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6)
봄의 바람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히나의 표현에 따르면 '햇빛 가루가 바람에 담긴' 느낌을 주는 것이다. 겨울처럼 매섭지도, 여름처럼 숨이 막혀오지도, 가을처럼 쓸쓸하지도 않은 봄의 바람은 정말이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했다.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장미향이 테라스까지 넘어온다.
- 내가 한 말을 되돌려 받는 것 같구나.
언젠가 손 위에서 벗어나지 말라 했던 자신의 말을 떠올린 란델이 이렇게 말했다. 목적은 완전히 달랐지만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른 것은 맞았으니 칼리안은 그에 대해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 그리하마.
그리고 란델은 이렇게 칼리안이 내민 손을 붙들었다.
덕분에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저 장미의 향기가 이제야 조금쯤 가볍게 다가왔다. 그 조금의 차이와 함께 찾아온 잠시간의 여유에 칼리안이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향기 좋다. 라임 향도 좋고 장미 향도 좋고."
칼리안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뒤 얀이 가져온 차에서도 장미 향이 났다. 동그랗고 얇게 자른 연두색의 라임 조각과 함께 들어있는 말린 장미 꽃잎에서 나는 향이었다.
"어제 많이 피곤하셨던 것 같아서요. 그리고 장미는 지난번에 주셨던 것을 히나가 차로 만들었어요."
딱 한 송이.
예전에 장미 정원에서 란델의 시선을 돌려놓느라 잘라냈던 장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뒤 곧바로 체이스를 찾아가느라 얀에게 맡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차를 만들어 온 모양이었다. 피로한 것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라며 함께 넣은 라임도 마음에 들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바람결에 함께 불어오는 장미 향을 맡으며 라임과 장미가 든 차를 마시다니. 란델을 만나고 오지 않았더라면 새콤하고 향긋한 이 차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텐데 지금은 별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여유롭다. 잠시뿐인 여유겠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고마워. 챙겨줘서."
그래서 이렇게 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챙겨준 것이 장미꽃인지 라임인지 혹은 칼리안인지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얀은 그냥 좋아하기만 했다.
- 똑똑.
다른 대화 없이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비워 낼 때 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작은 소리.
노크를 하기에 앞서 주저하는 것인지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한 두 번 두드린 뒤 조금 더 세게 두드려 만들어내는 소리. 늘 그렇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그래서 칼리안은 얀에게 그러하듯 이번에도 누구인지 묻지 않고 말했다. 물어보아도 들려 올 대답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곧 아주 작은 발소리와 함께 히나가 테라스로 왔다. 그런 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말했다.
"잘 어울리네."
히나는 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장식용 금단추가 달려 있고 왼쪽 가슴에는 카이리스의 문장을 등에는 히나를 위해 새로 만든 자주색의 치유사 표식을 수놓았다. 로브자락의 끝단과 소매 끝으로 갈수록 더 촘촘해지고 화려해지는 금색의 자수 그리고 로브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한 서로 다른 길이의 금색 체인 세 줄 때문에 그 외양이 상당히 화려했다.
바로 발칸의 제복이었다.
- 아직, 어색한 것 같아요.
칼리안의 말에 히나가 이렇게 말했다.
키리에와 히나를 구해냈던 날 칼리안이 둘러준 것을 입은 뒤로 처음 입어보는 제대로 된 로브였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다음으로 히나가 보물처럼 아끼는 것이 바로 그 날에 입었던 검은 로브였다.
"가 보면 바로 실감날거야. 이 카이리스에 정신 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될 테고. 지내기 전에 실망부터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워낙 이상한 놈들만 모여 있어서."
돌은 놈들.
왕궁으로 향하는 길에 그나마 남아있던 제대로 된 사고 체계를 미련 없이 탈탈 털어버리고 온 것 같은 그런 놈들이 아닌가.
- 전부, 괜찮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히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괜찮을 거야."
놈들이 너한테 안 괜찮게 굴면 나도 놈들한테 안 괜찮게 굴 거라서.
칼리안이 속으로 삼킨 말이 무엇인지 모를 히나가 티 없는 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 웃음, 그리고 향긋한 차 한 잔 덕에 휴식을 마치고 다시 움직일 기운을 낸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리안은 히나와 함께 빌헬름 관에 갈 참이었다. 그래야 히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가자. 데려다 줄게."
칼리안이 가볍게 발을 옮겼다.
히나를 데려다 준 뒤에 허전해진 손에 다시 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 * *
타닥 타닥 하는 장작불 소리는 언제나 평화롭다.
죽은 것을 태우며 나는 그 소리가 평화롭다 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물었던 스승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때문에 아르센의 얼굴에는 잠시 고요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을 본 에우리아가 물었다.
"꽤 괜찮지?"
왕궁을 떠나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길을 헤맸다.
멀쩡한 왕도에서 정확히 하루 만에 길을 헤맸다. 갈래길에서 잘못된 쪽으로 향한 탓에 되돌아오다 하루가 다 갔다. 그 덕에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가 있는 도시를 찾지 못해서 결국 야영을 결정했다.
