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63화 (164/527)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1)

비 오는 밤.

달은 분명 밝을 터였다. 다만 대지와 하늘 사이를 가린 저 먹구름에 가려 제 빛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안다.

언제나와 같이 밝을 것이 분명한 달조차 보이지 않는 비 오는 밤이란 또 얼마나 운치있는지. 그러니 분명 누구든 그 비 오는 밤이 참 기껍다 느껴지던 어느 날이 한 번 쯤은 꼭 있으리라.

물론 지금 잠자리를 마련한 곳이 야외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야외만 아니라면 기꺼웠을 터였다. 비와 함께 흘러내리는 어울리지도 않을 감수성에 마음껏 젖어든 채, 맥주든 혹은 카이리스에서 가장 독하기로 이름난 히몰리카든 아니면 무엇이어도 좋을 한 잔의 술을 손에 들고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애진작에 때려친 다른 속성의 마법에 대한 씁쓸한 추억이나 한 점 되새겨 보았을 터였다.

- 그 때 태워먹은 집이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았겠구나······. 하, 세월이란 어찌나 허망한지.

따위의 되새김 말이다.

"도무지 그칠 생각을 안 하네."

봄을 보내기 위한 비일지 아니면 여름을 부르기 위한 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계속 비가 내렸다.

하지만 당장은 감상에 젖어들 수 있을 창문도 없었고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줄 지붕도 없었다. 지금 있는 곳이 따뜻한 실내가 아니라는 사실도 불만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손에 들릴 술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불만이었다.

"아. 술 마시고 싶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한 마디를 꺼내드는 것으로 불만을 조금 털어냈다.

- 타닥, 타닥.

마치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내어놓듯.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티 하나가 허공으로 비산하다 어느새 꺼져 사라졌다. 가망 없는 희망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처럼. 그래서 에우리아는 더욱 커진 불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빛이 사라진 곳을 좇았다.

곧 에우리아의 시선이 먼 하늘을 향했다.

"나도 참 사서 고생이지."

그 말 그대로였다.

동행하고 있는 아르센이야 칼리안의 명 때문에 가야 할 길이라지만 에우리아는 아니었다. 심지어 칼리안은 에우리아가 이곳에 왜 왔는지 그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있지 않나. 그러니 남들 몰래 핑계를 대가며 이 자리까지 온 것은 그저 에우리아 스스로가 자처한 고생이 맞았다.

"알고는 계셔서 다행입니다."

누군가가 에우리아의 말에 말대꾸를 했다. 당연하겠지만 아르센이었다.

"여기 이렇게 사지도 않은 고생 하는 사람도 있으니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십시오."

녹지 않을 얼음막을 만들어 지붕 삼고 비에 젖은 땅과 장작을 마법으로 말리고 쉬이 꺼지지 않을 불꽃을 일으켜 장작에 붙였다.

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부려지는 아르센이 혼자 했다. 그러니 불만이 잔뜩 쌓여 있을 밖에.

"뭐, 그럼 내가 해?"

아르센의 말을 들은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내가 너보다 더 세고 내가 너보다 더 감성적인데. 왜 그걸 내가 하냐. 내리는 비 감상하기도 바쁜데.

"그나저나 저 짹짹이들은 이 빗속에 밥은 챙겨 먹고 다니나 모르겠네."

에우리아가 모닥불에서 튀어오르는 불티들을 계속 눈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인근까지 마나를 확장시켜 체이스의 세작들이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본 뒤였다.

"밥이라도 챙겨주시려고 그러십니까?"

"겁대가리."

"네 다시 찾아왔습니다."

뭐 한 마디 할 틈을 안 준다.

가히 학살이라 해야 할 광경을 자아내며 마흔 명을 나란히 저승길로 보내더니 어울리지 않게 남의 끼니 걱정이나 하고 있는 에우리아를 슬쩍 쳐다본 아르센이 물었다.

"놈들이 왜 따라붙는 것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어 몰라."

그렇게 대답한 에우리아가 약간의 화를 담아 입을 열었다.

"하루만 더 따라오면 다 잡아버려야지."

새들이 따라붙는 것을 알고 이리저리 경로를 바꿔가며 오는 통에 일정만 지연됐다. 덕분에 비 오는 날 술도 못마신다. 그러니 화가 나겠나 안 나겠나.

