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57화 (158/527)

제27장. 지금이었다면 (1)

칼리안의 말대로였다.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프레이야를 왕비로 추숭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재 르메인에게 다른 왕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당연하겠지만 르메인은 그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이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진심입니다."

곧바로 이어진 대답에 르메인이 짧은 숨을 쉬었다.

칼리안의 이 갑작스러운 부탁이 프레이야의 명예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닐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혈통.

후궁 심지어 평민 출신의 후궁을 어미로 둔 왕자라는 꼬리표. 그것을 떼내려는 것일 터였다.

물론 이제와 그것을 떼려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세자위에 마음을 두고 하는 소리일테지."

"그렇습니다, 전하."

칼리안은 이번에도 숨김 없이 대답했다.

이전에야 스스로 지닌 발칸이라는 강력한 힘이 있었으니 프레이야가 후궁이든 평민이든 상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칼리안은 그 힘을 모조리 플란츠에게 쥐여줬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내어 르메인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전력이 아닌 세력을 가지기 위해서 말이다.

칼리안이 왕세자가 되리라 예상하는 귀족들도 어느정도 칼리안의 손을 들어주는 귀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칼리안의 출신만은 '흠'이라 말했다. 비하의 의미든 아니든 왕비의 아들이 아닌 것이 문제라 여기는 것만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런 상황이니 란델이나 플란츠를 지지하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오래 전 왕실 몰래 신물을 거래하고 카이리스의 정보를 세크리티아의 세작에게 판매하다 체포된 헤일 라트란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칼리안은 '평민의 자식'이라고.

칼리안이 아무리 특출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해도 아무리 강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아예 왕족으로 여기지를 않는 것이다. 브리센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정말 만에 하나 플란츠가 세자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차라리 란델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낫다고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것만은 제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체이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체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사 서임을 받았던 베른이 아니던가.

귀족들이 그 대단하신 혈통을 따지는 모습은 세크리티아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평민 출신의 후궁을 어미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혐오하는 모습은 오히려 세크리티아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카이리스의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르메인도 알고 있었다. 프레이야가 왕비의 위를 받게 되면 유일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사라지게 되는 것임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 다만, 칼리안."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작부터 칼리안이었다.

르메인의 정치적인 파트너로서도 칼리안이 지대한 도움이 되고 있고 인품이나 능력을 보아도 차기 왕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것은 칼리안이었다. 물론 가끔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지나치게 큰 일을 터뜨리기는 하지만 그것에도 확실한 이유는 있었다. 왕권이 내려갈대로 내려간 지금 상황에서는 르메인이 걸어왔던 것과 달리 과감하기 짝이 없는 그런 행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진작부터 왕세자의 자리를 칼리안에게 내려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은 먹고 있었다. 세자위를 내리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 따져본다면 당연히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다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리했으리라는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위험한 일이다."

다만 아직은 위험했다.

그래서 하지 못했다.

때문에 르메인이 이렇게 거절의 의사를 담아 대답했다.

표정 없던 르메인의 얼굴에 침통함, 자괴감, 그리고 죄책감이 모두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르메인이 지닌 힘이 크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기 때문이다. 왕권이 조금만 더 강력했다면 르메인의 아이를 낳은 이를 '평민'이라 욕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르메인은 세자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칼리안이 주제 넘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왕이 되려는 마음을 지나치게 쉽게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등을 떠올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렇게만 물었다.

"란델이 20세가 되기까지 아직 1년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왕권을 더 키우고 텐실과의 자잘한 문제를 해결하고 브리센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떨치고 나서. 그리하여 너를 반대할 세력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면 그 때 부탁한 것을 이뤄주려 하는데. 어렵겠느냐"

"전하께서는 무엇이 위험하다고 여기십니까."

"당연히······."

지금 이 시기에 프레이야를 왕비로 추숭하는 것은 곧 르메인의 결심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직 왕세자위에 올려놓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결정을 내렸다는 표현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그것이 위험하다 여기는 것이었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놈 먼저 세자위에 올려놓으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는 앨런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을 테니까. 브리센에서 그리고 텐실에서 별다른 세력 없이 홀로 강한 칼리안을 그냥 두겠는가.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칼리안을 응시했다.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모를 칼리안이 아니다.