어차피 아무 곳에나 대충 앉아서 자는 것이 일인 마법사들이었으니 그것이 야외라 해서 특별히 불편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신이 났고 아르센은 별 생각이 안 났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는 말이다.
해가 기울기 전에 밥이나 먹고 대충 자고 일찍 출발하자는 것은 에우리아의 의견이었다. 아르센은 역시 별 생각이 없었으므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에우리아의 응원을 받으며 야생 닭 한 마리를 잡아왔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모닥불 위에 둥둥 뜬 채 익어가는 닭고기의 노릇노릇한 냄새를 확인하는 에우리아를 향해 아르센이 적당히 대답했다.
근 10년만에 야영이라는 것을 해 보는 에우리아는 마법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요리에 굳이 모닥불을 피웠다. 다른 이유 없이 그냥 야영에는 모닥불이 제격이지 않느냐는 이유 때문이다.
숲 속으로 퍼져나가는 냄새나 조금 뒤 어둠이 내렸을 때 이 모닥불이 주변의 눈에 띌 것이라는 걱정은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수도에서 고작 하루 거리의 숲에 도적이 있을 리도 만무했고 만약 그런 무리를 만나더라도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어서였다.
주섬주섬 자신의 공간을 열어 찻잎을 꺼낸 에우리아가 허공에서 만들어낸 물로 두 잔의 차를 우려내어 아르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받아든 아르센의 하얀 로브, 그리고 그 가슴에 새겨진 왕실의 문장을 보며 에우리아가 말했다.
"누구 밑에 있을 놈이 아닌데. 의외였어."
"저는 협회장님께서 정보원 노릇 하는 게 더 의외였습니다."
"생각보다 재밌더라. 정보원. 그래서 나중에 시간 나면 정말로 만들어보려고. 정보조직."
이렇게 말한 에우리아가 혼자 웃음 소리를 냈다. 둘 다 의외의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똑같이 칼리안 때문이었음을 생각한 탓이었다.
"협회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에우리아의 웃음소리가 끝나길 기다리던 아르센이 물었다.
"이동 마법진 살펴보러."
"왕자님께서는 모르셨던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습니다만 그레이스 경이 이미 가 있지 않습니까."
아르센이 말하는 '왕자'란 늘 칼리안이었다.
에우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한데. 근처에서 다른 알아 볼 것도 좀 있고."
자세한 설명을 꺼려하는 것 같아서 아르센은 그냥 고개만 몇 번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에우리아의 질문이 아르센을 향했다.
"헤이시아, 왕자님이 시키신거지."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킨 주동자를 묻는 말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어서 꺼내든 참이었다. 에우리아의 질문에 아르센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실 만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마나실 백작님이 한 소리 하셨겠네."
"못 하십니다. 마나실 백작님은 왕자님께 아무 말씀 못하시는 분입니다."
앨런이 칼리안을 어찌 대하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아르센일 터였다. 그제야 앨런의 무한한 제자 사랑을 상기한 에우리아가 '하긴 그렇겠구나' 하는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보니 술집 사고는 어떻게 잘 넘어갔나보네? 왕자님 성격에 몇 놈 앓아누울 줄 알았더니."
아르센의 시선이 물끄러미 에우리아를 향했다.
발칸 내에서는 꽤 떠들썩했지만 칼리안의 '성의 가득한 배상금' 덕에 바깥에는 별 소문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에우리아가 남의 일에 관심 많은 귀족들조차 모르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냥 질문입니까, 정보 수집입니까."
아무리 에우리아가 칼리안의 편에 서 있다지만 아르센은 그리 쉽게 사람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칼리안에게는 마법진을 살펴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수도를 벗어나 있으니 혹시라도 에우리아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어 꺼낸 말이었다.
"······ 꼬맹이 다 컸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말에 이런 대답이 돌아오자 에우리아가 곱게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제복 입더니 겁대가리 내려놓고 다니고."
아,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에우리아의 피어에 움찔한 아르센이 얼른 대답했다.
"찾아왔습니다, 겁대가리."
어디 발칸의 마법사들만 돌았겠는가. 마법사들은 다 돌았다. 그런 마법사들을 5년 넘게 무탈히 잘 이끌고 있는 유능하신 분을 앞에 놓고 의심 따위를 했다니. 내가 진짜 돌았었나보다 하면서.
그런데 에우리아의 피어가 사라지지 않았다.
말 실수에 너무 화를 내는 것 아니냐고 물으려던 아르센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눈에 매서운 빛이 뜬 것을 본 에우리아가 다시 말했다.
"크긴 컸네. 꼬맹이."
그리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한 누군가의 움직임이 에우리아의 사위에 걸려들었다. 그것을 늦게나마 눈치 챈 아르센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아르센이 손에 든 차를 홀짝 마셨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조사하시는 일이 위험한 일입니까. 꽤 수가 많은데요."
에우리아는 보라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있던 끈을 풀어 조금 더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어, 좀."
그 역시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아르센이 툴툴거렸다.
