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있어야 할 곳 (9)
석양이 지고 먹구름이 든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아서, 석찬을 마친 칼리안은 드미레아와 아르센에게 각각 마차를 내어주도록 했다.
그 뒤 세뉴관에서 나온 칼리안이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얀과 만나고, 플란츠가 혼자서 체르밀에 가버린 것을 안 레릭이 방황하고, 집에 돌아가는 대신 술집에 모인 창백한 얼굴의 마법사들이 탄산수를 홀짝이며 칼리안의 동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덜 혼날지 토론하던 시간.
두 개의 분홍색 아이스크림을 든 히나가 수련장을 찾았다.
키리에에게 '미련 없이 죽는 것이 멋있는 줄 아느냐'며 화를 낸 이후로 아직 키리에를 제대로 만나 화해하지 못한 탓이다.
사실 화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키리에는 계속 히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히나가 키리에를 찾아간 것으로 이미 화해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아주 오랜만에 히나의 은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속상했겠네."
오늘 석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막 설명을 마친 뒤였다. 히나의 말을 제대로 전해듣지 못한 주방장이 그 말도 안되는 주문에 대해 얀이나 레릭에게 확인 한 번을 하지 않고 딸기 가득한 메뉴를 준비했다고.
얼핏 들으면 재밌다 할 일이겠으나 키리에는 웃지 않았다.
블루베리 때문에 히나와 말싸움을 했던 키리에는 그날 히나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입을 열어 소리를 내지 못할 뿐인데 불편하고 억울한 일이 너무 많다는 것도 잘 알았으니까.
- 여기 사람들, 다 이상해.
키리에의 말에 히나는 속상했는지 아닌지를 대답하는 대신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뭐가 이상한데?"
- 아무도, 화를 안내. 아무 말도, 안해.
당연하다는 듯이 수어를 배우겠다 하질 않나 수어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을 불편해하기는 커녕 말하는 방법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며 그냥 넘어가질 않나.
"너를 아껴서 그래."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히나로부터 받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플란츠가 수어를 배운 것은 키리에로서도 의외였지만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수어를 가르친 것은 키리에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칼리안이 시키지 않았어도 앨런이 나서서 수어 교육을 이야기했다 하지 않나. 만약 앨런이 아니었다면 아르센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체르밀의 몇몇 사람들이 수어를 배운 것도 칼리안의 지시가 아니었다. 그 역시 모두가 히나를 아껴서 그런 것이리라고, 키리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하나 뿐인 핏줄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주관적인 관점을 버리고 생각해보아도 히나는 누구나 아껴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 나, 여기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
그것을 히나라고 모를까.
이 곳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벙어리' 혹은 '장애'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히나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괴상한 저녁 식단을 나무라는 대신 딸기 아이스크림을 챙겨 준 칼리안과, 히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웃고 넘어간 플란츠가 생각난 까닭이다.
- 나, 다음 주부터, 저기로 가서, 일하게 될 거야. 정말, 열심히 할 거야.
발칸에서의 일.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조금 걱정하는 눈빛을 했다. 다시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상황에 대한 걱정이었다.
체르밀의 사람들은 다 좋았다 하지만 과연 발칸의 마법사들은 어떨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아르센이 어련히 알아서 챙겨주겠냐만은 오빠로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그리고, 베,로,니,카, 님이, 오신다고 했어. 나, 도와주신대. 그러니까, 걱정 하지 마.
세심하지 못한 칼리안은 이런 얘기를 키리에에게 전해주는 것도 잊어버렸다. 때문에 키리에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베로니카님이?"
상대적으로 신분에 따른 차별이 적은 리베른에서 자란 탓인지 아니면 앨런의 영향인지 몰라도 베로니카는 히나를 꽤 격 없이 대했었다. 게다가 로젤리타에서 돌아오는 한 달 동안 일행 중 또래의 여자아이라고는 둘 뿐이었으니 히나와 베로니카는 상당히 친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그것을 생각한 키리에가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그래도 너무 버릇없게 굴지 않도록 조심해."
