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53화 (154/527)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3)

대륙에 여섯, 아니 사실상 다섯 뿐인 소드 마스터.

그리고 대륙에 셋 뿐인 7서클 마법사.

되도록 피하려 했고 어지간해서는 피했어야 했을 둘의 대련이었다. 물론 앨런이야 칼리안의 공격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준 정도라 해야 하겠으나 칼리안은 아니었다. 지니고 있던 오러를 모조리 털어낼 만큼 온 힘을 다해 앨런을 상대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둘의 대결이 불러온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일단 칼리안의 오러가 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달라졌다.

그것은 마치 짙은 핏빛 같기도 했고 어둠 속에 모질게 남겨진 단 하나의 불씨같기도 했으며 지독한 죽음과 지고한 생명을 함께 담은 것 같기도 했다.

"실로 유일무이한 오러가 아닙니까, 왕자님."

물론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나 그의 오러가 느껴지는지를 확인해야 정확하겠지만 에반보다 오러의 양이 많아진 것이 맞다면 더 이상 오러를 숨기는 마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정신력의 소모도 덜 할 것이고 얀과의 키 크기 내기에서 이길 확률도 늘어날 터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란 말인가.

때문에 앨런은 칼리안의 오러를 보며 축하를 보냈다.

"축하드립니다. 아무튼 제가 제자 하나는 잘 두었습니다."

물론 칼리안은 기뻐했다.

칼리안의 오러가 늘어난 것이 이번 대련이 가져 온 결과의 전부였다면 앨런이 그러하듯 그저 기뻐하기만 했을 것이다.

"······ 음."

하지만 칼리안은 기뻐하기만 할 수가 없었다.

칼리안이 달빛을 받으며 앉아있던 조그만 바위는 멀쩡했다. 그것만 멀쩡했다. 바위를 중심으로 온 사방이 초토화됐다.

칼리안의 검은 카이리스 왕궁에서 가장 날카로울 것이고 앨런의 불길은 이 대륙에서 가장 뜨거울 것이다. 사정 없이 조각났다 하면 딱 어울릴 바위와 나무들, 그리고 숯처럼 검게 그을린 대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물론 여기까지는 예상했으므로 주변의 상황이 칼리안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칼리안은 숲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그냥 모르는 척 하려 했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니 알려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만약 르메인이 알게 된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부서질 바위이며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다시 자랄 나무인 것을. 그리고 이제 르메인도 이 정도 사고는 그냥 그러려니 할 정도의 담력은 쌓였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앨런과 함께 기뻐하기를 마친 뒤 레이븐의 등에 얹힌 채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돌아가서 그 좋아하는 목욕이나 하며 피로를 푼 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건, 흠. 그래. 이건 좀 고민이 되는군."

"상황을 보면 군단장님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위 아래를 생각하면 그래도 왕자님이 먼저 아닐까?"

앨런을 찾으러 간 마법사는 분명 한 명이었다.

아르피아 궁에 앨런이 없자 마법사 대표는 급한대로 칼리안을 찾아갔고 칼리안의 시종을 통해 칼리안과 앨런이 '숲'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법사는 숲으로 왔다. 호기심 많은 몇몇이 숲으로 따라왔다.

그래서 빌헬름 관에 총 세 개의 동상이 들어앉게 생겼다.

일의 원인과 결과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다. 칼리안이 앨런과 대련을 했고 빌헬름 관에 세워질 동상이 늘어났다.

아무래도 히나가 빌헬름에 가면 가장 먼저 치료해야 할 것은 저들의 머리가 아닐까.

'그렇게 되면 히나의 동상을 세우겠다 하겠지.'

정말 다 돌았나봐.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칼리안은 그만 이마를 부여잡고 레이븐에 기대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앨런은 칼리안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는 들어가 쉬시지요. 헤이시아 궁 쪽의 일은 제가 확인을 하겠습니다."

지금 칼리안의 피로를 불러온 것이 앨런과의 대련인지 아니면 하얀 로브 입은 미친자들이 세우고 있는 빌헬름관의 인테리어 계획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칼리안이 녹초가 된 것만은 분명해서 하는 소리였다.

