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있어야 할 곳 (7)
"죄송합니다만. 안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훈훈한 형제간의 대화에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아르센은 본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누구를 만나든 좀처럼 한 번에 마음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버릇 아닌 버릇이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사람 뿐 아니라 마법 주문식 하나도 의심 없이 믿은 적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아르센이 꼼꼼하다며 좋아했고 또 누군가는 그저 깐깐하기만 하다며 마뜩찮아 했다. 그리고 의외의 지적 생명체 한 명은 다 됐으니까 그냥 꺼지라고 했다.
아무튼.
그리 존경했던 스승도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던 아르센이 의심 없이 믿어 본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주위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칼리안이다.
이유는 단 하나.
첫인상이 지극히 좋았던 탓이다. 어처구니 없을 만큼 단순한 이유일지 몰라도 아르센은 정말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칼리안을 믿었다.
- 굳이 망자의 걸음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그의 생에 있어 유일한 '어른'이었던 스승의 영결식. 누가 보아도 평민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허름한 상복 차림이었던 아르센.
검은 말, 검은 로브.
세뉴강의 안네루시아를 묵묵히 바라보던 모습. 그리고 붉은 눈.
왕자.
이제 막 앨런을 만났을 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네만.
그것이 칼리안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망자를 위해 말에서 내릴 줄을 알고 진심어린 목소리로 명복을 빌어주며, 자신을 알아본 평민에게 함구하라 명령하는 대신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고 부탁 같은 말을 내려놓던 위태롭기 짝이 없는 붉은 눈의 왕자.
떠내려가는 안네루시아를 바라보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로브로 가려져 표정이 어땠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음에도 그 얼굴이 선명히 그려졌다 하면, 그 심정이 아르센에게 모조리 전해졌다 하면 누군들 믿어줄까.
결국 아르센은 칼리안의 부탁을 어겼다.
머릿속에 새겨진 그 날의 칼리안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아서였다.
그래서 아르센은 '있어야 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니 괜찮다'는 칼리안의 말에 괜찮지 않다 말했다. 칼리안의 명령 하나는 정말 잘 듣지만 그 외의 것은 알아서 잘 어기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저도 왕자님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압니다. 왕자님께서 플란츠 왕자님 살려두려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정도는 저도 이미 압니다. 이유는 하나도 모르고 이유를 알아도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어쨌든 왕자님께서 지금 플란츠의 살 길을 열어주려고 무리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르센은 바보, 혹은 머저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왕자님 살 길 막고 플란츠 왕자님 살 길 열어주는 것은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르센이 플란츠에게 시선을 둔 채로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이 말을 함께 듣게 된 플란츠는, 눈을 감지도, 비웃음을 띄우지도, 모르는 말을 들은 것처럼 굴지도 않은 채 그냥 테이블의 한 쪽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아르센이라지만 이 정도로 매몰찬 말을 꺼낼 만큼 플란츠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해서라도 칼리안의 생각을 고쳐놓아야 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 날 세뉴강의 다리 위에서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표정이 지금 칼리안이 짓고 있는 것과 똑같았으리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잃어버리는 것에 묵묵히 순응하는 그런 표정 하지 마시고 왕자님 살길도 좀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헤르츠 경."
칼리안이 아르센을 부르는 호칭은 참 제멋대로였다.
언제는 경이고 언제는 부군단장이다. 특별한 구분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냥 되는대로 대충 불렀다. 어떻게 부르든 아르센은 잘 대답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르센은 칼리안의 말을 안 들었다.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말했다.
"이유를 알면 제가 입을 닫겠습니다, 왕자님."
형제애라고는 말라 비틀어질 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이.
성인식인 로젤리타를 떠나기 직전까지 칼리안과 플란츠 관계가 어땠는지도 알고 실리케로 인해 엮인 둘의 악연도 안다.
말이 좋아 형제였지 저보다 더한 악연이 또 있을까. 그러니 서로 생긴 것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걷던 둘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그리고 아르센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살리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르센의 이런 태도에 잠시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을 하던 칼리안이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내가 괜찮다는데도 믿지를 않고. 이유나 알려달라 하니."
그 말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누가봐도 그것은 명백한 자조였다.
"내 아우님께서 거짓말을 다 하시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뱉는 '괜찮다'의 절반은 거짓말일 테다. 그에 비해 칼리안의 괜찮다는 아마 9할 이상이 거짓말이지 않을까.
시스파니안을 닮았다 알려졌고 대마법사의 제자인 왕자가 아니던가. 르메인의 총애도 받고 있는데다 지그프리드의 방패까지 얻었다.
그러나 칼리안이 쥔 것은 결국 옹립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방패 뿐. 스스로 검도 마법도 쥐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플란츠와 에반 브리센 후작이 쥐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에반이 칼리안을 그냥 두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칼리안의 말은 플란츠에게 향할 검 끝을 자신에게로 돌려 놓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걸 알았으니 아르센이 이렇게까지 반발을 하는 것이었다. 발칸의 힘을 엉뚱한 곳에 베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였다.
"꼭 무력으로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님. 브리센 후작의 세력을 우습게 보시면 안됩니다. 왕자님이 아무리 강하시고, 또 마나실 군단장님의 보호를 받는다 해도 결국 그것은 목숨을 지키는 것에만 쓸모 있는 겁니다. 왕자님 것을 전부 플란츠 왕자님에게 넘긴 뒤에 브리센 후작과의 세력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시겠다는 겁니까.'
칼리안은 플란츠의 앞에서 대놓고 자신의 손을 들고 있는 아르센을 보며 잠시 웃었다.