고개를 끄덕여보인 히나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 그분도 좋고, 마법사님들도, 다 좋아. 자상한 왕자님도 좋고, 좋은 왕자님도 좋아. 무서운 왕자님은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괜찮았으니까. 여기에서도, 발,칸, 에서도, 잘 지낼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한 히나가 내려놓았던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며 행복한 표정을 했다.
세 명의 왕자 중에서 자상한 칼리안과 무서운 란델을 제외하는 간단한 뺄셈을 끝낸 키리에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보지 못한 채였다.
"······ 그랬구나, 히나."
히나의 손에서 '좋은'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히나식 표현에 따르면 '착하고 듬직한' 그냥 오빠 키리에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의 저 말을 조금만 일찍 들었어도 플란츠와의 대련 중에 그렇게 쉽게 칼을 거둘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분간 그 불한당 같은 놈과 직접 대련할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 맞다. 좋은 왕자님도, 딸기, 좋아하셔. 나도 좋아하는데.
애써 덤덤한 척 딸기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가던 키리에의 손이 딱 멈췄다. 그리고 키리에는 아이스크림을 고스란히 다시 내려놨다.
키리에가 선호하는 과일 목록에서 딸기가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은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 * *
"미야앙 애옹!"
체르밀 궁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조용히 테라스로 나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찾아와 무릎에 올라왔다. 그리고는 관심을 받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칼리안의 손에 제 머리를 부벼댔다.
칼리안이 녀석의 머리와 턱 밑을 간질이듯 쓰다듬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딸기 아이스크림 같은 분홍색 발바닥을 그대로 보여주며 칼리안의 손가락을 붙들려는 장난을 걸어 왔다.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녀석의 모습에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고양이가 이렇게 사람을 좋아했나."
칼리안이 아는 고양이는 늘 경계심이 많고 발톱을 세웠다. 무슨 일이 있든 그것이 누구든 제 곁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는 도도한 사냥꾼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녀석은 달랐다.
늘 누군가의 곁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장난을 쳤다. 제 곁에 사람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 똑똑.
두 번의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칼리안은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것도 없이 허락을 했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저 소리는 분명 얀의 것이니까.
곧 작게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테라스로 얀이 찾아왔다. 상쾌한 민트 향이 코 끝을 감돌았다.
테이블에 시원한 차 두 잔을 내려놓은 얀이 칼리안의 옆에 앉았다.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칼리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얘기가 잘못 전달돼서 오늘 실수가 있었습니다."
얀은 굳이 히나를 입에 담지 않은 채 말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얀과 얀이 내려놓은 차를 한 번씩 쳐다봤다. 그리고 고양이의 장난을 봤을 때처럼 작게 웃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민트 잎, 그리고 시나몬을 넣은 탄산수였다. 혹시라도 소화가 되지 않았을까봐 이렇게 준비를 해왔음이 분명하다.
"드시기 불편하셨죠. 딸기 싫어하셨던 것 제가 몰랐어서······.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언젠가 얀이 말린 딸기와 민트를 넣은 차를 건넸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는 용케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꺼려하는 것이 티가 난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았다는 게 맞을 테지만.'
옛 칼리안의 진짜 입맛은 오늘 식사 중에 알았다. 새로 접하게 된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떠올라서 알았다. 그 전까지는 칼리안도 그저 좋아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베른일 때는 그리 즐겨한 것이 아니었어서 그 많은 딸기 요리에 억지 웃음을 지었는데 얀이 그것을 알아 본 듯 했다.
"맛있게 잘 먹었어. 미안해 할 일 아니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답을 하다가 사과를 건네는 얀의 태도가 조금 묘하다는 느낌을 받은 칼리안이 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입맛 하나 맞춰주지 못한 것을 사과하는 태도는 분명 시종이었다. 그런데 허락 없이 옆에 앉은 모습은 시종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얀은 시종인 얀과 오랜 시간 칼리안을 지켜봐 온 보호자 시로이안, 두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사과를 건네는 것일 터였다.
"그 말 하려고 왔어? 식사 시간이잖아."
칼리안이 얀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보통은 칼리안이 식사를 모두 마친 뒤 시종과 시녀들이 따로 모여 식사를 했다. 다른 날이었다면 지금쯤 얀도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 이렇게 칼리안을 찾아왔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아까 플란츠 왕자님이 무슨 말을 하셨는데······."
