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52화 (153/527)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2)

그날 낮.

'오늘 일과 끝나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스승님.'

집무실을 직접 찾아온 칼리안의 이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앨런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따라 나서지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르메인이 넘긴 일 따위 칼리안에 비하면 중요할쏘냐.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 앨런이 아니던가.

그런데 칼리안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오러를 뒤집으려면 아침보다는 밤이 나아서요.'

그러더니 이렇게 앨런으로서는 알쏭달쏭하기만 한 말을 했다.

뭐 어쨌든 어여쁜 제자가 그렇다는 데 그런 것이겠지. 밤이 낫다 하면 낮을 밤으로 바꾸어서라도 밤에 만나야지, 암.

다행히 칼리안은 앨런에게 낮을 밤으로 바꾸는 일까지 부탁하지는 않았다. 얌전히 조금만 기다렸다가 숲 속의 적당한 장소를 자신이 먼저 보아 둘 테니 찾아와 달라고만 했다. 때문에 앨런은 흔쾌히 알겠다 답했다.

그렇게 밤이 되고 보름달이 떴다.

앨런은 조금 남은 일거리를 아르센에게 넘길까 하다가 녀석이 지금 칼리안이 시킨 일을 하러 궁을 떠난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맞은편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남은 서류를 집무실 주인의 책상 위에 곱게 올려놨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앉은 사람에게 '늙은이 힘들어서 오늘은 먼저 갑니다' 하고 자신있게 말한 뒤 멋지게 돌아나왔다. 그 뒤에는 후다닥 숲으로 왔다.

- 다각, 다각.

때마침 숲과 왕궁의 경계선 너머에서 검은 말 한 마리가 걸어나왔다. 오른쪽 앞 발목만 하얀 가끔 고약하지만 그만큼 똑똑한 칼리안의 말이었다.

"네 주인은 숲 속에 있느냐?"

앨런이 이렇게 묻자 도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푸르릉 소리를 내고는 돌아섰다. 그것이 마치 칼리안을 찾는 중이라면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처럼 여겨진 앨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고놈 성깔 참 제 주인이랑 잘 어울린다 싶어서였다.

아무튼 칼리안이 숲에 이미 도착한 것을 알았으니 숲 속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어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해도 마법은 쓸 수 있었으니까.

숲에 들어서고 오래지 않아 칼리안을 찾은 앨런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니 주변은 온통 달빛에 젖은 녹빛이다. 빨간 눈의 고양이같은 제자는 새하얀 달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앉아 있었다.

"스승님."

마주 쳐다보면 낯이 닳을까 같이 걸으면 발이 부르틀까 그저 부둥부둥 업고만 다녀도 모자랄 그 어여쁜 제자가 반가운 얼굴로 앨런을 불렀다.

- 쉬이익!

그러더니 곱디 고운 그 손으로 서슬퍼런 칼을 날렸다.

찰나의 순간, 앨런이 허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칼리안은 분명 잠시 시간을 내어 달라 했지 잠시 목숨을 내어 달라고는 안했으니까.

뭐 아무렴 어떠한가.

그러니 저러니 해도 어여쁘기만 한 것을.

때문에 앨런은 자신의 목젖을 향해 치닫는 그 야무진 칼날을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기꺼운 미소가 그려지고, 칼을 막기 위한 붉은 장막과 소리를 막기 위한 대규모 사일런트가 동시에 펼쳐졌다.

- 콰아앙!

그리고 이렇게 거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아침부터 계속 앨런이 바빴다.

아르센은 그날부터 자리를 비웠다.

플란츠는 기사들을 만나느라 빌헬름관에 없었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신이 났다.

딱 두 시간 동안 신이 났다.

아르센이 해야 할 일이 마법사들에게 내려온 까닭에 애석하게도 그 이상 신이 나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날 아침 마법사들은 오늘로 끝나게 된 헤이시아 궁의 잔해 처리 마무리 작업과 아르센이 남겨놓고 간 서류 처리 업무를 어떻게 나눌지 깊이 고민했다. 딱 두 시간 동안 고민했다.

"난 잔해 처리."