"잠시 들르기만 할 것이니 괜찮습니다."

칼리안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앨런을 부르러 온 것이라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칼리안도 앨런과 같이 움직일 생각인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헤이시아 궁이 아닌가.

시스파니안이 머물던 곳에서 '빛을 내는' 무언가가 있다는데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 것을 또 혼자 드십니까. 확인 후에 말씀을 드리러 갈 터이니 오늘은 쉬십시오."

분명 고민거리를 나눠 주기로 해놓고 이런 말을 하니 또 혼자 무리하려 드느냐는 의미로 꺼낸 소리였다. 이래서야 조약돌이 '사람이 만든 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칼리안에게 알릴 수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러가 싹 빠져서 일반인 체력으로 돌아온 탓에 피로가 몰려오고 있던 칼리안에 비해, 앨런은 가벼운 밤 산책을 마친 듯한 정도의 컨디션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확인되는대로 꼭 알려주세요."

"걱정은 마시지요."

그리하여 칼리안은 헤이시아 궁에서 발견됐다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기어코 숲까지 부순 것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발칸에 동상이 세워지는 것을 막을지에 대한 걱정 등을 일단 모두 앨런에게 넘긴 채 체르밀로 향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체이스의 정보를 외워 놓느라 닷새 동안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으니 앨런의 말을 들어 일단은 좀 쉬기 위해서였다.

- 다각, 다각.

칼리안의 결정을 눈치 챈 레이븐이 체르밀 궁을 향해 알아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앨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헤이시아 궁이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남겨진 발칸 마법사들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 각자의 말에 올랐다.

앨런을 따라 공간이동을 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숲에서 헤이시아 궁 까지의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앨런 정도가 아니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으니까.

* * *

그래. 분명히 있었다.

옅은 베이지색 소파와 은백색의 고양이 사이에 검은 색 칼리안이 앉아있던 적이 분명 있었다.

- 타악!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은색의 소파와 은백색의 고양이 사이에 삶은 완두콩같은 연두색 놈이 앉아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가 곧바로 닫은 칼리안이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도 제 발로 한 번 그런 짓을 해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자신의 방이 무슨 색인지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곳이 3층인지 4층인지를 둘러보는 헛짓을 하지는 않았다.

"안 들어와도 돼. 알아서 잘게. 너무 피곤해서."

대신 함께 들어와 잠자리를 정리해주려 하는 얀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와 있는 플란츠를 얀이 곱게 볼 리 만무했으니까.

칼리안의 얼굴이 정말로 좋지 않았으므로 얀은 한껏 걱정하는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 있으면 부르세요."

"푹 자면 괜찮아져. 걱정 마."

그렇게 얀을 안심시켜 돌려보낸 칼리안이 방의 불을 켜며 사일런트를 간신히 발현했다. 문 밖에 서 있는 두 명의 호위기사에게 이 시간에 몰래 찾아온 손님이 있음을 들켜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후에는 이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도 하필, 오늘, 그리고 지금.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다.

대련의 여파로 몰골이 엉망인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은 마법사들이 숲에 찾아온 그 순간 이미 옷매무새를 싹 정리했다. 남들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파리하게 변한 안색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칼리안의 얼굴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은 무리하는 것이 취미인가보군."

"내 형님께서는 이제 걱정을 다 해주시는지."

"짖지 말고."

어김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곧 플란츠가 고양이를 안은 자세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박 하루는 퍼질러 자야 할 것 같은 놈을 앞에 두고 떠들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플란츠가 일어났는데도 깨지 않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저 정도로 잠에 빠져들 만큼 한참 동안 이 곳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같은 높이에서 칼리안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기사단에 새가 있는 것 같은데."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왕실 기사단에 숨어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와."

진심어린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체이스와 플란츠 모두를 향한 감탄이었다.

"몰랐습니다."

플란츠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안은 정말로 몰랐던 사실이다. 과거에는 기사단에까지 세작을 심어두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것은 체이스가 한 일이다.

타국의 왕실 기사단에 세작을 둔다니.