"네가 갑자기 그것을 부탁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혹 무슨 일이 있는 것이더냐."

그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섣부르게 안된다는 말만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드리는 부탁이라기보다는."

르메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프레이야를 추숭하면 에반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것으로 말미암은 명분을 만들어 브리센의 머리를 다 잘라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분이 있는 가지치기와 명분이 없는 가지치기는 다르니까.

또 하나.

프레이야의 추숭 소식 이후 브리센이 흔들거리면 칼리안 쪽으로 발을 돌릴 귀족들. 그것이 칼리안이 손에 쥘 세력이었다. 칼리안이 만들어낼 '명분'을 빌미로 칼리안의 구명줄을 만들어 줄 세력 말이다.

명분 있는 가지치기, 그리고 새로운 세력.

그 두 가지가 함께 진행되어야 칼리안이 산다.

다만 이것을 르메인에게 사실대로 알릴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한 가문의 수장들을 살해한 혐의를 뒤집어 쓸 터였다. 광장에 칼리안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깔리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르메인은 분명히 반대할 것이었다.

"저는 그저······."

그래서 칼리안은 조금 더 솔직한 대답을 하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속에 감춘 꿍꿍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이유를 꺼내겠다고.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어 르메인을 쳐다봤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그린 채 잠시동안 르메인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르메인을 바라보며 남은 대답을 전했다.

"살려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전하."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

그것은 르메인이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부탁이었다.

* * *

아르센은 화염 폭발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르센을 이중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라 칭하지는 않는다. 할 줄 아는 것과 두 개의 주종을 가진 것은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아르센은 그저 화염을 함께 쓸 줄 아는 것 뿐. 두 속성의 마법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르센이 헤이시아 궁을 향해 화염구를 날려보낼 당시 동시에 사용했던 얼음의 벽이 현저히 불안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두 개의 속성 모두 주종으로 다루는, 그리하여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든 아니든 상관 없이 언제나 완벽한 완성도를 지니는 마법사. 그것이 이중 속성의 마법사다.

물론 앨런은 예외였다.

7서클의 장벽을 넘는 순간 속성의 경계도 사라진다. 때문에 앨런에게 있어 속성이란 그저 무엇을 더 자주 사용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은 대개 본인에게 맞는 것 하나만을 주종으로 삼고 수련을 한다. 언젠가 나도 고서클이 되겠지, 하고. 두 개의 주종을 가지려면 마법적인 재능과 속성 친화력은 기본이고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했으니까.

다만 에우리아는 굳이 앨런의 경지를 욕심내지 않았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래도 남들에게 지는 것은 싫었으므로 두 개의 속성을 모두 주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그것을 성취해냈다.

그런 에우리아였으니 지금의 아르센보다도 한 살이 더 어렸던 나이인 5년 전에 마법사 협회장에 올랐던 것이리라.

"스물 셋."

그래서 아르센은 그냥 싸움 좀 할 줄 아는 꼬맹이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 파지지직!

눈부신 빛이 대지를 뒤덮었다라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마법이 에우리아의 손 끝에서 뻗어나왔다. 에우리아를 향해 달려들려던 다섯 명의 기사를 향해서였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손에 들린 것이 붉은 오러를 뿜고 있든 아니든 그것은 일말의 영향도 주지 못했고 에우리아에게 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 쿠웅!

다섯의 기사가 온 몸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나뒹굴다 이내 잠잠해졌다. 스치기만 해도 죽을 정도의 힘에 저 정도의 저항을 하는 것은 분명 검에 두른 것과 같은 빛의 실드 때문일 것이다.

"열 여덟."

어찌됐건 에우리아 혼자로도 놈들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으므로 아르센은 에우리아와 놈들의 사이에 가상의 선 하나를 그어놓고 그 곳을 넘어오는 놈들만 처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 별반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놈들의 숫자를 세어주는 역할까지 맡았다.

잠시 바닥에 쓰러져있는 놈들을 보던 아르센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스물 하나."

에우리아의 번개가 어느정도로 강한지는 아르센도 잘 안다. 이미 열 두 번은 더 절명했어야 할 공격을 맞았다.

그런데 쓰러진 다섯 중 셋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니 남은 놈들의 숫자를 세는 것도 생각해보면 꽤 어려운 역할이다. 쓰러져 누운 놈이 죽은 놈인지 다시 잠깐 일어났다가 죽을 놈인지까지 가늠해서 세어야 하니, 이 얼마나 헷갈리는 일이란 말인가.