"나도 잔해 처리."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 쉰 명이 전부 다 잔해 처리에 지원했고 점심 시간이 됐다. 그래서 놈들은 일단 점심을 먹고 제비 뽑기를 통해 인원을 반반 나눴다. 그것 역시 딱 두 시간이 걸렸다.

무의미한 여섯 시간을 날려버린 50인의 또라이들이 부랴부랴 일을 하기 시작했다. 훈련은 하지도 못하고 야근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잔해 처리와 서류 처리에 다시 네 시간이 흘렀고, 결국.

저녁 시간이 됐다.

아, 물론 마법사들은 똑똑하다.

단지 돌았을 뿐이다.

아무튼 똑똑해서 돈 것인지 돌아서 똑똑한 것인지 모를 발칸의 마법사들은 부랴부랴 저녁을 챙겨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일을 끝냈다.

문제는 그 뒤에 생겼다.

"이게······ 뭐지?"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마법사 니들렌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잔해가 싹 치워진 헤이시아 궁 터의 한 가운데 선 채였다.

그다지 한 일은 없지만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덕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탄산수를 홀짝이던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헤이시아 궁에 지하는 없었지 않나?"

"없었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 같은 진지한 얼굴이 된 채로 마법사들이 바닥의 한 지점을 쳐다봤다. 섣불리 다가서거나 손대려 하지 않은 채였다.

"군단장님 모셔오겠네."

낯선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마법사가 아닌가.

때문에 그들 중 한 명이 아르피아 궁으로 갔고 나머지 마법사들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같은 곳을 계속 주시했다.

흙더미 속.

마법사들의 시선이 모여든 곳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 *

- 대부분의 기사들은 오러를 깨치기 전에 마나부터 쌓는다. 어차피 그렇게 해 봐야 검의 길에 오르는 건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들 그렇게 하지. 너도 그랬을 테고.

칼리안이 앨런을 불렀던 것은 과거의 스승이었던 기사 테일란의 말 때문이었다.

- 마법사들은 쌓아 둔 마나 그 자체를 쓰니 상관 없지만 기사는 다르다. 잘못 쌓인 마나는 아무리 많아도 오러로 발현되지 않지. 다만 오러를 깨치기 전에 쌓아 둔 마나가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나. 마나를 그렇게 많이 쌓아 둘 정도면 기사 말고 마법사를 하는 게 나으니까. 그러니 차이가 미미해서 다들 무시하고 넘길 뿐이지.

그 때에는 베른도 그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테일란도 그저 참고하라 말해줬을 뿐 무언가를 바꾸길 원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미미했으니까.

그랬던 칼리안이 테일란의 말을 상기하게 된 것은 늑대들의 습격을 받았던 날의 일 때문이었다.

분명 그날 칼리안은 뽑아낼 수 있을 만큼의 오러를 모두 뽑아내어 검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검술만으로는 놈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고 윈드 스피어를 사용했다.

발현된 마법은 그대로 놈의 몸을 관통했다.

놈은 그 붉은 빛의 오러를 사용하는 이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마법이 놈의 몸을 한 방에 꿰뚫었다. 마치 아르센의 공격처럼 말이다.

'마법이 너무 강했어.'

그 후 남은 네 명을 상대할 때에도 마법이 발현됐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니 테일란의 말이 생각났다. 그 날 그렇게 마법이 강했던 이유도 짐작하게 되었다. 바로, 오러로 바뀌지 않았던 잔여 마나였다.

그래서 앨런을 불렀다.

'오러를 뒤집는' 일을 하려고.

베른에게 있어서는 치환되지 않은 마나가 지나치게 미미했을지 모르지만 칼리안은 아니었으니까.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받은 옛 칼리안의 마나는 결코 미미하지 않았으니까.

- 콰아아앙!

뻗어나간 검 끝이 붉은 막에 걸렸다.

여섯 번의 공격이 가해졌으나 애석하게도 앨런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 만들어 낸 붉은 장막을 새로 펼치지도 않았다.

- 우웅!

칼리안의 검에 푸른 빛이 어렸다.

오러의 힘을 얻은 칼리안의 검이 찬 빛을 뚝뚝 흘렸다.

칼리안은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앨런의 앞에 놓인 붉은 장막을 향해서였다.

