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지금이었다면 (6)
두 번째로 찾은 시스파니안의 공간은 한층 서글프다.
괜스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동행한 이가 달라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칼리안은 잠시 앨런을 생각하려 애썼다.
"이곳입니다."
그리고 뒤따르던 플란츠를 향해 이런 당연한 사실을 담백하게 입에 올린 뒤 뚜벅 뚜벅 걸어가 시간의 축 파편 앞에 섰다. 말 없이 걸어 온 플란츠가 칼리안의 옆에서 발을 멈췄다.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잠시 축의 파편을 훑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돌린 칼리안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베른.
이제는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유일하게 온전한 기억. 그것을 담아두었던 깊은 곳의 창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평생을 돌아서 살았던, 지키며 살고 지키려 싸웠던, 끝내 지키지 못하고 죽었던 베른이 되어 눈을 떴다.
그 눈으로 앞에 놓인 황금빛의 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시간의 축."
그것이 칼리안에게 그리고 플란츠에게 독이 될지. 아니면 약이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채로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본래 세크리티아에 있었고 '지금'의 시간대에도 작년까지는 세크리티아에 온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라졌다 들었습니다만 얼마 전 이 곳에서 이렇게 일부분만 남은 채 발견됐습니다."
문득 꺼내놓는 누군가의 옛날 이야기처럼, 오늘 아침에 들은 부풀려진 경험담처럼, 꽤 그럴싸한 책 속의 설화처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이 이어졌다.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물건입니다. 신물이 아닐까 여겼으나 정확히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베른이 어울리지 않을 붉은 눈을 돌려 플란츠를 향해 섰다. 그런 상태로 다시 입을 열었다. 원망은 아니었지만 조금쯤 궁금해하는 얼굴을 한 채였다.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을.
"어느 날 이것을 사이에 두고 세크리티아와 카이리스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베른과 체이스가 플란츠로부터 이것을 지키려 했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말해서 상처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누군가가 겪었던,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참극이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저 두 나라의 전쟁일 뿐이다. 원인도 결과도 분명한 단순한 전쟁. 언제나 있어왔던 그런 전쟁 말이다.
누군가는 이겼고 누군가는 패했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단지 그 뿐임을 지금의 베른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플란츠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도록 단어를 골랐다. 그것이 베른이 내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식 같기도 혹은 자조어린 비웃음같기도 한 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플란츠는 똑똑했다.
베른이 내어준 배려를 무시하고 굳이 한 발 가까운 곳까지 걸어와 베른의 말을 들었다. 언젠가의 플란츠가 저것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음을,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참상을 겪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고작."
이 곳에 숨겨진 것.
플란츠가 함께 알고 있기를 종용한 비밀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 그것까지는 플란츠도 가늠해내지 못했을 터였다.
"고작 저것을 빼앗자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흔들린다.
플란츠는 이곳에 숨겨진 것이 베른의 비밀과 관련된 어떤 물건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칼리안이 꾹꾹 눌러담고 있는 베른의 일들에 대해 함께 알고자 했으리라고. 베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베른의 죽음과 세크리티아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야기한 원인을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네. 고작 이것을."
이렇게 대꾸한 베른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숨을 쉰다. 플란츠 역시 숨을 쉬고 있으니 둘 모두 아직은 살만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랜 생각을 하도록 두느니 다른 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사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매 한 마리의 발목에 묶인 편지에 쓰여 있더군요.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을 달라고. 이유조차 제대로 적혀있지 않은 요구였고,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베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는 짧은 서신이었다. 그것을 돌이켜보니 지극히 플란츠다운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말 귀찮아하는 플란츠라면 그런 편지를 보내고도 남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탓에, 잠깐 웃었다.
참 아프게도 웃었다.
처음으로 앨런에게 베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날. 앨런은 '시간의 축과 관련된 일로 체이스와 베른 모두 나를 찾았으니 둘이 형제는 형제인가보다'라고 말했었다.
그 때 꺼내졌던 앨런의 말에 지어보였던 것 같이 비슷하지만 또 많이 다른 의미가 담긴 아픈 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었다면. 당신의 그 짧은 말을 내가 알아봤을까."
지금이었다면, 미친 왕이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한다 여기기 전에 무슨 마음으로 편지를 썼을지 알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글자로 적히지 않은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뭐 어쨌거나 이미 늦었으니까. 그건 됐고. 아무튼."
편지 내용을 다시 떠올려 곱씹어보지는 않았다.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봐. 그것이 우습고 무서워서.
말 없이 서 있는 플란츠에게서 축의 파편으로 시선을 돌린 베른이 고리의 테두리에 적힌 알 수 없는 문자를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새를 되돌려보낸 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란츠의 고개가 베른을 향해 돌아왔다. 베른은 말 없이 잠시 서 있었고 플란츠가 말했다.
"그건. 이상한데."
확실히 이상하다.
카이리시스와 세크리티아는 그 정도로 가깝지 않다. 그런데 새가 다시 날아가고 한 달이 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지다니.