이렇게 운을 뗀 얀의 말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은 조용히 앉아서 점점 검게 변해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제가 왕자님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도 제가 똑바로 보지 않고 있는 걸까, 왕자님이 변한 것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요."
나를 꽃 같다고 할 때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어.
라고 말하거나 고작 딸기 하나로 대체 어디까지 고민을 한 것이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말 없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얀의 말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왕자님께서 손에 든 것을 다 내려놓으셨다고도 하셨는데.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이해를 못했어요."
그 뒤에 이어졌던 원수같은 동생 놈 걱정해주던 형 다운 말이 생략된 까닭에, 칼리안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원수같은 형 놈이 어린애한테 대체 뭔 소리를 한 건가 싶어서였다. 그러다 플란츠가 더 어렸음을 깨닫고 얼른 다시 인상을 폈다.
아무튼 얀은 자신이 칼리안에 대해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으나 조금씩 어긋나는 것들이 눈에 보여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똑바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으나 대충 그런 의미일 터였다. 그것을 눈치 챈 플란츠가 얀에게 무슨 말을 한 듯 했고.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 고양이가 내 형님을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그리고는 이렇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내 형님이 고양이를 좋아해서 얘가 그렇게 기를 쓰고 올라갔던게 아닐까. 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민트도 시나몬도 향이 강했다.
적당히 넣었으면 잘 어울렸겠지만 칼리안을 걱정하는 만큼 듬뿍듬뿍 넣은 탄산수 맛은 최악이었다.
딸기보다 더 맛없는 그것을 또 맛있게 삼킨 칼리안이 말했다.
"나는 내 고양이가 어떤 녀석인지도 몰랐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다 알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비밀을 알게 돼서 슬퍼하면 얼마든지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었다. 혹시라도 지금의 칼리안이 싫어졌다 해도 어떻게든 붙들어 옆에 둘 자신도 있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걸 또 알게 되든 내가 어떻게 변하든. 어차피 넌 계속 같이 있을거잖아."
이곳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던 날.
손톱 자국 가득한 손으로 옷 주름을 펴주던 얀이다.
아무리 무시받는 왕자였어도 얀에게는 그 자체로 생의 전부였음을 칼리안이 안다. 그러니 칼리안의 한 발자국 뒤. 혹은 옆. 그 자리는 늘 얀의 자리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단 한 번도 얀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한 적 없었다.
"손에 들린 것 다 내려놔도 상관없어. 중요한 것 아니야. 몰랐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돼. 나에 대해 똑바로 안 봐도 돼.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돼. 내 새끼코끼리는 원래 그랬어. 괜찮아."
뚝뚝 하고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 비린내.
언젠가의 좋은 기억이 코 끝을 스쳤다.
비 비린내, 짙고 짙은 민트와 시나몬 향이 썩 잘 어울린다. 이전의 칼리안이 그것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뭐 어떻겠는가.
이제부터 좋아하면 되지.
"얀.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내 키가 너보다 커질지 그렇지 않을지."
금화 한 개 걸고.
[외전] 안녕
당연하게 여겨온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될 때.
사람들은 보통 화를 내거나 울거나 웃거나.
혹은 도망친다.
그리고 소년은 도망친 사람이었다.
* * *
- 왜, 이걸, 배워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았을 때 소년의 어머니는 차마 다시 떠올리지도 못할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소년은 두 번 다시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손 끝으로 말을 하는 법을 모두 배웠을 때.
소년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저택의 어딘가로 찾아가게 되었다. 손을 쥔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더웠는지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 소년은 오랫동안 그것을 잊지 못했다.
저택 2층의 가장 오른쪽 끝 방.
아무도 그 곳에 가지 말라 한 적 없지만 괜한 무서움에 한 번도 가까이 가 보지 못했던 방. 나무가 녹이 슬면 이런 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은 무거운 음색과 함께 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애써 움직여 웃어보이는 이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소년은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까지 열심히 연습한 말을 만들어냈다.
- 안, 녕.
