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59화 (160/527)

제27장. 지금이었다면 (3)

초상화 속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니 오히려 초상화보다 더 실물 같은 조각이다.

"대단하군."

르메인은 짧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을 꺼냈다.

시스파니안이 남겨둔 방이 발견된 지 정확히 2주 만에 내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위험한 요소가 있는지 미리 확인 중에 있으니 조금 뒤에 걸음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되도록 르메인에게 시간의 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앨런이 이와 같은 핑계로 르메인의 방문을 늦췄었다.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축의 파편을 꺼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파편을 꺼내는 것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석벽에는 양신전쟁의 과정이 조각되어 있었다.

악신을 봉인하기 위해 8명의 영웅이 모인 것 그들이 어떤 싸움을 벌였고 누가 어떤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내용, 마지막 전투에서 악신을 봉인하며 함께 잠든 주신 세렌티에 대한 묘사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르메인은 마지막 장면 악신이 봉인되고 난 직후의 모습 앞에 선 채였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네 명인 초대왕 하츠아라와 고룡 시스파니안,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그리고 세크리티아 대왕의 모습이 보였다.

- 우리는 분명 이루었고 지켜냈으나 잃어버렸다.

다른 조각들에는 별다른 글귀가 없었으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말인지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각 속 세크리티아 대왕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영웅들 중 최후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알려져 있던 기사 네리아드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시스파니안도 세크리티아 대왕의 뜻을 존중했던 것인지 '죽기 전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지우라 했다'는 기록을 제외한 다른 흔적이 없는 세크리티아 대왕의 얼굴은 이 조각에서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상실감과 절망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망각하지 않는 시스파니안이 직접 보고 겪었던 기억을 옮겨 둔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그 빈 얼굴을 잠시 보던 르메인이 앨런을 향해 물었다.

"이 외에 발견된 것은 저 고리 하나 뿐인가."

그리고는 이렇게 돔 형태의 방 한 가운데 놓인 시간의 축의 파편을 보며 물었다. 곁에 서 있던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전하. 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리를 옮길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일이군. 그 때문에 시스파니안께서 직접 남기신 기록까지 숨기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카이리스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만큼의 대단한 발견이 아닌가. 그저 이 장소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왕실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기회였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방의 한가운데 놓인 금빛 고리 때문이었다. 칼리안을 습격한 이들과 관련이 있는 물건인듯 하니 이 장소 자체를 공개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앨런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고리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그 고리가 무엇의 일부인지와 그것이 벽의 조각 따위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은 숨긴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향후에 공개하면 되는 일이니 너무 그리 아쉬워는 마시지요."

"칼리안의 청을 허락한 뒤로 걱정이 되고 안달이 나니 어찌하겠나."

지금 르메인은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에 대한 일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르메인의 자리가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져야 칼리안에게 탈이 생길 일도 줄어들텐데 그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이번 발견을 알릴 수 없게 된 상황이 안타깝다는 말이었다.

"이후의 일은 왕자님께서 감당하실 몫입니다. 알아서 잘 대처하실 터이니."

앨런이라 하여 걱정되는 마음이 다르겠는가.

오히려 앨런은 르메인과 달리 칼리안이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까지도 얼추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말한대로 그것은 칼리안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섣불리 나서서 돕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브리센을 상대하겠다는 그 속내에 대해 르메인의 백 배 쯤은 될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있었는지 없었는지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못 찾을 왕권 아닙니까. 이제와서 개구리 코딱지만큼 강해져봐야 달라질 것도 없으니 너무 그리 아쉬워하지도 마시지요."

르메인은 다시 한 번 고개만 끄덕였다.

목숨줄 연명시켜주고 있는 마법사의 저런 말이 그냥 평범한 안부인사 정도로 들리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그냥 그러려니 해버리고 마는 단계도 초월한 것이다.

밖에 비가 오는 것도 르메인 탓이라 할 마당에 이 정도 쯤이야.

괜스레 헛헛해지는 마음에 저녁에는 란델을 좀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만나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 * *

- 쏴아아아······.

갑작스레 쏟아져내리는 빗줄기가 테라스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시원스럽다 못해 눈 앞이 부옇게 흐려질 정도로 내리는 갑작스러운 비는 때때로 반갑다. 이 말은 이런 비를 반겨하지 않거나 아주 난처한 눈으로 빗줄기를 볼 일이 더 많이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그 '때때로'에 속하리라는 사실은 칼리안에게 있어 퍽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칼리안은 실내에 있었고 오늘 하루는 별다른 일정도 없었다. 물론 비에 젖는 것을 심하게 꺼려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비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기꺼워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매우 평화로운 마음으로 빗소리를 즐기며 접시에 남은 마지막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적당히 익힌 스테이크의 맛이 아주 좋았다.

"애오옹!"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긴 창문을 타고 또르륵 굴러내리는 빗물이 신기했던지,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창문 이곳 저곳에 발을 가져다대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빗물을 잡으려는 행동인 것 같아서 고양이를 본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눈에 보여도 그건 못 잡아."

그리고 이렇게 고양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애옹, 애옹!"

그것이 꽤 억울했던지 고양이는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이내 우다다다 소리를 내며 달려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플란츠의 무릎 위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이제 익숙해진, 테이블과 플란츠의 무릎 사이의 어두운 곳에 몸을 말고 누웠다.