그 말에 사지도 않은 고생에 이제는 도가 튼 아르센이 열심히 멧돼지 고기를 뒤집어 익혔다. 혹시라도 새 대신 파란 머리 마법사 잡으려 들까봐서였다.

고기는 씹는 맛이 제일이라는 에우리아의 말 때문에 안그래도 근육질 가득한데 두툼하게 썰기까지 한 고기가 쉬이 익지 않았다. 심지어 고기는 익히는 사람의 정성만큼 맛있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은근슬쩍 마법으로 익히려던 것까지 포기했다.

그래서 멍한 눈으로 고기가 느릿느릿 익어가는 것을 보던 아르센이 화제를 바꾸려 다른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왕자님께는 정말 알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지금 어디로 왜 가시는지요."

"위험하니까 너는 꺼져있으라고 예쁘게 말씀하실 것 뻔한데 뭐하러."

물론 예의범절 중시하는 칼리안은 그렇게 말 한 적 없었다. 그냥 의미가 그렇다는 소리다.

아무튼 에우리아는 칼리안이 지닌 검은 빛의 돌에 대해 조사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명의 학자가 '신물을 만들 수 있다' 주장한 기록을 보았고 그 자가 마지막으로 살았다고 알려진 연구실에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칼리안을 습격했던 단체의 놈들을 만났다. 그래서 다 죽였다. 그 뒤로 따라 붙은 것은 재밌게도 놈들이 아니라 체이스의 새들이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지금 놈들도 죽여버릴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도 같은 것을 조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고기 탄다."

말을 돌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 탔다.

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에우리아는 고기만 걱정했다. 관심 두는 것 외에는 눈 돌리지 않는 소신있는 모습. 이 얼마나 실력있는 마법사다운 면이란 말인가.

멧돼지 잡아 왔을 때의 마음을 담아 정확히 열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고기를 서둘러 뒤적거린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그 왕세자가 왜 우리 왕자님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알 수가 없어.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잘 지내보려 도와주는 것 아닐까 싶다가도 도와주는 티도 안 내는 걸 보면 그도 아닌 것 같고."

일반적으로 대가를 바라고 도움을 줄 땐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중에 이 정도는 해라' 하고 티를 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체이스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에우리아가 이상하다 여기는 것이었다.

"티내는 것 하나 없이 그냥 신경을 써. 심지어 마나실 백작님은 그걸 당연하게 여긴단 말이지."

"군단장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아르센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은 왕자님을 도와 마땅하다고 여기는 분이 바로 마나실 군단장님 아닙니까. 그러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체이스의 도움을 그 칼리안이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사소한 것 하나 대가 없이 받지 않는 것이 칼리안 아닌가. 그런데 체이스의 도움만은 주섬주섬 잘도 받았다.

"그런 왕자님이 도움을 그냥 받았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속 모를 도움 받으시는 분 아니니 그냥 두십시오."

아르피아 궁 앞에서 마주했던 체이스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다시 한 번 고기를 뒤적거렸다.

궁금한 것 못 참는 마법사가 이렇게 말을 한다. 다 이유가 있을테니 그냥 믿고 넘기라고.

놈들과의 두 번째 싸움이 있던 날. 체이스에게 앨런을 보내고 칼리안에게 기사 테일란을 보냈던 둘을 생각한 에우리아가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오므려 닫았다.

"그나저나, 협회장님 혼자 가시기에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칼리안에게 그리 큰 해를 입힌 것은 소드마스터에 가까운 검술을 지닌 이였다고 했다. 상대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음에도 칼리안이 당했다는 뜻이다. 만약 지금 에우리아가 쫓아가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라도 그런 실력을 지닌 이가 있다면 에우리아 역시 안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너 데리고 갈 거잖아."

아르센은 그래도 꽤 여러번 칼리안과 대련을 했다. 게다가 그 동안 상대해왔던 이들도 대체로 검을 쓰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움직임 빠르고 제대로 검술 사용할 줄 아는 기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아르센이 나을 때가 많았다.

이미 자신을 데리고 목적지로 갈 생각을 했다는 말에 아르센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할 일 있습니다."