- 서걱!

오러의 힘을 싣고 나서야 붉은 장막이 잘려나가듯 길게 갈라지더니 흩어졌다. 그와 함께 앨런의 모습도 사라지며 저만치 먼 곳에 다시 나타났다.

앨런은 검을 다루는 이가 아니었으므로 그 눈이 칼리안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굳이 그런 것을 눈으로 보아야 할 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장막이 사라짐을 직감한 즉시 몸을 옮긴 것이었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리고 득달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 쌔애액! 카강! 카아앙!

어느새 다시 생성된 붉은 막이 크게 흔들리다 사라졌다.

몸을 감싸던 장막을 잃은 앨런의 모습이 먼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몸을 보호하는 대신 거대한 창을 만들어 쏘아보냈다.

- 쉬이익!

이글거리는 불의 창이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드디어 공격을 해 오는 스승의 모습에 씩 웃은 칼리안이 검을 넓게 휘둘렀다.

- 카앙!

아르센의 창이었다면 부서졌거나 튕겨 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얼음이니까.

앨런의 불은 달랐다.

투명한 검에 맞부딪힌 불꽃의 창이 마치 먹잇감의 몸을 휘감는 거대한 뱀과 같이 칼리안의 검날에 얽혀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길이를 늘려가듯 몸집을 부풀리며 칼리안의 팔을 집어삼키려 했다.

살아있는 불.

앨런의 불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보게 된 칼리안의 미소가 짙게 변했다.

- 우우웅!

그와 함께 손에 들린 검이 깊은 울음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다시 뭉쳤다. 일순간 숙주를 잃은 불이 투둑투둑 함께 끊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져갔다.

칼리안의 검에 푸른 빛의 회오리가 감겨들었다. 불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얼음이니, 들고 있던 검에 얼음의 속성을 담은 것이다. 청명한 물빛으로 빛나는 그 검을 든 채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모습을 숨겼다.

앨런의 팔이 조용히 움직였다.

칼 좀 다루는 마법사 제자가 과연 어디까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즐거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 따악!

손가락 끝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 화아악!

칼리안의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붉은 빛을 넘어 새하얗게 타오르는 그 불길이 금방이라도 칼리안을 태워 없앨 것처럼 모든 것을 제 아가리 속에 넣고 삼켜낼 것처럼 위협을 해 왔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검이 넓은 방패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전신을 감싸안을 만큼 넓어진 방패에 어린 푸른 빛이 마치 지금의 하늘을 모아 담은 것처럼 반짝였다.

- 쉬이익!

지면을 뚫고 솟아오른 물줄기 같은 여러 갈래의 불이 그런 칼리안의 온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온기도 한기도 느끼지 않게 된 몸 속에 저릿한 열기가 든다.

불길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쏟아지듯 이어지는 불길 속으로 뛰어든 칼리안이 몸에 불이 붙을 여유를 두지 않을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가히 찰나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시간이 흐른 뒤 칼리안의 신형이 앨런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 카가강! 콰앙!

칼리안은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 있는대로 오러를 뽑아내며 앨런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붉은 빛이 일렁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앨런의 보호막이 사라졌다.

칼리안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 감춰진 앨런의 등을 그 안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 쌔애액!

여지 없이 앨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로 불의 창이 다시 날아왔다. 칼리안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하며 한번 더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 카아앙! 캉!

마법사와 기사의 공방이다.

아니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공방이다.

칼리안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모조리 타올랐다. 앨런이 사라진 자리는 모두 잘려나갔다. 오로지 두 사람만 조금도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 카가강!

앨런은 끊임 없이 자리를 바꿔가며 공격했고 칼리안은 그것들을 쳐내거나 피해내며 앨런의 뒤를 쫓았다.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모를 앨런의 흔적을 따르는 칼리안의 공격에 머뭇거림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공격이 날아오면 쳐내거나 막아내고 뒤이어 검을 내뻗고 휘둘렀다.

칼리안의 입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앨런이 강하리라는 것은 당연히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일 줄은 몰랐다.

- 카아앙!

다시 한 번 칼리안의 검이 붉은 막을 가격했다. 푸른 빛과 붉은 빛이 서로 얽히다 붉은 막이 파스스 흩어졌다.