"위험할 것을 알면서 같이 가자 하셨습니까."
"그래도 싸울 줄은 알잖아, 너도."
발칸의 부군단장을 '싸울 줄은 아는 꼬맹이' 정도로 평가한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을 보던 아르센이 씩 웃으며 함께 일어났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목도하게 되었다.
얼음 속성의 5서클 마스터 아르센을 싸움 좀 하는 꼬맹이로 취급하는 마법사. 그럴 능력이 충분한 몇 안되는 마법사의 마법을.
- 파직, 파지직!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하는 하늘, 저무는 태양을 등지고 선 마법사의 손에 옅은 보랏빛의 스파크가 일었다. 발 밑에서는 물의 힘을 담은 푸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중 속성.
물과 전기를 모두 다루는 5서클 마스터 마법사.
그것이, 에우리아 세이렌이었다.
* * *
국왕 르메인의 집무공간인 아르피아 궁.
국왕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머무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외부인의 방문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런 아르피아 궁의 1층에는 그 어떤 외부인의 방문도 허용되지 않는 오로지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역대 왕가의 초상화 원본이 전부 전시되어 있는 곳.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 걸려있는 국왕들의 초상화는 전부 이 곳에 있는 것의 사본이었다.
'기억의 전당.'
있는 것은 알았지만 피했던 곳이다.
예전의 칼리안 역시 단 한 번도 그 곳을 찾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참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 히나를 빌헬름관에 데려다주고 얀을 함께 두고 왔다. 아직은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 만큼 수어를 배우지 못했으므로 당분간은 그리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둔 뒤 혼자 이 곳을 찾아왔다. 왕족이 아닌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신성한 곳이었으니 호위기사들은 문 밖에 둔 채였다.
전당은 1층 전체를 할애하여 만든 탓에 단순히 넓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넓었다. 마치 그 유구한 역사를 직접 확인하라는 듯한 모양새인 것이다. 다만 역사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조금 더 긴 시간을 이어왔던 왕조인 세크리티아에서 지냈던 칼리안은 그 수많은 초상화에도 그리 큰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 뚜벅, 뚜벅.
칼리안이 고요한 구두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시작은 당연하겠지만 초대왕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의 초상화였다.
지그프리드령에 갔을 때 만나보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스파니안과 익히 여러 번 보아 익숙한 하츠아라. 그들의 아들이자 2대 카이리스 국왕의 왕세자 시절이 담긴 초상화도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 곳을 지나쳐 계속 걸어들어갔다.
2대에서 3대로, 4대로.
그렇게 쭉 걸어들어간 칼리안의 발이 가장 마지막 초상화가 놓인 곳 앞에서 멈춰섰다.
'르메인 루 룬 카이리스.'
현 국왕이자 세 왕자의 아버지인 르메인의 조금 젊은 시절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아직 세자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란델과 플란츠, 그리고 칼리안의 초상화는 없었다.
아랫쪽으로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 아리엘리의 초상화가 보였다. 그 옆의 빈 공간은 아마도 실리케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었다.
눈 앞을 한동안 응시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정말 닮으셨네요."
선홍색의 머리. 색이 달랐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거울 속에서 보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쌍커풀 없이 큰 눈 콧날 입매. 정말 많이 닮았다. 낯설지만 분명한 칼리안의 모친이었다.
후궁 프레이야 휘트린.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는 복도에도 복제 초상화가 있지만 한 번도 그것을 바라본 적 없었다. 때문에 처음으로 마주한 그 얼굴을 칼리안은 말 없이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과의 의미를 담은 인사였다.
- 달칵.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먼 곳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집무실이 아닌 그리고 걸음하기 조금 꺼려지는 곳에서 만나자는 요청에 응한 것은 물론 르메인이었다.
멀리 전당의 입구 쪽을 한 번 바라본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 프레이야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다시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르메인이 칼리안의 곁으로 걸어왔다.
르메인 쪽으로 몸을 돌린 칼리안이 예를 보였다.
칼리안으로부터 아이샤에게로, 그리고 비어있는 실리케와 프레이야의 초상화를 한 번씩 쳐다본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 곳에서 만나자 하였느냐."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불편해하는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아이샤의 얼굴도 프레이야의 얼굴도 그리고 실리케의 빈자리도. 모두 다 편치 않을 터였다. 그것을 알면서 굳이 이 곳으로 와달라 요청한 이유를 말하기 위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그렇게 되풀이하는 목소리가 실로 부드러웠다.
관심 두지 못한 사이에 죽어가던, 그로 인해 르메인으로부터 유일하게 '내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막내아들. 어느새 달라져 온갖 사고는 혼자 다 치고 다니는 말썽꾸러기.
하지만 유일하게 르메인에게 '부탁'을 하는 아들이 바로 칼리안이 아니던가.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이야기 해보거라."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초상화 속. 자신의 것과 꼭 닮은 붉은 눈을 응시하면서 칼리안이 말했다.
"제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시켜 주십시오, 전하."
손에 쥔 것을 전부 내려놓은 칼리안이 이렇게.
정통성을 입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