"당신도 이상하다 여기는데. 우리는 오죽했을까."
그 예고 없는 전쟁 앞에서 오죽 놀라고 오죽 당황하고 오죽 절망했을까 라는 말 대신, 베른은 그냥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농담처럼 가볍게 대꾸했다.
"카이리시스에서 세크리티아까지 거리가 있는데도, 그렇게나 빨리 왔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다.
국경 인근에서 수많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 많은 군인이 국경을 향해 다가오는데 수많은 세작들은 그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그들이 세크리티아를 배반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 있을 내용은 아니었다. 베른이 기억하는 한 그들은 충성스러운 새들일 뿐이었으니까.
"새들이 다 죽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비밀리에 준비를 해 두었을 수도 있고."
세작들의 배반, 세작들의 죽음, 혹은 이동 마법진, 등등.
이제와서는 가정들일 뿐이지만 세작들이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전달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있다 한들 이미 많은 것이 틀어져 소용 없는 상태가 아닌가.
베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발발했습니다."
당시에는 더더욱 그랬다. 무슨 이유였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군대를 확인했을 땐 이미 너무 늦었고 더 많은 것을 확인하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났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대로 발칸은 강했으니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영지는 건드리지도 않고 곧장 세크레타로 진입하더군요. 좀 쉬엄쉬엄 왔어도 좋았을 것을 어찌나 한결같은지."
그 말의 끝에 베른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때 베른이 플란츠를 향해 얼마나 많은 욕을 했는지 플란츠는 죽어도 모를 거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단이 전멸했습니다.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스승님, 기사 테일란 카스트린. 그가 발칸의 진입을 사흘 미뤘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마지막 준비를 했고 나를 뺀 모두가······ 죽었습니다. 나도 꽤 오래 버텼는데 밤이 몇 번 갔는지 아침이 몇 번 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아마 스승님께 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 발칸의 군단장이라는 이가 나섰고."
이름 물어보더니 공격하던 미친 마법사 한 명을 떠올린 베른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결과는 이미 아시는대로, 이렇게."
그렇게 말한 베른이 자신의 몸을 툭 쳐 보였다.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됐다.
그런 의미를 담은 채였다.
거기까지가 베른의 기억이었다. 굳이 그날 본 플란츠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확실한 독일 뿐이니 입 밖으로 꺼낼 이유가 없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베른이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한껏 흐트러진 기억을 다시 보듬었다. 손에 모인 것을 그러모아 칼리안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다시 두었다.
그렇게 추스른 뒤 다시 칼리안으로 되돌아와 눈을 떴다.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는 플란츠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안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씀드렸듯이 시간은 한 번 밖에 되돌리지 못한다 하였고 제가 온 그 날에 세크리티아에 온전히 있던 시간의 축도 사라졌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이렇게 다시 찾게 됐네요. 두 번 다시는 못 쓰도록 부숴버리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칼리안이 발을 뻗어 눈 앞의 허공에 발 끝을 몇 번 가져다 댔다. 툭툭 하고 무언가에 발이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원망도 화풀이도 못하게 되어서 곤란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플란츠가 원망하라고 기껏 내어줬던 자리를 굳이 마다하고 욕만 했던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의 모든 말을 들은 플란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런 감상도 들어있지 않은 말이었으므로 칼리안이 묘한 미소를 띄워올리며 말했다.
"모으신다면 사용하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기억이 돌아오게 되면 시간의 축을 다시 원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플란츠가 가장 후회하는 것들을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고, 만약 '과거'의 플란츠가 그것을 원했던 이유를 기억해내면 다시 되돌리고 싶어질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다.
"말 끝나니 바로 짖네."
플란츠가 곧바로 대꾸했다.
"어떻게 해야 없어지는데."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며 물었다.
그것이 더는 기회도 아니며 축복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없애버릴 방법을 알려달라는 의미였다.
"아직이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시스파니안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시스파니안을 만난다는 말에 플란츠의 눈이 다시 가늘게 변했으나 칼리안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베른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 했지 칼리안에 대한 것까지 털어놓겠다고는 안 했다.
"일단 급한 것 먼저 해결해놓고 가려고요."
'급한 것'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자신임을 잘 알고 있는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곧 칼리안이 석벽의 조각들을 한 번 쭉 둘러본 뒤 계단 쪽으로 발을 돌렸다.
"잠깐만."
그런 칼리안의 발걸음을 플란츠가 불러세웠다.
아직 물어볼 것이 있었다.
이제 막 나가려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네 이름. 뭔데."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로 고개를 되돌린 뒤 밖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쳐다봤다. 베른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말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냥 잠시 멍해져서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억하는 것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알려달라고."
이왕이면 연세도 같이 알려주면 좋고.
플란츠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선 채로 가만히 있던 칼리안이 웃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한, 속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속에 담아 둔 베른을 다 꺼내 보여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입니다, 형님."
그리고는 남은 감정 다 씻어낼 비 맞으러 곧은 걸음을 뗐다.
이번에도 연세는 알려주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