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51화 (152/527)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1)

- 똑똑.

사실 노크를 할 때마다 작은 고민을 한다.

만약 안에 있던 이가 '누구냐'라고 물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안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없다면 왜 노크를 하느냐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비어 있는 곳이라 해도 왕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히나의 정론이었다.

생각한대로 노크에 화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히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불을 켰다.

- 탁!

그리고 재빨리 다시 밖으로 나왔다. 굉장히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였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히나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외쳤다.

'아닌데? 맞는데?'

시녀로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칼리안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트를 확인하고 방을 청소해놓기 위해 들어간 참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은 자리에 없을 것이라 했으니 조금 여유있게 청소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후로는 자신의 손으로 청소를 해 줄 일도 없을 것이라서 더 꼼꼼하게 보아 줄 마음도 먹었다.

그런데.

'왜 저 분이 여기 있지?'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히나가 소리를 지르지 못했기 때문이지 이 상황에 놀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히나는 정말 많이 놀랐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이 검은색 일색임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경황없이 되돌아 나올 만큼 놀랐다.

눈이 화등잔만큼 커진 히나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3층과 4층을 하도 많이 오갔으니 층 수를 헷갈린 것인지를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3층 맞아."

히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소리 없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방 안에서 들려 온 탓이다.

곧 히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짙은 색의 커튼과 카펫, 소파. 멀리 침실 안 쪽으로 보이는 검은 시트, 검은 가구. 주인의 평소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검은 색 일색의 내부가 이 곳이 칼리안의 방이 맞다는 것을 다시 알려줬다.

그런데 하얀 고양이와 검은 소파 사이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연두색 왕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히나가 들어오는 소리에 칼리안의 방에 또 멋대로 들어와 멋대로 생각에 잠겨 있던 플란츠가 눈을 뜨고 히나를 쳐다봤다. 그래야 히나가 하는 말을 볼 수 있으니까.

플란츠의 시선이 닿은 히나가 얼른 말을 꺼냈다.

- 제가, 실수를 했어요. 정말······.

칼리안의 방에 플란츠가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예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나갔었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됐어."

플란츠는 이렇게 히나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남의 방에 들어와 있던 것은 플란츠였다. 그러니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왜 자신이 이 곳에 왔는지 설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저는, 청소를 하려고, 왔어요. 자상한 왕자님께서는, 지금 안 계세요. 숲에, 가셨어요.

히나의 말 중 몇 마디 말을 알아듣지 못한 플란츠가 잠시 대답 없이 히나를 쳐다봤다.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는 히나가 수첩을 꺼내 '숲'이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줬다.

칼리안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갔음을 안 플란츠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졌다. 다만 그 곳에 왜 갔는지를 물어볼 성격도 되지 못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곧 플란츠의 무릎에 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애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던 플란츠가 고양이 턱을 몇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데려와도 돼. 빌헬름에. 없잖아. 봐 줄 사람."

고양이.

카이리스에서 정신 나간 놈들만 잘 모아서 뭉쳐놓은 듯한 곳이지만 그래도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내지 못할 만큼 엉망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든 히나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또 좋은 왕자란다.

칼리안을 언급할 때에도 알아보지 못할 수어가 하나 붙어있었다. 때문에 히나가 이름을 말하기 어려우니 나름대로 구분해 부르는 호칭인 듯 하다는 것까지는 플란츠도 눈치를 챘다.

다만 자신에게 붙는 저 호칭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플란츠는 조용히 히나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잘 먹었어. 딸기."

너무 많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식단의 석찬을 마친 뒤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 후로 히나는 빌헬름 관에 갈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플란츠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 역시 이제야 저 말을 꺼냈다.

아마도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고맙다'는 의미의 말 말이다.

플란츠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란 얼굴을 해 보였던 히나가 소리 없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에는, 아이스크림만, 가져다 드릴게요.

여기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 하고. 다 이해해주고.

"그래."

고맙다고 말해주는 정말 좋은 왕자님도 있고.

* * *

달빛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싱그럽다.

카이리스 왕궁의 후문과 이어진 왕실 숲에서는 녹빛 짙은 풀내음이 났다. 개울이라 하기엔 크고 계곡이라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물줄기에서 시원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도 분명 그럴싸한 인공 개울이 있지만 아무렴 진짜만 할까.

언제나 고요한 세뉴강을 향해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며 칼리안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숲이 이렇게 클 줄도 몰랐고 이렇게 좋을 줄도 몰랐다. 베른은 물론 옛 칼리안도 몰랐다는 소리다.

카이리스 왕궁의 크기만큼 숲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칼리안은 분명히 이 곳이 그리 크지 않은 숲이라 들었다. 그런데 직접 와 보니 시스파니안이 아닌 이상 이 숲을 작다 느낄 이는 없을 정도의 크기다. 도대체가 넓이에 대한 카이리스 사람들의 배포가 얼마나 크면 이 숲을 보고 그런 평가를 한 것인지.

"전하께서도 여기에 오셨던 적이 없나봐."

