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61화 (162/527)

제27장. 지금이었다면 (5)

잿빛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로 날아왔다.

그리 특별할 것 없을 외형을 가진 비둘기의 부리가 톡톡 하고 창문을 쪼았다.

오래지 않아 창문이 열리며 햇빛에 그을리고 굳은살 가득한 손이 조심스레 새를 감싸잡았다. 신기하게도 새는 도망가지 않고 얌전히 그 손에 잡혀들었다.

부작용이 크고 그 성격이 잔인한 흑마법은 카이리스의 초대 왕비 시스파니안의 의지에 따라 대륙에서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만 흑마법 중 하나인 '테이밍'만은 위험요소를 배제한 일반 마법으로 변형 개선된 뒤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사용이 허락되고 있었다.

지금 막 창문을 두드렸던 새에게 바로 그 마법이 걸려 있었다. 주인의 위치를 인지하거나 날아가야 할 곳의 좌표를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전서구인 것이다.

"조금 늦었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날아온 전서구를 안아든 기사가 응접실로 들어가자, 차 한 잔을 들고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이가 이렇게 말했다.

밤새 무슨 고민을 그리 했는지 몰라도 새벽이 되어 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뒤인지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청은발에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는 여정을 함께 할 수행원에 시종과 시녀를 한 명도 포함하지 않았다. 기사는 자신의 주인이 시종들을 왜 데려가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짐작을 했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닐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짧게 잘라버린 그의 머리카락을 잠시 쳐다보던 기사 테일란이 대답했다.

"날이 좋지 않아 도착이 늦어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새가 날기에 좋지 않은 날씨이기는 했다. 그들 역시 이렇게 전날 밤부터 내렸던 비 때문에 세크리티아로 돌아가던 발이 잠시 묶였으니 말이다.

"하긴 그렇지."

그렇게 대답한 체이스가 손을 내밀자, 테일란이 전서구의 다리에 묶여 있던 편지를 건넸다. 곧 보랏빛 눈으로 편지에 적힌 내용을 스치듯 읽어낸 체이스가 테이블에 놓인 향초의 불에 쪽지를 태웠다.

- 한낮의 사신, 늑대 사냥꾼, 둥지 떠남. 새끼 그리핀 혹은 방울뱀 소굴 방향. 말쥐 심부름꾼 40마리 떨어뜨림. 말쥐 발자국 없음.

그것이 언제든 짙은 먹구름을 불러와 죽음을 선고하는 에우리아. 스승과 함께 대사막을 누비다 충돌했던 대사막의 전사들을 학살한 아르센. 세크리티아 세작들이 그들 나름의 존중을 담아 지어 준 별명이었는데, 그 이름들이 이 쪽지에 담겨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쪽지는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카이리시스를 떠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령 혹은 텐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던 중 '그들'의 하수인 마흔 명을 죽였으며 '그들'이 속한 단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다른 단서는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다 죽여버렸다니."

언제나 부드럽던 체이스의 눈매가 차가운 빛을 내며 가라앉았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은 지금 그 단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잔당을 쫓은 결과를 보내야 했으나 그 대신 에우리아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음을 담은 연락을 보내 온 것이다.

찬 기운과는 어울리지 않을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들이 생각보다 더 덩치가 컸나본데. 마법사들은 생각만큼 강하고."

체이스는 에우리아가 '검은 돌'에 대해 조사를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단체가 무엇 때문에 에우리아와 충돌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마흔 명이나 되는 하수인을 부릴 수 있다는 것에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으며 미지의 힘을 이용하고 있을 이들 마흔 명을 두 명의 마법사가 모두 죽였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힘에 대해서는 직접 겪어본 기억도 있었으니까.

"간신히 잡은 꼬리인데 놓친 셈이 되나."

그리고는 이렇게 조금 아쉬워하는 말을 꺼냈다.

단체의 하수인들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들의 뒤를 쫓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단 두 명의 마법사에게 모조리 죽은데다 다른 단서까지 없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보라색 눈을 내리 뜬 채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던 체이스가 테일란을 향해 말했다.

"협회장 뒤는 쫓지 말고 수도로 돌아가서 다른 단서 없는지 다시 조사하라고 전해줘. 자칫하다간 협회장 손에 내 새들도 다치겠네."

"알겠습니다, 저하."

그렇게 대답한 테일란이 그대로 서 있었다. 보통은 할 말이 끝나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체이스의 뒤를 지키거나 밖으로 나가던 테일란이었으므로 체이스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얘기해."

"카이리시스의 새들이 많이 줄었는데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테일란은 그저 '많이' 라고 이야기했으나 사실 카이리시스에 심어두었던 세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체이스의 명을 받은 테일란의 검이 휘둘러진 결과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정황을 보이는 것이 체이스의 눈에 띈 새들이 전부 테일란의 손에 죽었다. 미세한 의구심 하나 넘어가지 않고 가차없이 구분지어 모조리 죽였다.

칼리안이 체이스를 찾았을 때나 플란츠가 체이스와 만났을 때 테일란이 함께 없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새장에서 벗어난 새들이 새장 밖에 무엇이 있는지 채 알기도 전에 전부 없애버린 것이었다.

제 손으로 키워냈던 새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어들인 체이스가 낮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장은 늘리지 않으려고."

카이리스 국왕이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 이상 곧바로 수를 채워놓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만 체이스는 무시하기 어려울 타격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감안하고 새들을 죽였다. 그러니 이제 와 아쉬워 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언제든지 보낼 수 있게 돌아가는대로 준비는 해둬."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일란의 발이 한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찻잔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채였던 체이스의 눈동자가 그 발 끝을 따라 움직였다.

