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지금이었다면 (4)
얌전한 고양이는 잠을 자고, 하나도 안 얌전한데다 형님의 똑똑함을 잠깐 잊어버리기까지 한 칼리안이 비밀 공유를 종용받고 있던 그 시간. 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빌헬름 관에는 마법사가 수두룩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앳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이건 멍 든 거잖아. 피 나면 와."
마법사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히나가 발칸에 오기 훨씬 전부터 빌헬름관에 드나들던 베로니카였다.
베로니카는 앨런이 이곳에 있었던 탓에 모든 마법사와 안면이 있었다. 물론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레이첼도 빌헬름에 있었어야 했으나 이동 마법진 구축을 위해 대체로 카이리시스를 떠나 있는 경우가 잦았다.
어찌됐건 베로니카는 실로 비범한 할아버지를 둔 탓에 사람의 나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너무 잘 깨달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빌헬름에 처음 온 이후 딱 일주일동안 발칸의 온 마법사들과 전부 안면을 튼 뒤 쉰 명의 마법사 전원과 반말도 텄다.
이제 친해졌으니 서로 말을 놓아도 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귀여움이 9할 그리고 설득력이 1할 쯤 섞인 그 주장을 들은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딱 그 때까지만 귀여웠다는 게 사소한 문제였으나 아무튼 그랬다.
"피 멎었네. 약 바르면 돼."
앨런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베로니카는 지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아주 신이 나 있었다. 마법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그냥 빌헬름에 있을 만큼 신이 났다.
"감기면 그냥 레몬차 마셔. 열 나서 쓰러지면 와. 약 줄게."
본격적으로 히나를 돕기 시작한 베로니카가 하고 있는 가장 비중 있는 일은 히나를 찾아오는 마법사들을 모조리 퇴짜 놓는 것이었다. 전부 다 꾀병인 것이 눈에 보여서였다.
신물을 사용하는 신관의 치유는 마법사의 서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때문에 이 마법사들은 지금껏 치유술이라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헌데 히나의 치유술은 서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랬으니.
호기심 많은 놈들이 2주 째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히나를 찾아올 수밖에. 새로운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못 견디는 놈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렇게 찾아오는 가짜 환자들은 베로니카에게 전부 다 쫓겨나고 있었다.
- 멍 든 것도, 치료, 할 수 있어. 전부 거절하지는, 않아도 돼.
덕분에 2주 동안 그다지 하는 일 없이 베로니카에게 수어나 알려주며 지냈던 히나는 결국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비가 올 것 같아서 고양이도 두고 왔는데 고양이 밥 주는 일까지 사라져버리니 할 일이 더 없어진 까닭이었다.
히나의 말을 본 베로니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아무 상처나 전부 다 치유해달라고 하는 것도 버릇 돼. 잘못 든 버릇은 개한테도 못 주는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어."
대체 앨런이 어린 손녀한테 뭘 가르친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베로니카는 이렇게 말했다. 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 힘든 거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
칼리안이나 플란츠의 상처를 치료할 때에 비하면 마법사들의 상처는 정말 솜털같이 가벼운 것이었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피도 없고 깊이 베여 벌어진 피부 사이를 들여다보게 될 일도 없으니까.
그런 히나를 보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직 몰라서 그래. 내가 왜 그랬는지 언니도 곧 알게 될 거야."
훈련장에 모여있을 마법사들이 '한 명을 대표로 뽑아서 마흔 아홉 대를 맞은 뒤에 찾아가보면 어떨까' 라거나 '칼리안 왕자님 이름 걸고 기사들이랑 한 바탕 싸워보면 치료 받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따위의 의견을 주고 받고 있으리라는 것을 히나가 언제쯤 알게 될지, 그것을 가늠해보면서.
"고양이는 오늘 안 왔어?"
그리고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다.
- 비 맞으면 아플까봐, 두고 왔어.
"2왕자님이 봐주시는 거야?"