칼리안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와인에 재워 잡내를 없애고 약간의 후추와 소금만으로 밑간을 한 뒤 핏물 하나 안 배어 나오도록 완전히 익힌 스테이크를 씹어 삼킨 플란츠가 자세를 조금 바꿨다. 고양이 눕기 편하도록.

오래지 않아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 위에는 식기 대신 차와 디저트가 놓였다. 비 오는 날에 딱 어울릴 말린 사과와 오렌지를 함께 우려낸 차였다.

"아일란, 비버리안, 요른, 트리필드, 벨리."

소리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플란츠가 먼저 입을 여는 것이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앞 뒤도 없고 맥락도 없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단어조차 아닌 말을 하는 경우는 아마 처음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물을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크리온, 퍼드, 셀틱, 채프먼, 메이어, 리갈."

플란츠는 한 번 더 이상한 소리를 했다.

"꽤 많네요."

물론 칼리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는 커녕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까지 했다.

"많은가."

"새 국왕이 즉위하고 나서 사라진 가문이 서른 곳 가량 되는데, 셋에 한 곳이면 많은 편이죠."

그리고 이렇게 세상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대화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시간의 축을 마주한 그날. 칼리안은 바로 그 날부터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세운 것으로 모자라 이틀 내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종이와 펜을 들고 씨름을 했다.

정보를 모두 외운 뒤 태워버렸던 텐실의 자료를 다시 써낸 것이다. 오로지 펜을 잡기 위해 손가락에 오러를 두르는 경험까지 해 가며 날이 더 지나기 전에 플란츠에게 자료를 넘기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란델이 지닌 맹세의 인과 관련되었을 세력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플란츠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다른 고민거리도 많았으니 굳이 칼리안까지 이중으로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닷새에 걸쳐 외운 그 자료를 나흘만에 머리에 새겼다. 그 뒤 다시 일주일이 지났고 플란츠는 자료에 적힌 내용 중 집중해서 확인해보아야 할 가문들을 추려냈다. 얼결에 같이 묶여 잘려나간 곁가지를 제외한 굵직한 가지에 해당되는 가문들. 그 이름을 칼리안에게 전한 것이었다.

"즉위하기가 무섭게 이런 짓을 하고도 잘도 사셨군, 란델 형님은."

란델이 즉위한 뒤 사라진 가문이 삼십여 개.

일반적인 경우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 어떤 귀족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칼을 휘두르는 국왕을, 그것도 별다른 기반도 없는 국왕을 그대로 두고 목을 내어 놓겠는가.

그러니 플란츠는 란델이 반란도 야기하지 않고 그 많은 귀족들을 숙청해낸 것을 신기하다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직접 손대신 것이 아니겠죠. 모르셨지 않을 텐데요."

드러내지 않고 휘두르는 칼.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리도록 결코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직접적인 손을 쓰지 않고 진행한 숙청일 터였다. 당하는 이들조차 그것이 누구의 안배인지 알 수 없도록 하면서.

"의외라서."

칼리안의 말대로 플란츠 역시 몰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란델이 그런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나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계획을 무사히 성공시킨 것에 대해 새삼 놀랐을 뿐이었다.

"열 곳에서 더 줄여보는 것은 어려우시겠습니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그것도 '과거'의 체이스가 아닌 지금의 체이스가 기억해낸 내용을 토대로 전해진 정보였다. 그러니 중간중간 빠진 내용도 많았고 당시의 세작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정황도 많이 있을 터였다.

그 가운데에서 그나마 셋에 하나를 추려낸 것이 대견하다 할 일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그 열 개의 가문을 모두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때문에 물어오는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텐실 왕세자 쪽 정보도 필요할 것 같은데.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던 것에 왕세자가 연관되어 있다 했으니까."

당연히 르메인의 세작들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매우 유능한 자신만의 정보조직 보스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세이렌 경이 돌아오면 협회 쪽으로 부탁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어차피 형님께서도 그 때까지는 다른 일이 많으실테니."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에우리아 외의 다른 이에게 부탁할 수 있을 일도 아닌데다가 아르센의 부재로 플란츠도 꽤 바쁠 터였다. 아르센과 똑같은 직위의 부군단장이 아닌가.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찻잔에 손을 가져가려던 칼리안을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이 내 발을 자꾸 막던데. 내 아우님 짓일까."

지금 발칸의 마법사들이 플란츠의 발을 막아설 곳은 헤이시아 궁 뿐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

칼리안이 거짓말 못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앨런일 테고 그 다음으로 잘 아는 사람이 플란츠일 것이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솔직히 대답했다.

"왜."

"그걸 말씀드릴 수 있으면 들여보내 드렸겠죠."

그리고 플란츠는 칼리안이 자신에게 꽤 순순히 대답을 내어놓는다는 바로 그 점까지도 잘 알았다.

"잔해 다 치웠고 길목이 막혔으면 뭔가 나왔다는 건데."

정확한 추측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조차 그 계단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것을 다른 이도 아닌 플란츠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브리센이나 형님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 아닙니다."

"그렇다면 시스파니안이겠군."

2주 동안 고작 텐실에 대한 일 하나만 생각한 것이 아니었던 플란츠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뒤에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곧바로 시스파니안이 튀어나오느냐는 표정이 된 칼리안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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