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있어야 할 곳 (6)
똑같은 블론즈 색의 곱슬머리.
똑같이 동그란 눈 속에 담긴 청회색의 눈동자.
누가 보아도 남매라는 생각이 들 법한 외견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한 명은 3왕자의 시종이었고 다른 한 명은 무려 카이리스 유일의 공작가를 이끌어나갈 소공작이었으니까.
본래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차남이었으나 현재는 장남이 된 시로이안은 슬레이만의 첫째 아들이 죽은 일로 충격을 받아 저택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 알려져 있었다. 물론 한 때의 얀이 정말로 그리 굴었던 것은 맞았으므로 그 소문이 영 잘못되었다 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바로 그 시로이안이 지금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을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저 둘이 남매지간이라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여기 좋네요."
자박자박 소리를 내는 자갈 위를 걷던 드미레아의 말이었다.
플란츠와 드미레아의 대련이 끝난 뒤 그 둘에 아르센을 포함하여 석찬이나 함께 하자는 칼리안의 제안이 있었다. 발칸과 기사단의 일로 서로 공유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던데다 생각보다 더 성질을 부린 칼리안의 배가 아주 많이 고파졌던 이유가 컸다.
다만 세뉴관에서의 석찬 전까지 두 왕자와 아르센이 먼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 하기에 코끼리 남매는 이렇게 잠시 산책이나 하던 중이었다. 언젠가의 칼리안과 앨런이, 그리고 언젠가의 체이스와 플란츠가 찾아갔던 바로 그 산책로 말이다.
"맞아. 왕자님께서 마음에 든다 하신 곳이거든."
"칼리안 왕자님이 마음에 들어해서 좋다는 겁니까."
얀은 무엇 때문에 드미레아가 질문을 했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좋아하시면 좋은 거지."
얀은 그야말로 칼리안을 모시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다. 모든 것에 있어 칼리안을 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는 그런 얀의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삶에 있어 우선하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드미레아에게는 검과 가문이었고 얀에게는 칼리안임을 안다.
만약 그것을 칼리안이 모른다면 드미레아의 우려가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칼리안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얀의 말에 대한 다른 평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여기가 좋다는 게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산책로의 중간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는 말을 나누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재킷 들어줄까?"
얀은 인근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이렇게 물었다.
호위기사는 물론 하인 한 명 대동하지 않고 혼자 말을 타고 왕궁에 온 드미레아는 검은 재킷을 여전히 직접 들고 있었다.
"저한테까지 그러지는 않아도 됩니다, 오라버니."
드미레아는 꽤 정색하는 얼굴로 대답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책로가 좋은 이유조차 시종다운 얀이 자신의 앞에서까지 시종처럼 굴지 말았으면 해서 하는 소리였다.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얀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정도로 직급이 낮지는 않거든. 불편해 보여서 한 말이야."
칼리안의 손님이 들고 있는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은 상급 시종인 얀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얀은 진작부터 드미레아를 동생으로 대하고 있던 터였다.
"들어주세요, 그럼."
그제야 드미레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재킷을 얀에게 넘겨줬다. 굳이 재킷 하나에 불편할 일이 있겠냐만은 그나마라도 오빠 노릇을 해주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장단을 맞춰준 것이었다.
- 절그럭.
팔을 들어 재킷을 건넬 때 드미레아의 다리 쪽에서 소리가 났다. 기사는 아니었지만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기 때문에 왕궁에 들고 들어오는 것이 허락된 때문에 조금 전 플란츠의 검을 멀찍이 날려버리는 것에 사용될 수 있었던 드미레아의 검에서 난 소리였다.
만약 제 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얀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기도 했다.
잠시동안 얀의 눈길이 드미레아의 검에 머물렀다. 그런 얀의 모습을 그냥 못본 척 할까 하던 드미레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해도 오라버니보다 제가 나았습니다."
생각이 더 깊은 것도, 셈이 더 빠른 것도, 귀족들을 앞에 두고 더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바이올린을 더 잘 켜고 검을 더 잘 다루는 것도 모두, 드미레아였다.
"어차피 제가 더 잘 하는 일이었고, 제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었고, 결국은 제가 하게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드미레아의 말이 맞았다.
따라서 500년을 이어 온 방패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본래부터 드미레아의 몫이었을 터였다.
-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얀은 단 한 마디 말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했으니까.
검을 보던 얀의 눈에 들어있는 것은 부러움이나 놓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다. 고작 한 마디 말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친 것, 그래서 나라 유일의 공작 가문이라는 그 무거운 이름을 동생에게 전부 떠넘긴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다만 드미레아가 말한 것처럼, 드미레아가 소공작의 자리를 받은 것은 얀보다 나아서였지 얀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의 소가주로, 얀은 칼리안의 시종으로 각자의 위치에 잘 있으면 될 일이었다.
"우리 레아 다 컸네."
그래서 얀은 언젠가 칼리안의 키가 훌쩍 자란 것을 보았을 때 지어보였던 것과 같은 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꽤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나저나 벌써 다 컸다니.
이것이 칭찬인가 아니면 악담인가.
하여튼 멍멍이 오라버니보다 생각 짧은 오라버니라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은 채였다.