서툰 손짓으로 소년의 형을 향한 첫 인사를 건넸다.
- 나는, 시,로,이,안, 입니다. 반가워, 반갑, 습니다.
바보같은 말이었으나 소년의 형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침대에 앉은 채 기꺼워하는 얼굴로 자신의 양 팔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굳이 손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소년은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괜찮은지'를 묻는 말이었고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활짝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 침대 위로 올라갔고 자신과 똑같은 블론즈 색 머리와 청회색 눈을 가진 그리고 자신과 아주 많이 닮았지만 조금 더 큰 소년을 꼭 안아주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낯설고 앙상하고 차가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아, 안녕."
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꼭 불러보고 싶었어서.
소년은 형을 만난 첫 자리에서 그렇게 말해보고 싶던 짧은 말을 입에 담았다.
형아 안녕.
내가 시로이안이야.
* * *
그 방의 공기는 언제나 농도가 짙은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 것을 의식해야 할 만큼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항상 웃어주던 형이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형은 아팠고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의 여동생은 그 방에 자주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소년의 형이 앓는 병이 어린 동생에게도 옮겨갈까봐서였다. 그래서 여동생이 소년만큼 크면 그때부터 같이 가기로 했었다.
- 오늘, 매미가, 울었어.
- 매미?
- 응, 매미. 매미가 우는 건, 신기해. 어느 날 갑자기, 매앰, 매앰, 해. 언제부터 우는지, 아무도 몰라. 그냥 갑자기, 매앰, 매앰. 이렇게 울어.
소년의 형은 저택 밖을 나가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걷는 것을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더 아팠다. 기침을 하고 열이 났다. 그래서 소년은 형을 대신해 열심히 매일매일 밖에 나갔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보려고 매일매일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매일매일 2층의 가장 오른쪽 끝 방을 찾아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 여름이 되면, 이만한, 까맣고 못생긴 게, 어느 날 갑자기부터, 엄청 시끄럽게 울어. 매앰, 매앰, 하고.
- 까맣고 못생겼어?
- 응. 날개가 달렸고, 까매. 배에서, 소리를 내.
- 그게 뭐야. 괴물 같아.
- 아니야. 못생겼지만, 괴물 같지는 않아.
매앰 매앰 하고 우는 까맣고 못생긴 날개 달린 것. 게다가 배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라 하면 누구라도 괴물 같다고 생각할 텐데. 그 생각을 못했다.
그러니 내일은 매미를 잡아와 볼까 하고. 소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 보고 싶으면, 내가, 내일 잡아올게.
매미를 보면 형이 놀랄까?
재밌어 할까?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형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 보고 싶지 않아. 괴물처럼, 생겼을 것 같아. 그냥, 바이올린 들려줘.
소년의 형이 이렇게 말했다.
소년은 매미는 괴물이 아닌데 하고 말하는 대신 그냥 알겠다고만 했다. 그리고는 형이 듣지도 못하는 바이올린을 열심히 연주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굳이 보아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소년의 형은 보고 듣고 싶은 것조차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 * *
소년은 그렇게 매일매일 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매일매일 소년의 형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조금씩 닳아가는 바이올린 현처럼, 한 줄씩 끊어져가는 바이올린 활처럼, 조금씩. 하지만 착실하게 무너져갔다.
소년은 그것을 몰랐다.
소년의 형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과 건강한 동생을 비교하는 마음을 미워했다. 그것이 다시 병이 되었다. 그 사실을 소년은 너무 늦게 알았다.
때로는 부러움 만큼 키워진 상실감이 병이 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미 늦은 뒤에야 그것을 알았다.
바보같이.
* * *
'병세가 날로 심해집니다. 마나실 경의 아드님이 약을 잘 다룬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다시 한 번 마나실 경에게······.'
'다른 일이 있다 하는데 내가 붙들 수는 없지.'
처음엔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주님······.'
'내 아들이 아프다 하여 길을 막을 수가 있겠나.'
병세가 심해지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약을 다룬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지금 소년의 아버지가 무엇을 포기하겠다 말하는 것인지. 소년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또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 형.
