기대 혹은 조롱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리케가 실각하고 브리센이 휘청이게 되면서, 왕궁에 홀로 남은 플란츠는 더 이상 그렇게 불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에반 브리센과 손을 잡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상호 이득을 위한 관계일 뿐. 실리케라는 매개체가 없는 플란츠를 브리센의 온전한 꼭두각시로 부리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귀족들의 평가였다.
브리센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에 더불어, 오히려 에반 브리센이 플란츠에게 휘둘린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 혼자서도 제 살 길을 제대로 찾을 줄 아는 맹수라는 의미를 담은 새로운 별명이 생긴 것이다.
"새끼 늑대라니."
늑대, 라고.
간혹 대사막의 전사들을 늑대라 칭하는 것을 안다. 스스로가 '늑대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지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레이가 말한 늑대가 대사막의 늑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플란츠를 지칭한다는 것은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네놈이 3왕자의 최측근임을 내가 모르지 않는데, 어째서 새끼 늑대를······."
"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지."
입에 담기만 해도 뱃속이 허하고 허리가 아린 이름, 3왕자 칼리안. 그 칼리안이 수족처럼 부리는 것이 아르센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아르센이 말한 것은 칼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것을 묻는데 아르센이 그레이의 말을 잘랐다.
"지금 상황에서 올라갈 곳 없기로는 변경백님이나 저나 같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수도에서 후작 소리 들으며 흥청망청 사는 것이 그레이의 목표임을 아르센이 잘 안다. 사실 그것이 누구든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란델이 어떻게 그레이를 이용해먹을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에반 브리센 후작은 소드마스터다.
모르긴 몰라도 긴긴 세월 무병장수 할 것이라는 소리다. 에반이 살아있는 한 그레이는 절대로 후작이 되지 못한다. 운이 좋으면 그레이의 아들이 후작위에 오를까 말까. 절대로 그레이에게 순서가 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분께서 카밀론에 가시면, 제 앞길은 여기서 막힙니다."
칼리안이 세자위에 오르면 평생이 가도 발칸의 군단장은 앨런의 것이다. 안 그래도 강한데다 남들보다 나이 먹는 것까지 느리니, 아르센이 부군단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레이가 후작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지금 아르센의 말은, 그레이나 아르센이나 같은 처지라는 소리였다. 오래오래 사는 윗사람 덕에 평생 2인자 자리나 하기는 싫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변경백님과 제가 손을 잡으면 도와주게 되는 쪽은 저 아닙니까. 그러니 같은 처지에 같은 술 좀 마시자는데, 왜 그렇게 경계를 하십니까."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플란츠의 것과 완벽히 똑같은 비웃음을 만들어다 붙였다. 언젠가 칼리안이 그랬던 것처럼.
"아······ 허리 부러져봐서 무서우신가. 아니면 찢어진 것 때문에 무서우신가. 어느 쪽입니까."
사람 심기 비트는 데에는 플란츠의 비웃음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칼리안만큼 잘 아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그레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더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아르센이 알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당시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있었던 탓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져봤던 기대가 일순 무너져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의 말이 이어졌다.
"마법사들 움직이면 소드마스터 한 명 사라지는 것쯤은 일도 아닐텐데, 뭐가 그리 무서우신지 몰라도 몸 사리는 것은 그만하고 제대로 대화나 해보시죠."
그것은 협박이기도, 자신의 힘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플란츠 왕자를 제대로 지지해서 세자위에 올릴 만한 힘이 있다는 것. 에반의 목 없애버리는 것쯤은 쉬운 일이라는 것. 그레이에게 있어 누구보다 든든한 동맹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말이었다.
"그렇게 강한데 왜 굳이 나와 손을 잡는지 모르겠군."
"쓸모가 있는 것은 변경백님이 아니라 브리센이라는 이름입니다."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아르센이 다시 한번 플란츠식 비웃음을 입에 걸었다.
"저도 넓은 품에 들어가서 안락한 생활을 누려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변경백님께서는 후작 위에 올라서 제 뒷배경 노릇이나 해주시면 되는 일입니다. 어려울 것 없을 것 같습니다만."
거기까지 들은 그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에반을 죽이고 후작 작위를 줄 테니 플란츠를 왕세자위에 앉힌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라는 소리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듣자듣자 하니 네 놈이 참 건방지게 구는구나."
여기에서 밀리면 만약 아르센과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아르센이 말하는 것처럼 뒷방에 처박혀 지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나눠 가질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르센에게 밀리면 안되는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것을 보는 아르센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변방에서 숨죽이고 사시느라 잊으신 듯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기가 몰아쳤다.
아르센과 그레이의 사이에 놓인 탁자에 새하얗게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새하얀 실 같은 얼음의 가닥을 사방으로 펼쳐나갔다.
- 쩌적, 쩌적.
매우 불안한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워가며 값비싼 테이블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 가닥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테이블 다리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과 찻주전자를 모조리 얼렸다.
똑같은 한기가 어린 목소리가 그레이의 귀를 찌르듯 흘러나왔다.
"저는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변경백님."
그렇게 말한 아르센이 손가락 하나를 펼쳐 그레이의 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으로 찻잔의 끝을 툭 건드렸다.
- 와장창!
테이블이 부서졌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테이블, 얼어붙어있던 찻잔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흩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센이 다시 한번 그레이를 쳐다봤다. 어느새 세뉴강같이 고요하게 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번만 더 그딴 소리 하시면, 안 참습니다. 저는 손을 잡자고 온 것이지 누구 따까리 하겠다고 온 것 아니라서요."