아르센을 대신해 바빠야 할 플란츠가 왜 아직 오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플란츠가 아직 안 왔으니 고양이도 플란츠 방에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쯤 플란츠의 방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히나가 대답했다.
- 아마 그럴 거야.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는 베로니카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구분이 안되는 녀석을 생각하던 베로니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 고양이 이름은 계속 안 지어 줄거야?"
그 말에 히나는 언젠가 드미레아에게 이야기했던 설명을 한 번 더 해주었다. 칼리안이 왜 고양이 이름을 짓지 않는지에 대해서.
"아니야. 그래도 이름은 있어야지. 안 그러면 그 고양이는 평생동안 그냥 고양이인거잖아."
그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그냥 고양이로 살다 죽을텐데 그 후에 그 고양이가 보고싶어지면 어떻게 불러보려고 그래. 이름이 없으면 그냥 사라지는 거잖아. 그러면 안돼."
아, 하고.
히나가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베로니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사람은 늘 떠나보낸 이후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지만 그것을 너무 빨리 깨달은 것 같아 보여서였다.
- 알았어. 꼭 지어달라고, 말씀드릴게.
다른 사람들이 조금 불편해도 수어를 배우고 히나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히나가 조금 불편해도 고양이 이름을 불러주면 되는 일이니까.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 * *
툭, 투둑.
빗물이 창문을 두드린다.
'멍청하게.'
칼리안이 잘못했다.
답지 않게 플란츠의 유도질문에 그대로 넘어가버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이 궁의 입구를 막았다.
무언가 숨겨야 할 것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칼리안은 그것이 브리센이나 실리케와는 연관이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답이 나왔다.
칼리안이 입을 열 생각을 않자 의자에 등을 묻은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하에 숨겨진 것이 있었을테고."
잔해가 남아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잔해 속에서 발견된 물건을 숨기려 했으리라는 의심을 해보겠으나 마법사들은 분명 잔해가 모두 치워진 이후에 움직였다. 그래서 플란츠는 건물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곳, 즉 지하에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으리라는 가정을 했다.
"······ 헤이시아에는 지하가 없고."
아무리 실리케와 가깝지 않았다지만 플란츠도 헤이시아 궁에 가보기는 했다. 지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만큼은 가봤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헤이시아는 단 한번도 개축된 적 없었다. 그러니 건물을 건축할 당시 뭔가를 숨겼다는 소리가 된다.
"내 아우님께서 나서서 나를 막을 정도의 일과는 연관이 있고."
더불어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움직여서 굳이 플란츠의 접근을 통제할 정도가 되려면 플란츠가 알아서는 안될 중요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일 터였다.
이를테면, '새 좋아하는 놈이 다스리던 나라에서 시퍼런 귤이나 까드시던 연세 모를 미친놈이 어쩌다보니 내 동생이 되어서는 맨날 짖다 가끔 무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런 일에 관련될 수 있으면서 헤이시아 궁의 아래에 무언가를 숨길 만한 이는 단 한 명 뿐이지 않나.
시스파니안.
"시스파니안이 뭔가를 숨겨놨고 이번에 발견됐다는 건데."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플란츠 성격 상 알아내려 마음 먹은 일은 어떻게든 알아낼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다른 말 없이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그것을 꼭 들어야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꽤 많은 말을 한 플란츠는 더는 입 열기 귀찮다는 얼굴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적당히 둘러대서 납득할 놈이 아님을 안다.
그곳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를 알면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전부 다 알려고 들 것이다.
관심 가지지 말라는 의미로 '브리센이나 실리케와 관련이 없다'고 말을 했는데 그 순간 이미 정답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 없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긴 한숨을 뱉었다. 그 끝에 진심 가득한 말이 듬뿍 묻어나왔다.
"아무래도 내 형님께서는 축복을 머리로 받으신 것 같은데······."
"짖는 거 말고. 말."