사냥대회를 위해 찾는 숲은 따로 있었다.

숲은 왕실과 마찬가지로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기 때문에 짐승이 없었다. 그랬으니 책상 앞에만 앉아있다 가끔 사냥대회나 개최하는 르메인이 이 곳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신 적이 있었으면 나더러 여기 오라고는 못하셨을 것 같은데."

만약 르메인이 이 숲에 왔었다면, 그래서 이 곳이 돌아다니다 길을 잃기 딱 좋을 곳임을 알았다면 칼리안이 이 곳에 와도 된다는 허락은 절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튼 난 너만 믿어."

어둑한 주변을 둘러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오랜만의 산책, 그것도 초록색 가득한 숲으로의 밤 산책에 신이 난 레이븐이 푸릉 하는 소리를 내며 대답 비슷한 것을 했다.

레이븐이 있는 한 이 곳이 얼마나 어두워지든 혹은 얼마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든 걱정할 것이 없었다. 지금 당장 레이븐의 등에 기대 잠이 든다 해도 알아서 체르밀에 돌아가 줄 레이븐이 아닌가.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적막함이 감도니 혼잣말이 늘어난다.

그 역시 칼리안의 버릇이었다.

- 다각, 다각.

단단히 마른 흙길을 밟는 레이븐의 작은 발 소리가 물 소리와 참 잘 어울린다.

곧 레이븐은 달빛을 고스란히 받는 너른 땅 앞에 멈춰섰다. 칼리안이 원하던 장소를 귀신같이 찾아낸 것이다.

레이븐의 위에 앉은 채 바람을 즐기던 칼리안이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선 채 하늘을 쳐다봤다.

"보여, 레이븐?"

마치 칼리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븐이 살짝 고개를 치켜 들었다. 정말로 하늘을 보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웃었다.

"별이 다 파란색이야. 너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혼잣말일지 레이븐에게 건네는 말일지 모를 이야기를 했다.

봄과 여름의 사이에 든 하늘에는 유난히 푸른 별이 많다. 별의 색은 곧 그 별의 나이라는 말을 언젠가 들었었는데 그것과 연관짓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의 하늘에는 푸른 별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세크리티아에만 찾아오는 '세렌티의 시간'을 지상이 아닌 하늘에 불러낸 것처럼.

마치 파란 반딧불이가 온 세상에 내려앉은 것 같은 모습이 되는 시간. 베른이 태어났던 시간이기도 한 그 특별한 순간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보던 칼리안의 입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이 왕궁에서 그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사람은 아마 칼리안 자신 뿐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와 그것을 떠올려 보아야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멀리 가 있어. 부를 때까지 오지 말고. 위험하니까."

곧 칼리안이 레이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로부터 뺏어오게 된 이런저런 것들 중 가장 귀하다 할 수 있을 레이븐이 다시 한번 푸르륵 소리를 내곤 이제껏 온 길로 돌아갔다. 칼리안이 부를 때 까지는 알아서 먼 곳으로 가 있을 터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안이 작은 바위 위에 곱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칼리안은 근 며칠동안 서류를 들고 씨름을 했다.

체이스가 남겨놓고 간 '란델이 텐실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의 귀족세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상세히 적어 둔 서류였다. 그것을 모조리 기억해낸 것도 모자라 그 정도의 분량을 직접 적어서 건네 준 것도 참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는 될 두께의 종이 뭉치를 이해하고 통째로 외웠다. 그리고 내용을 모두 외웠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그것을 불에 태워 없앴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칼리안의 금고에 잘 보관해두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오늘 출발합니다, 왕자님.'

그렇게 며칠을 보냈을 때 아르센이 왕궁을 나섰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만나 그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구축중인 이동 마법진의 일로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가 그 곳에 갈 일이 있다 하여 아르센과 함께 보냈다. 인근까지만 동행을 한다 하더라도 아르센 혼자 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아르센을 보냈으니 칼리안도 준비라는 것을 해야 할 때였다. 그러려면 일단 근처에 사람이나 건물이 없어야 했다. 누군가 혹은 무엇이 있으면 분명 부서질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부서질 것 없는 숲을 찾아 온 참이었다.

그 후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 저벅, 저벅.

오도카니 앉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칼리안을 향해 다가오는 그리 크지 않은 발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 자리에 있어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한 사람이 칼리안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칼리안이 반가운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스승님."

앨런이었다.

칼리안은 어여쁜 제자의 '준비'를 돕기 위해 흔쾌히 이 곳까지 걸음한 앨런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투명한 오러의 검을 만들어냈다.

- 쉬이익!

예리한 파공음이 공기를 가른다.

칼리안이 앨런을 향해 마력과 오러를 가득 담은 검격을 날린 것이다.

주저하지 않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은 앨런의 손 끝에서는 붉은 빛의 장막이 펼쳐졌다.

그와 함께 칼리안의 신형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듯 사라지고,

- 콰아앙!

폭발음에 가까운 굉음이 고요한 숲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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