물론 그 내용까지 고요하지는 않았다.
* * *
또 한 번 살기가 피어 올랐다.
누가 칼리안의 검이 아니랄까봐. 이번에도 여지 없이 저렇게 살기가 피어오른다.
다만 이번의 플란츠는 '그만' 이라고 말하는 대신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을 보며 똑같은 기운을 내보냈다.
살기.
단 한 번도 제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혀본 적 없었으나, 반드시 살인을 해보아야 살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칼리안의 것처럼 극한에 닿은 공포감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키리에의 것처럼 노골적인 살의를 담은 것도 아니었으나, 예리하고 날카롭게 심장을 찔러오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키리에를 향했다.
멀찍이 수련장 벽에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칼리안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오늘도, 제법.'
지는 것을 확실히 싫어한다.
배우는 것이 확실히 빠르다.
- 카아앙!
살짝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검을 내뻗자 플란츠를 향해 달려들던 키리에의 검이 막혔다.
뭉클, 하고 키리에의 살기가 한층 더 짙어진다. 플란츠는 날카롭게 잠겨든 눈으로 그런 키리에의 검 끝을 쳐다봤다.
곧 키리에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플란츠는 이번에도 제 자리에 멈춰 선 채 키리에의 움직임을 눈으로 잠시 좇았다. 그리고 발을 박찼다.
키리에의 검은 플란츠의 것보다 가볍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빨랐다.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올려치듯 막은 키리에가, 튕겨올라간 검을 회수하기 직전인 플란츠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플란츠는 그것을 보기도 전에 이미 몸을 한 발자국 뒤로 물렸다.
키리에의 검이 어떤 움직임을 가지는지 이미 파악했으니, 틈새를 노릴 것임을 예상하고 미리 피한 것이다.
- 타앗!
그 사이 검을 회수한 플란츠가 앞으로 도약하며 키리에를 향한 긴 곡선을 그려냈다.
'부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 카앙!
높이 도약하여 떨어지는 힘까지 모두 실어낸 플란츠의 검이 키리에에게 막혔다. 실려있는 힘이 이전에 비해 많이 묵직해졌는지, 키리에의 검이 살짝 뒤로 밀렸다. 키리에는 버티지 않고 검을 내려 플란츠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자칫 중심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플란츠는 검이 미끄러지는 궤적을 따라 몸을 함께 회전시키며 다시 한번 공격을 가했다.
- 카강! 카아앙!
흥미로운 볼거리를 찾았다는 정도의 얼굴을 한 칼리안을 무시한 채로 둘의 공방이 계속됐다.
무게를 실은 공격을 어떤 식으로 흘려내는지, 속도를 가한 공격을 어떻게 되받아치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키리에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플란츠의 검을 막고 다시 공격했다.
확실히 키리에는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빠른 검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 있어 가장 적합한 대련 상대였다.
다만 지나치게 살기등등하여 칼리안이 있을 때에만 대련이 가능했으나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실전에서는 모두가 목숨을 내어놓고 검을 들지 않던가.
- 카앙! 카가강!
플란츠의 허리로 내뻗은 검을 비틀어 올려치자, 급하게 검의 경로를 튼 플란츠가 그것을 막아냈다. 검 끝을 아래로 내린 채 가까스로 막아낸 공격에 플란츠의 눈이 사나운 빛을 냈다.
진짜, 죽일 셈이군.
이제는 숨길 필요 없는 살기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몰아치며 키리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키리에가 다시 한 번 바닥을 박찼다. 플란츠 역시 그것을 마주보며 검을 내질렀다.
- 사아아······!
그와 동시에.
키리에에게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사방이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방금 전까지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칼리안과의 대련에서 일깨웠던 감각이 한 번 더 확장됐다.
검만큼 머리를 쓰고 있는 저 상대가 앞으로 어디로 올지, 검을 휘두를지 찌를지 내리칠지, 그 후에는 어떻게 움직일지. 마치 하나의 궤적이 그려지는 것처럼. 그 순서가 그려지는 것처럼.
'어디를 베어야 할지.'
어디를 얼만큼 베어야 상대방이 죽을지.
그것을 누군가 알려주는 것처럼.
사방이 온통 흑백으로 바뀐 듯한 그 공간에, 붉은 혈선 하나가 눈 앞에 그려진다. 저 곳을 베어내는 것이 정답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키리에는 바로 그 혈선을 따라 검을 움직였다.
키리에의 검이 일순간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 쌔애액!
형태를 잊은 검이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 카아아앙!
그 어느때보다 날카로운 소리가 수련장 안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뒤에야 키리에가 앞을 쳐다봤다. 붉은 혈선을 향해 내리그었던 검 끝이 어디를 향했는지 알게 됐다.
키리에의 앞에 플란츠가 서 있었다.
검과, 검이 맞닿아 있었다.
"축하해. 키리에."
검과, 플란츠의 심장 사이를 검붉은 기운을 가득 담은 검이 막고 있었다.
멀찍이서 둘의 대련을 보고 있던 칼리안이 어느새 플란츠의 앞을 막아선 채로. 그렇게 키리에의 검을 막아선 채로.
"그런데 내 형님 심장은 안 돼."
또 한 번의 성장을 한 키리에를 축하하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