기사단 카렌과 라온에는 르메인의 손이 닿지 못한다. 르메인이 하는 일은 이미 확정된 기사단원에 대한 마지막 보고를 받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이것은 기사단에 한해 여전히 변함 없는 르메인의 무능과 에반의 빈틈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고도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튼 칼리안은 에반의 몸통에 세작을 심어 둔 체이스의 대담함에,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플란츠의 눈치에 감탄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몰라. 누구인지도."

"그럼 새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플란츠가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어느새 주머니에 있던데."

기사단을 만났을 테니 기사들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든 이야기를 나눠보든 했을 터였다. 그 사이 누군가 플란츠에게 이 쪽지를 넘긴 모양이다.

플란츠 역시 검을 곧잘 다룬다. 그런 플란츠에게 몰래 무언가를 전해 줄 수 있을 정도라면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뜻이다.

하기사. 왕궁에 직접 들어 올 세작이니 그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지.

플란츠로부터 쪽지를 받아든 칼리안은 내용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잠시 눈을 내리떴다. 고민에 가까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다.

세작을 숨기는 것은 브리센에 반하는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선택지에 대해서.

잠시 후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에게 전하십시오. 세작이 있다고."

"알려지면.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곤란해지실텐데."

체이스와 세크리티아의 곤란함.

그리고 플란츠의 심장.

어떤 것의 무게가 더 나가는가.

"전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숨겨두면 역으로 쓸 데가 있겠지."

칼리안의 답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세작을 그대로 두면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를 속이는 것에 쓸모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가짜 명분이겠지만 그렇다 해서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반대로 이용하기 위해 세작을 살려두는 것은 브리센에 반하는 행동이라 보기 어려울 테니까.

"전서구 노릇이나 하는 새는 무시해도 돼."

"기사단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있는 것을 알게 된 카이리스의 왕자님이 그런 말을 하십니까."

"상관없잖아."

사실 새들이 더 알아갈 것도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기밀은 플란츠가 제 입으로 직접 다 알려줬지 않나. 게다가 플란츠 나름대로 체이스나 칼리안을 배려하려는 것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때문에 더 이상의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은 그제야 손에 들린 쪽지를 펼쳤다.

- 그날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글씨체.

바로 오늘 아침까지 칼리안이 기를 쓰고 외웠던 자료에 있던 것과 똑같은 글씨체.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주었다 했을 때 이미 예상했지만 그것은 체이스의 것이었다.

쪽지에는 간단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 믿는 이와 부정하는 이를 만나게 한 것은 주인의 아들입니다.

칼리안은 그 내용을 두 번 읽지도 않았다.

세렌티를 믿는 신관과 세렌티를 부정하는 대사막의 전사들이 손을 잡도록 힘을 쓴 것은 텐실의 국왕이 아닌 왕세자라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말이었으니까.

손에서 작은 불을 일으켜 쪽지를 태우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텐실이라면 계약에 어긋날 일 없지 않나. 내가 알아도."

"여기 적힌 내용이나 그날 제가 체이스 왕세자님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일에 대해 형님께서 아시게 되더라도 계약에 침해되는 것이 없기는 하겠습니다만."

잠시 생각해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왜."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절대 말씀 안 드릴 거라고. 란델 형님과 관련된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것도 이미 말씀 드렸을텐데요."

"그런 낯짝으로 잘도 짖지."

"신경쓰실 일 아닙니다."

칼리안의 대답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재수없는 웃음이다.

"내 아우님이······."

이렇게 운을 뗀 플란츠가 테라스 밖을 잠시 쳐다봤다. 그 시선이 어느 방향을 향한 것인지 본 칼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마법사와 싸울 만한 이유가 대체 뭘까."

"······ 하."

칼리안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지금 플란츠가 무엇을 입에 담는지 알아서였다.

"지금 형님 심장 두고 저를 협박하시는겁니까."

"내 머리가 내 아우님 것보다 나을테니, 꺼내. 그만 짖고."

텐실에 대한 조사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그렇지 않으면 '칼리안이 무엇을 준비하려 앨런과 대련하는지'에 대해 더 생각하겠다고.

"도와줄테니까."

도와주겠단다.

제 목숨을 걸고 협박하는 망할 형 놈이 도와주겠단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료.

괜히 태웠다.

······ 다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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