* * *
칼리안이 조용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제가 왕자님을 따른다고 했지 왕자님 형님이신 플란츠 왕자님까지 따르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과묵하게 앉아있는 파란머리 마법사와 짜증난 얼굴을 지우지 않고 다리를 꼰 채 앉아있던 풀먹는 형 때문이다.
앞으로 기사 세력까지 들이게 될 테니 발칸 내부적으로 분란이 없게 해달라는 말이 시발점이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쟤만 잘하면 된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고 아르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둘의 말싸움이 또 시작됐다.
플란츠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 정말 내가 쟤를 데리고 전쟁을 낸 것이 맞나?
그 차분한 눈에 딱 이런 질문이 담겨 있는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은 어깨만 한 번 으쓱여 보였다. 난들 아느냐는 소리다.
아무튼 사이가 좋은 듯 거지같은 둘을 앞에 둔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얀의 꿀차가 한 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얀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하."
안 그래도 오늘 이런저런 일로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화도 많이 쌓인 칼리안이 아니던가. 때문에 흘러나오는 한숨 끝에 미미하지만 명백한 살기가 실렸다. 그것을 안 둘이 조금 놀란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8월 말."
그리고 칼리안은 '더 떠들면 둘 다 죽여버릴거야' 라는 눈을 한 채 이렇게 입을 열었다.
"8월 말에 발칸은 마법사단과 기사단을 모두 갖춘 군대가 될 테고 그 전에 마법사 인원을 두 배 이상 늘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헤르츠 부군단장은 빨리 저 잔해 다 치워버리고 마나실 백작과 상의해서 추가 인원 들여놓으세요."
말이 좋아 8월 말이지 고작 세 달 안에 인원을 두 배로 늘리라니. 갑작스러운 통보에 아르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리고 내년 2월. 그 때의 마법사단은 적어도 300명 이상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때가 되면 체이스가 즉위한다.
그리고 체이스는 왕위에 오른 즉시 세크리티아만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게 될 터였다. 비록 베른이 없는 세크리티아라 하나 그들의 새로운 왕은 여전히 강인하고 현명할 것이다. 그런 왕이 만드는 새로운 군대는 어쩌면 칼리안도 예상하지 못한 강력함을 지니게 될지 모른다.
"그 뒤로도 마법사 수는 계속 늘려나갈 생각이니 긴장 풀지 말아요."
때문에 칼리안도 발칸의 육성에 전력을 다할 예정이었다.
"왜 갑자기."
플란츠가 이렇게 물었다.
칼리안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도 갑자기 이렇게 덩치를 키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카이리스가 '약소국'의 힘을 넘보면 안 될 일이 생겼지 않습니까."
아르센이 함께 있었기에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못했으나 플란츠가 알아듣기에는 부족함 없는 설명이었다.
체이스의 강력한 군대를 견제하려 할 르메인과 귀족들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를 경계하지 않으려면 발칸의 힘이 명백하게 우위에 있어야 하니까.
그것을 위해 발칸의 규모를 최대한 키워놓아야 한다는 것이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마법사가 모이면 그 때는 내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날 겁니다. 기사단으로 마법사들을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길 사람이 있으니까요."
마법사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 경계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비등비등하게 힘의 균형이 맞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헤이시아 궁의 폭발로 힘의 우위를 조금쯤이라도 깨달았을 터였다.
그런 상태에서 1년도 되지 않아 마법사 수가 몇 배로 늘어난다면 에반은 당연히 마법사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다.
칼리안과 같은 생각을 한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문 칼리안은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그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내용을 마음속으로 되짚었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 쯤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발칸에 보내겠습니다."
그 말에 플란츠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아이즌 에이프린의 기사단은 분명 칼리안이 가지기로 했던 힘이 아니던가. 곧 그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칼리안이 직접 키워나갈 생각을 하고 있음을 플란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플란츠였으니까.
그런데 칼리안은 지금 그들을 직접 가지지 않고 발칸으로 들이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플란츠에게 기사단을 넘기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왜 또."
"지난 번과 같은 이유는 아닙니다. 마법사단이 커지는 만큼 기사단이 커져야 형님이 안 죽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툭 건드려 보였다.
"형님께서 발칸의 마법사 수가 늘어나는 것을 손 놓고 보고 있는 것이 '브리센을 배반하는' 행위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형님의 기반 세력이 얼마 없는데 제가 기사단을 쥐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형님 죽을 수도 있고요."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은 언젠가 플란츠 모르게 에반 브리센 후작의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을 곱게 숨겨 놓으며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이 정해놓은 '배반'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범위가 방대하니 이것저것 다 조심해봐야죠."
"그렇다고는 해도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군."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다.
칼리안이 아이즌의 기사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왕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손에 넣으려 했던 플란츠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에반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 그런데 칼리안은 맹세의 인을 조심하겠다며 아이즌의 기사단을 플란츠에게 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마법사단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 맹세의 인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결정한 일이다.
그런데 마법사단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의 새로운 힘을 경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힘이 커지는 것은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준비'를 하라 일러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결국 칼리안은 이번에도 플란츠로 인해 손에 쥔 것을 다시 내려놓게 된 셈이었다.
"있어야 할 곳에 가는 것뿐이니 괜찮습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