소년은 언제나와 같이 2층의 맨 오른쪽 방을 찾아갔다.
- 형. 레,아, 를 데려왔는데······.
소년의 여동생도 이제 곧잘 수어를 했다. 형에게 다른 병이 옮지는 않으리라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허락을 받아 함께 온 자리였다.
처음으로 셋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래서 동생은 머리에 예쁜 꽃도 달았다. 잘 입지도 않던 치렁치렁한 치마도 입었다.
- 나가.
소년의 형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예쁘게 꾸민 동생에게 미안해서 소년은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 형. 많이 피곤해? 잠깐 레아만.
소년의 형은 처음 보는 얼굴을 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얼굴을 했다. 무서운 얼굴을 했다.
- 내가, 피곤한 것처럼 보여?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형이 하는 말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똑바로 봐. 피하지 말고 제대로 봐, 나를.
소년은 동생의 눈을 가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 죽어가고 있다는 걸, 외면하지 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제 눈을 못 감고 동생의 눈을 가렸다.
- 그래. 그렇게 보고,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지. 너도.
그래서 형의 말을 고스란히 다 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저 울기만 했다.
- 왜 그래.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 * *
그리고 어느 날 소년은 악몽을 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을 혼자 헤매는 꿈을 꿨다.
사방에서 바이올린 소리와 매미 소리가 윙윙 울렸다. 앞으로 가야 할 지 뒤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 그런 곳에서, 온통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해서 길을 잃고 마는 그런 꿈을 꿨다.
"공자님, 공자님!"
그 꿈 때문에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기사 유란이었다.
소년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유란은 다른 말 없이 소년을 붙들어 안았다. 그리고 작은 담요로 소년의 몸을 감싸고 그대로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왜 그래?"
소년은 이렇게 물었고 유란은 잠깐 뒤에 대답했다.
"불이 조금 났습니다.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왜 밖으로 나가?"
유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요로 소년의 머리를 감싸고 그 위를 제 팔로 끌어안았다. 한 팔로 소년을 안고 한 팔로 소년의 양쪽 귀를 막으려고.
소년이 숨차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유란은 그것을 풀어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리하여 제 삶의 흔적을 지우려 방에 불을 낸. 말 못하는 형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 그 끔찍할 만큼 아픈 소리를 소년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소년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바보같이.
* * *
그 누구도 소리내지 않는 며칠이 다시 지났다.
그리고.
"얀."
놀라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그렇게 이어진 아버지의 말.
그것은 눈을 뜨면 어느새 들리는 매미 소리 같았다.
"네 형이. 어제."
준비도 없이 들려와서는 제멋대로 여름이 되었다 외치는 매미 소리 같았다.
* * *
매미가 울었다.
여름의 마지막을 보내기 싫은 것처럼 매앰 매앰, 하고.
소년도 울었다.
전부 다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2층의 오른쪽 끝 방에서 이제는 주인마저 사라진 그 방에서 매일매일 엉엉 울었다. 해주지 못한 말을 매일같이 혼자 꺼내놓으며 그렇게 매일매일 울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고.
그렇게 봄이 왔다 가고.
또 다시 매앰 매앰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결국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을 데리고 억지로 집 밖을 나섰다. 나가기 싫다며 자지러지는 소년을 품에 안고 성 밖으로 공작령 밖으로 억지로 그렇게 나섰다.
별을 보여주고 하늘을 보여주고 강을 보여줬다.
소년의 형이 보지 못해서 자신도 보지 않겠다는 고집쟁이의 눈에 억지로 이것 저것 다 담아줬다.
그렇게 얼마 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2층의 오른쪽 끝 방에 갔던 그 날처럼.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거대하고 아름답지만 삭막하기 짝이 없는 어딘가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삭막한 곳에서, 누구보다 화려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를 보았다.
그래.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저 아이, 누구예요."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1년 만이었다.
소년은 1년 만에 스스로 무언가를 보고 물어왔다.
"이 나라의 셋째 왕자님이시란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질문에 감격하는 대신 얼른 이렇게 대답을 했다.
소년은 그 말을 듣지도 않았다.
홀린 듯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 안녕."
그리고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