대충 넘어가려 수작 부리지 말라는 소리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맞은편에 앉은 희멀건 놈이 '과거'의 자신이 시간의 축 뺏겠다고 전쟁냈다는 사실을 알면 또 절인 양배추같은 낯짝이 될까봐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축은 발칸과는 달랐다.
발칸이 강했는지 묻고 강했다고 대답해주고. 그것과는 달랐다. 적어도 칼리안에게 있어서 시간의 축은 그 자체로 베른이었다. 베른의 생이었다.
"······ 그것 참."
칼리안이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떼어 창 밖을 쳐다봤다. 빗물에 번진 창문으로 가려진 탓에 바깥의 모습이 일렁이듯 아른거린다. 그것이 꼭 베른에 대한 기억과도 같았다.
밖을 보려 창을 열면 비가 들이치고 몸이 다시 젖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언뜻 보이기만 하는대로 그렇게 창문을 닫아 두었다. 눈에 보여도 잡을 수 없으니 그냥 흘러내려가 어느새 잊혀지도록.
지워진 이름처럼 그냥 그렇게, 닳아가도록.
그리 해 두고 있었는데.
"내 형님께서는 왜."
칼리안의 붉은 눈이 다시 맞은편의 플란츠를 향했다. 향하다가 이내 아래로 떨구어졌다. 테이블로, 찻잔으로, 그 아래 어딘가 있을 칼리안의 밑바닥으로.
마치 빗물에 번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창 밖 풍경처럼,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만 굳이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살짝 감춰 둔 기억.
지금의 칼리안이 아닌 베른의 마지막 날이 담긴 곳으로.
"······ 잘 닫아 둔 것을 기어코 열어보려 하시는지."
그리고 이렇게 물어봤다.
왜 그렇게 확인하려 하느냐고. 그 때의 당신과 같은 사람이 아닌 것도 이제 알면서.
"부수는 것이나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물끄러미 영롱하게 빛나던 헤이시아 궁을 떠올리고 있었다.
실리케가 있던 그림자를 부서뜨려버린 칼리안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단 하나 남은 흔적까지 없애버리고 기어코 살게 만든 것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그 때와 똑같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
"그대로 두면 썩는 것도 똑같을 텐데."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어코 살고 있는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잃어버렸다며."
칼리안은 지금 이 말이 '온 생을 잃었다' 했던 자신의 말에 대한 이야기임을 이해했다.
지금 플란츠가 똑같이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똑같이 일방적이고 이기적으로 내미는 손임을 알아보았다. 비가 들이치든 말든, 비에 젖든 말든, 춥든 말든, 아프든 말든. 창문 밖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알려달라고.
"그러니까 말해보라고. 그 원망, 한 번 쯤은 들어줄 테니까."
칼리안이 시선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자신을 보는 연두색 눈을 쳐다봤다.
그 날.
먼 곳에서 지켜보던, 이미 시들어버린 눈과는 완전히 다른 눈을.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런 뒤에야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미친놈이······ 기억력은 좋아가지고."
하라는 원망은 안하고 욕만 했다.
같은 놈도 아닌데 원망을 왜 하나. 이 참에 욕이나 해야지.
이 정도면 됐지.
그리고는 자신을 딱 마법사 보듯 쳐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시스파니안을 만났을 때 칼리안이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판이 크다고. 그러니 아직까지는 섣부르게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해서 못 엽니다. 내 형님께서 아직도 되게 여리고 약하셔서."
"내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두시겠지."
또 이렇게 사람 복장 터뜨리는 소리를 지껄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원망 끝났으면 됐고 궁금한 것은 여전히 알아야겠는데. 위험해지면 그 때의 되게 강한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놓으실테니 지금의 아우님께서는 걱정말고. 말해."
칼리안이 뭐 이딴 놈이 다 있느냐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보다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일어나시죠. 보여드릴테니까."
결국 비를 맞게 생겼다.
허락의 말을 꺼낸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어떡하지.
실수로 죽여버릴 뻔 했을 때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