"어. 거기 나도 같이 가려고. 나도 도와줄테니까 꼬맹이 너도 도우면 되겠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변경백령의 불빛을 보며 아르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변경백령에도 할 일 있지만 발칸에도 일이 쌓였을 겁니다. 놈들 분명히 제멋대로 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플란츠 부군단장님이 제 일 도와줄 위인도 아니고 말입니다. 게다가 수도에 노는 마법사 많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에우리아는 화를 내는 대신 곱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르센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한 마디를 꺼냈다.

"이동 마법진 거의 다 완성되고 있어. 도와주면 태워줄게."

이동 마법진 따위로 꼬시려 들다니.

아무리 이동 마법진을 한 번도 이용해본 적 없다지만 사람을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니냔 말이다.

이런 생각에 아르센이 다 익은 고기가 가지런히 놓인 접시를 에우리아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협회장님. 저만 믿으십시오."

이것 참.

마법사들이란.

* * *

칼리안은 늘 그랬다.

굳이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미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칼리안이 베른을 꺼내든 날에는 검을 집어넣는다는 것을. 늘 그랬다는 것을 플란츠는 알고 있었다.

"형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빌헬름."

그래서 플란츠는 계단을 모두 올라온 뒤 헤이시아 궁을 나서려다 말고 물어오는 칼리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한 바퀴 하고도 절반은 더 돌아버린 것 같은 또 다른 부군단장이 남겨놓고 간 일을 처리해야 했던 탓도 있었고 체르밀로 돌아가면 그 어두운 방에서 또 생각이 이어질 것 같아서였기도 했다.

그렇게 할 일이 끝나고 나면 수련장에 가서 키리에를 붙들어 볼까.

어쩐지 오늘이라면 살기등등한 그 검을 제대로 받아봐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이 가시죠, 빌헬름 관. 훈련장으로."

대련을 하자는 소리였다.

무슨 생각인지 묻는 눈으로 쳐다보니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쯤 전하께서 체르밀에 계실 겁니다. 오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마주치기에는, 죄송하지만 조금 피곤하네요."

르메인이 온다는 이야기는 당연하겠지만 플란츠 역시 들었다. 다만 란델을 만나러 온다 했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피곤하다면서 대련을 하자니."

르메인을 마주치기엔 피곤해서 대련을 하자는 말이 앞 뒤가 안맞는다. 하여튼 거짓말을 할 줄 알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운 놈이다.

그렇게 되나, 하고 피식 웃은 칼리안이 다시 대답했다.

"사실 딱히 갈 곳도 없고요. 이런 꼴로 어딜 가면 전부 걱정을 해서."

얀에게 가면 얀이 걱정을 하고 앨런에게 가면 앨런이 걱정을 한다. 심지어 레이븐까지 걱정을 하니 숲에도 못 간단다.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흰 고양이를 안고 다니면서도 당당하게 검은 옷만 입는 놈 아니던가. 물에 들어갔다 나온 꼬락서니는 놈의 주문 한 마디면 곧바로 멀쩡하게 바뀌는 것을 안다.

그러니 지금 저 말은 어줍잖게 둘러대는 두 번째 핑계일 터였다. 제 걱정 해 줄 사람 가득한 이 궁 안에서 아무도 걱정 안 해줄 플란츠가 신경쓰여서.

"······ 내 아우님께선 마음이 어찌나 넓으신지."

"그것을 이제야 아셨습니까. 똑똑하신 만큼 눈치도 빠르신 줄 알았는데요."

"짖지, 또."

한 소리를 했더니 한 술을 더 뜬다. 조금 전 시간의 축을 보던 그 표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을 향해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 하."

더는 할 말도 없어진 플란츠가 이렇게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던지."

결국 또 이렇게 칼리안이 하자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로 동생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있겠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감추려던 것을 굳이 들춰내 헤집어 놓은 것은 플란츠인데 정작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칼리안이다. 그것을 플란츠도 알고 있으니 짜증나는 것을 참아 줄 밖에.

이런 플란츠를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뒤로 돌아 헤이시아 궁 밖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시 멈췄다.

방금 전 걸어나온 시스파니안의 방 안에서 무언가 느껴진 까닭이다. 곁을 돌아보니 플란츠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지키던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기운을 오로지 칼리안만 느끼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만. 먼저 가시겠습니까."

"왜."

"만나러 가려 했더니 찾아오셨네요. 아무래도 저를 부르시는 것 같은데······."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느낀 것임을 눈치챈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더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헤이시아의 주인 말입니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어졌고, 칼리안의 입에는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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