"저 실드가 두꺼운 겁니까, 협회장님이 약해지신 겁니까."

그리고 이렇게 간간히 에우리아를 응원하는 고무적인 역할도 자처하고 있었다. 닭 잡아 왔을 때 에우리아가 해줬던 응원과 비슷한 것이었다.

에우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앞에 선 스물 한 명에 겁대가리 또 내려놓고 뒤에 서 있는 한 놈까지 포함해서 스물 둘. 그 스물 두 명을 싹 다 죽여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을 애써 접어놓기 위해서였다.

잠시 앞을 살피던 에우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 놈들이 쓰는 힘, '그거' 같은데."

작은 목소리였으나 아르센에게도 뚜렷이 들리는 말이었다. 저 기이한 붉은 빛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으므로 아르센이 가만히 물었다.

"면식 있는 힘이었습니까?"

붉은 빛이 일렁거리는 기분 나쁜 힘과 구면인지 묻는 말에 에우리아의 번개가 잠시 아르센을 향했다.

아르센이 씩 웃으며 에우리아의 옆에 섰다.

이제 그만 놀리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딱 네 번의 공격으로 마흔 명을 스물 한 명으로 줄여놓은 에우리아에게 계속 장난을 칠 수는 없으니까.

"마나실 군단장님의 실드도 붉은 빛을 내긴 하는데 저건 확실히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마나실 백작님은 화염이라 그렇고. 저런 것과 비교하면 안되지."

놈들의 능력이 굉장히 이상한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조금 전 쓰러졌다 일어난 놈들. 에우리아의 번개에 맞아 다 벗겨진 놈들의 피부가 재생되는 속도를 지켜 본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사람 맞습니까. 텐실의 치유사도 저 정도는 못 합니다."

"어. 사람 맞아."

번개의 힘을 가득 담은 물의 구체를 직격으로 맞고 죽은 듯이 쓰러진 것을 분명히 봤다. 물을 뒤집어 쓴 채 맞은 번개에 온 몸이 타들어가는 것도 분명히 봤다. 그렇게 두 번 만에 마흔 명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들 중 스물 세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이 끊이지 않은 이상 회복이 되는 것이다.

"놈들은 아마······."

칼리안을 습격했던 이들과 같은 힘을 쓰는 놈들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려던 에우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을 공격한 놈들에 대해 아르센에게 알려주어도 괜찮을지 그것을 결정할 수 없어서였다.

에우리아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방금 전 일어나 다시 검을 집어드는 놈들을 향해서였다. 에우리아를 향해 어떤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붉은 실드가 놈들을 다시 둘러싸기 직전 보라색의 빛줄기가 놈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 쌔애액!

- 콰앙!

가늘고 긴 쐐기 형태를 지닌 보랏빛의 창. 번개의 힘을 담은 에우리아의 창이 채 실드로 보호되지 않은 세 기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놈들의 몸이 생명을 잃고 축 늘어졌다.

에우리아는 그 모습을 오래 보고 있지 않았다.

매섭게 가늘어진 눈이 이제 막 회복을 마치고 에우리아를 향해 다시 공격을 하려는 놈들을 빠르게 훑어냈다.

짙은 갈색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

입고 있는 옷에는 그 어떤 표식도 없고 놈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기사도 마법사도 모조리 같은 복장이다.

"마법사부터 처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드 때문이었다.

저 귀찮은 실드부터 쓰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해. 귀찮게."

누굴 골라서 먼저 죽이는 건 에우리아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전기의 힘은 얼음과 다르다. 광범위하다.

그러니 그냥 싹 다 잡아버리면 된다.

달려들면 붙들어놓고 멀리서 쏘면 막으면 되는 것을. 굳이 귀찮게.

두 대를 맞춰 죽이든 세 대를 맞춰 죽이든.

전부 다 죽여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몇 명 남았지?"

번뜩이는 눈빛의 에우리아를 본 아르센은 실로 능력있으신 협회장 에우리아께서 만에 하나라도 '마법사부터 처치하자는 의견이 묵살된 아르센이 불만을 가진' 것으로 오해하지 않으시도록 유난히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팔 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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