조금 전의 눈빛 만큼 차가워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 곳에서의 일, 전하께는 알리지 말았으면 하는데."

거부한다면 테일란 역시 버리겠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 평온한 말투였으나 테일란은 결코 거역할 수 없을 명령이었다.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테일란은 알겠다 답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것만 말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카이리시스의 세작들이 조사하던 것을 멋대로 바꾸고, 세작들을 멋대로 움직이고, 은거지를 바꾸고, 세작들의 존재를 카이리스 국왕에게 알리고, 세작들을 죽여 없애고.

데블란이 알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일.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 가며 카이리스의 왕자 한 명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

심지어 대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로.

체이스의 고개가 곁에 서 있던 테일란을 향해 들어올려졌다. 잔잔한 바람에 흔들거리는 깊은 숲을 담은 눈으로 테일란을 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잃어버린 동생 찾은 것 같아서."

말도 안되는 진실. 거짓보다 믿기 어려운 진실. 그러니 절대로 의심받지 않을 진실.

오로지 진실 뿐인 대답이었으나 그것이 진실임을 결코 알지 못할 테일란이 체이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카이리스 3왕자에 대한 첫인상이 어지간히도 좋았나보다 하는 얼굴이었다.

왕위에 오르기에 부족함 없던 3왕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향후 양국 관계를 위해 그렇게 도왔던 것이겠지.

"알겠습니다. 전하께는 함구하겠습니다."

알아서 판단하고 넘긴 테일란의 대답에 오랜 시간 말 없이 앉아있던 체이스가 비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민트의 향이 코 끝을 스쳤다.

* * *

예상했던 것처럼 비를 맞았다.

헤이시아 궁을 향해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시간의 축이 있는곳을 향해 한 발을 더 다가갈 때마다, 조금씩 더 많은 비를 맞았다.

비가 오는 것을 알았고 비를 막을 우산을 가지고 나섰으나, 몰아세우듯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비를 맞았다.

- 내 어머니가 그리 애써가며 걸어간 길에. 그것 말고 다른 끝이······ 있기는 할까.

문득. 정말 문득.

뒤따라 오고 있는 플란츠의 말이 생각났다. 발이 향하는 곳이 헤이시아였기 때문일지 다른 상념이 들었던 까닭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각났다.

그날 칼리안이 플란츠의 손을 잡지 않았거나 혹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오늘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떠올랐을 수도 있겠다고, 칼리안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문득 떠올랐던 말이 시작이 되었다. 헤이시아 궁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마다 한 마디씩. 놈이 했던 말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기억은 하나보지.

사람의 걸음에는 늘 끝이 있는 법이라.

칼리안의 걸음도 마찬가지였다. 되짚어 올라가던 걸음과 헤이시아로 향하던 걸음이 모두 멈췄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물에 빠진 완두콩이 보였다.

칼리안의 뒤를 따라 온 플란츠라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플란츠 역시 같은 비를 맞았다.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알지 못했다.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닫아두었던 창문이 있던 방을 향해서.

- 너. 누구냐고.

그리고 이렇게 떠오르는 말들을 되짚어가며 칼리안은 조금씩 자신의 밑바닥을 향해 고요하게 잠겨들어갔다.

멀리 빗소리가 멀어져가고, 숨 막히는 정적 속에 두 왕자의 발소리만 고요히 울려퍼졌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며 옷이며 칼리안은 그냥 내버려 뒀다. 플란츠에게 괜한 친절을 베풀 생각도 하지 않았다.

- 그래. 불러야지. 이름으로.

결국 누구도 온전히 불러주지 않고 누구의 기억에도 온전히 남지 않게 된 이름을 스스로 떠올리기에도 벅찼던 탓이다.

탁.

그 방.

감춰진 것을 다시 숨겨둔 그 방 앞에 도착한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던 플란츠의 얼굴이 가까운 곳에서 보였다. 그 연두색 눈을 응시하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베른에 가까워진 만큼 달라진 목소리.

버거울만큼 무겁고 놓고 싶을 만큼 괴롭고 외면하고 싶을 만큼 아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체이스가 그러했듯이.

만약 기억이 돌아오는 방법이 시간의 축을 마주하는 것이라면, 플란츠 역시.

"기억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칼리안조차 알 수 없는 일.

빼앗는 것 싫어하는 플란츠가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빼앗기 위한 전쟁을 일으킬 만큼 망가진 이유. 혹은 무언가를 빼앗아야 할 만큼 절박했던 이유. 어쩌면 그것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저 안에 있는 것을 마주하면 형님께서도 '과거'의 일을 기억하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똑같은 악몽을 겪게 될지 모릅니다. 저조차 알 수 없는 일을 떠올리게 될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는 체이스가 어떻게 칼리안의 본모습을 알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확실치는 않겠지만, 체이스 역시 안에 든 무언가를 접했고 그로 인해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칼리안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임을 이해했다.

플란츠가 칼리안의 얼굴을 마주 응시했다.

무겁고 괴롭고 아픈 단지 그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표정의 칼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열어. 같이 봐줄 테니까."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억이 돌아온 체이스를 잠시 형제로 대했던 것처럼 기억이 돌아온 플란츠를 적으로 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마지막으로 그것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서서 플란츠로부터 등을 보였다.

"네."

그것이 고민에 대한 답이자 칼리안의 결정이었다.

타인으로부터든, 과거의 그림자로부터든, 지켜내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마쳤다.

- 그르릉······.

작은 소리와 함께, 비로소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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