이 쯤 되면 또 다른 곳으로 피하던 앨런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붉은 막도 만들지 않은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발현된 말 머리통만한 화염구가 칼리안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칼리안은 위험을 느낌과 동시에 검을 방패로 바꾸었다. 몸을 보호하던 오러를 모조리 방패의 곁에 둘렀다. 그 위에 얼음의 막을 덧씌웠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실드까지 발현했다.

- 콰아아앙!

순식간에 주변의 산소를 빨아들인 화염구는 다급히 대처하는 칼리안을 비웃듯 곧바로 새하얀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솔새가 내던진 마력탄이나 아르센의 화염구와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흰 빛의 화염구는 그 위력부터 달랐다.

- 콰직! 카가강!

불에 닿음과 동시에 실드가 조각나 깨어지고 얼음은 사라졌다.

오러의 푸른빛이 출렁일 정도의 거대한 폭발력에 칼리안의 몸이 저만치 먼 곳으로 나가 떨어졌다. 오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어디 한 군데는 사라졌을 만큼의 위력이다.

저도 모르게 큭 하는 소리를 내뱉은 칼리안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쉼 없이 검을 생성했다.

- 우우웅!

조금 전보다 확연히 옅어진 푸른 빛이 검을 감쌌다. 칼리안은 지치지도 않고 다시 앨런에게 달려들었다. 앨런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칼리안의 눈 앞으로 새하얀 화염의 창이 뻗어나왔다. 머리보다 빠르게 반응한 팔의 움직임이 그것을 떨쳐냈다.

- 콰지직!

갈라져나간 창 끝이 바닥에 박히며 대지가 붉게 타올랐다. 그런 모습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은 칼리안이 또 한 번 앨런에게 달려들려 할 때.

- 파삭!

단단한 것이 완전히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들린 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오러를 운용하려 하였으나 텅 빈 단전에서 올라오는 힘이 없었다. 사용할 수 있을 오러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드디어.'

단전이 텅 빈 것을 느낀 칼리안이 제 자리에 멈춰섰다.

몰려오는 탈력감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고 싶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선 채로 칼리안이 긴 숨을 내뱉었다.

붉은 눈이 서서히 감겨든다.

- 두근!

오러를 남김없이 비워낼 때.

단 한 줌의 오러도 남아있지 않을 때.

그리하여 그저 마법으로만 발현되었던 옛 칼리안의 마나까지도 모두 오러로 변환할 수 있을 때.

그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 두근!

칼리안의 심장이 요동쳤다.

소비되는 기존의 오러가 자연스럽게 다시 쌓이는 시간조차 주지 않을 만큼의 맹공을 퍼부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칼리안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받아 쌓아올렸던 옛 칼리안의 마나 세 개의 서클을 이루고 있던 그 방대한 마나가 심장에서 흘러나와 칼리안의 단전으로 향했다.

칼리안은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흘러들어오는 마나를 오러로 바꾸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뻗어나오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마나를 쉼 없이 운용해나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그 힘이 칼리안의 단전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 두근!

칼리안의 주변으로 냉막한 기운이 몰려든다.

화염의 힘에 달아올랐던 대지가 식는다.

언젠가 아르센이 느꼈던 예리한 칼날과 같은 마력이 칼리안의 몸을 휘감아돈다.

단전을 거쳐 오러로 변환된 마나가 다시 심장의 서클로 들어간다. 여전히 세차게 회전하는 세 개의 서클을 이루는 힘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 두근!

바뀐 것이 있다면.

오로지 네 번째의 서클만 오러의 힘이었던 예전에 비해 이제는 네 개의 서클이 모두 오러의 힘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 네 개의 서클을 이루는 마나를 모조리 오러로 전환해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 옛 칼리안이 쌓아 둔 마나를 기반으로 다시 제대로 된 오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마도 이제는 에반의 앞에서 오러를 감출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

"이제."

검게 변한 대지의 한 가운데 선 칼리안이 깊이 고개숙여 인사했다.

"되었습니다. 스승님."

옛 칼리안을 닮은, 그리고 베른을 닮은.

검붉은 빛의 검이 칼리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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