과거에는 플란츠의 명으로 베른의 숨을 끊었던 아르센이 플란츠와의 세력 대결에서 칼리안이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설득을 하고 있다.
"이것 참······. 의도한 것은 아닌데. 되게 묘한 상황이네."
덮어두기 힘든 그 묘한 기분에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와 아르센은 그런 칼리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플란츠는 의미를 알아들었기 때문이었고 아르센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헤르츠 경."
아르센을 다시 부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고 자리 싸움 하는 방법은 내가 경보다 더 잘 압니다. 많이 겪어 보기도 했고. 그리고······ 우리가 이러는 이유도 분명히 있지만. 입에 담는 것은 나중으로 미뤘으면 좋겠는데. 그 의문 잠시 접어두는 것은 어렵겠습니까."
플란츠가 맹세의 인을 했다는 것도, 그런 플란츠를 왜 굳이 살려놓으려 하는지도 당장의 아르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르센이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자신의 앞에서 칼리안의 손을 들고 있는 아르센을 보면서도 플란츠는 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그리 구는 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 있었다.
정말로 말해주지 못할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 알겠습니다. 다만."
고집 가득한 마법사의 신의를 담은 파란 눈으로 아르센이 못을 박듯 말했다.
"소유자가 누구든 발칸의 마법사는 칼리안 왕자님을 따를 겁니다."
그 말에 남은 두 사람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낯간지러워서 들어 줄 수가 없군."
"아니. 전하와 군단장 말을 들어야죠. 나 말고. 군대잖아."
적당히 대꾸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어찌됐건 이 정도로 넘어가 주니 고맙다는 뜻이었다.
곧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의 계획에 대해서는 형님께도 말씀 안 드릴 겁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칼리안이 에반에 대응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세자위 싸움에서 지면 칼리안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광장에 깔릴 터였다. 란델로부터 정보를 얻어 놈들에 대해 알아내거나 플란츠를 브리센 후작으로 만들려면 일단 칼리안부터 살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플란츠에게 공유하거나 들켜서는 안 될 것이기도 했다. 계획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 역시 맹세의 인에 반하는 행동일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를 보며 당부하듯 다시 말했다.
"똑똑하신 내 형님 또 혼자 눈치 채버리시면 안 됩니다. 모르고 계셔야 안 죽습니다."
"내 아우님은 이제 짖는 게 버릇이지."
늘 그렇듯 칼리안이 한 번 더 씩 웃었다.
형님이 알면 죽는다 말하며 웃는 동생과 그런 동생을 개 취급하는 형의 모습을 본 아르센이 얼마나 복잡한 기분이 됐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 * *
얀이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외부 손님인 드미레아가 함께 하는 자리였으니 석찬은 체르밀 궁이 아닌 세뉴 관에서 진행됐다. 다만 그 준비는 체르밀 궁의 주방장이 직접 했다. 왕자들이 함께 하는 식사를 다른 이가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언제나 그렇게 진행되었던 일이었으니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얀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식단인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딸기를 졸여 만든 소스를 가득 얹은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 말린 딸기를 넣고 구운 빵, 딸기 식초로 마무리 한 샐러드, 생딸기와 생크림으로 장식한 와플과 팬케이크, 딸기 향이 가득한 크레이프와 샌드위치.
후식으로 준비되고 있는 딸기 타르트와 딸기 푸딩, 딸기 청을 넣은 탄산수에 딸기 티라미스.
그리고, 딸기 아이스크림.
온통 딸기다.
정성들여 달지 않게 만들어낸 딸기 가득한 석찬 메뉴에 식당에 먼저 들어와 검수를 하던 얀이 질린 얼굴을 했다.
"아무리 왕자님께서 딸기를 좋아하신다지만······."
그런 얀과 함께 들어온 히나가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 제가 말을 했는데, 내용이, 잘못 전달 됐나봐요.
좋은 왕자님이 딸기를 많이 좋아하셔서 오늘 석찬에 다른 음식과 더불어 딸기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면 안되겠는지.
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방장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왕자님이 딸기를 좋아하시니 '오늘 석찬의 다른 음식과 아이스크림에 딸기를 더불어 만들어주면 안되겠는지' 물어오는 히나의 부탁을 아주 흔쾌히 들어줬다.
때마침 얼마 전에 왕궁으로 선물 된 딸기를 나누어 받은 참이었으니 재료도 충분했다. 덕분에 만들어진 붉디 붉은 식단을 보던 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죄송해요. 이걸, 어떻게 하죠.
열심히 수어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 원활한 의사소통이 될 정도는 아니었던 탓에 생긴 문제를 두고 뭐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칼리안이 그것에 대해 싫어할 성격도 아니었고 이 일의 원흉인 플란츠는 저 좋아하는 딸기 가득한 밥을 먹게 생겼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드미레아야 잘 이해해 줄 테고, 미친 따까리는 알아서 처먹으라지.
"우리 왕자님도 딸기 좋아하시니까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렇게 얀이 얼추 상황을 파악할 때 쯤 생각보다 빠르게 칼리안 일행이 들어왔다.
딸기 향 가득한 식단을 본 일행의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예상한대로 드미레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르센은 이게 무슨 장난인지 궁금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플란츠는 질린 얼굴로 메뉴를 살펴보다 히나를 보곤 피식 웃었다.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와. 전부 다 딸기네."
이렇게 말하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본 얀이 잠시 멈칫했다.
그것은 분명, 즐겨하지 않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할 때의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