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있어야 할 곳 (5)
별을 녹여내어 만든 검.
그 재료의 독특함 때문에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묵색의 검.
- 콰앙! 카가강!
그리고, 마주한 이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고스란히 비춰낼 듯 반짝이는 은색의 검.
플란츠의 검이 밤을 담았다면 드미레아의 검은 한낮의 태양을 담은 듯 했다.
이렇듯 완벽히 다른 두 검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본다면 그 무게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둘 모두 칼리안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묵직한 검이었으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들을 열심히 양성하고 있을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 역시 무게감 있는 검술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이리스 검술의 원류가 지그프리드니까.'
카이리스에서 역사가 깊다 할 만한 몇몇 기사 가문의 검술은 결국 슬레이만의 검을 기준으로 조금 더 무겁거나 혹은 조금 더 가볍거나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 카가가강! 카아앙!
그랬으니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가문이라 지칭되는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검이 맞닿는 소리가 이렇게나 요란할 수 밖에.
드미레아의 검을 맞받아 친 플란츠의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둘이 그 정도로 진심을 다해 대련에 임하고 있다거나 뭐 그런 뜻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불꽃이 튀었다. 비등비등한 힘의 칼날이 계속 얽히고 있으니 검이 맞닿을 때마다 사방으로 불티가 비산하는 것이다.
- 카아아앙! 카앙!
정통으로 맞부딪힌 검이 튕겨나오자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의 회전 방향을 바꾼 드미레아가 다시 한번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그것은 드미레아의 움직임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플란츠의 검에 막혔다.
그렇게, 주로 드미레아가 공격을 하고 플란츠가 방어를 하는 식의 공방이 이어졌다.
아직 싸움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칼리안은 지금 플란츠가 드미레아의 검을 '분석'하고 있는 중임을 알아보았다.
칼리안은 검을 주고 받는 것에도 머리를 쓰는 플란츠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싸움 중에 머리 쓰는 것이 그리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말을 꼭 해줘야겠네."
"플란츠 왕자님이요?"
"응."
"저는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고 레아가 많이 는 것 같아 보이네요. 사실 바로 질 줄 알았거든요."
빌헬름 관에서 쓸데 없는 동상 얘기나 하며 뭉그적거리는 마법사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아르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칼리안의 옆에 있던 플란츠는 지금 수련장 안에서 드미레아와 대련중이었다.
덕분에 혼자 앉아있던 칼리안의 옆으로 얀이 다가와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의 시종이나 지그프리드의 장자라기 보다는 동생 얘기하는 그냥 흔한 오빠의 모습을 한 채였다.
"드미레아가 내 형님에게 바로 질 것 같았어?"
"아직 어리고, 또 아무래도 힘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당연하겠지만 얀도 검을 쥘 줄은 안다.
말 그대로 쥘 줄만 알지만 아무튼 안다.
그러므로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검을 다루는 데에 있어 '힘'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힘의 차이······. 글쎄, 어떠려나."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을 했다.
둘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해내지 못하는 얀의 눈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칼리안을 꽃 같은 왕자로만 보듯 드미레아를 그저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 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러 다루는 칼리안이야 논외겠지만 어찌됐건 드미레아는 '힘'에 있어 플란츠에 비해 불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별에 따른 신체적인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나 드미레아다.
그냥 검을 좀 다루는 열 다섯의 소녀가 아니라,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다.
그런 차이 따위는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듯, 드미레아의 검격은 하나같이 세차며 묵직하다. 칼리안이 가벼운 몸과 검을 극한에 가까운 속도를 내는 것에 몰았다면 드미레아는 가벼운 만큼 빨라진 속도에서 나오는 힘을 무게로 다시 치환한다.
그러므로 드미레아의 검은 충분히 강하다.
- 콰앙! 카아앙!
충돌이라 해야 맞을 듯한 모습을 띄며 두 검이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부딪혔다. 드미레아가 튕겨나온 검을 다잡으려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사이, 플란츠의 검이 꽤 그럴듯한 일격을 가했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뻗어나간 뒤에는 드미레아가 검을 되돌리는 틈을 정확히 파고든다.
"앗."
그것을 본 얀이 짧은 소리를 냈다.
누가 뭐라 해도 코끼리의 핏줄이 맞다는 듯, 드미레아에게 공격이 가해지는 순간을 얀도 본 것이다. 때문에 꽤 의외라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아주 잠시 동안 얀을 쳐다봤다. 드미레아에게 빈 틈이 생기는 순간과 플란츠의 검을 따라갈 만큼은 되는 눈을 가졌다는 뜻이니까.
그러면서도 칼리안을 방금 구워낸 도자기인형 쯤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넌 저런 걸 볼 수 있으면서도 나를 걱정하는거냐' 하는 눈빛을 한 채였다.
- 카강!
팔과 목 사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 끝을 본 드미레아가 검 손잡이를 틀어 플란츠의 일격을 막았다. 그리고,
- 카아앙! 카앙! 캉!
세 번의 연계 공격을 물 흐르는듯이 쏟아냈다.
조금 전까지 플란츠에게 보여줬던 공격 패턴과 완전히 다른 방향, 완전히 다른 회전력, 완전히 다른 힘이다.
이번 공격 역시 막히기는 했으나 칼리안은 플란츠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검을 살펴보고 있음을 간파한 드미레아가 공격 방식을 달리했음을 눈치 챈 듯했다.
지그프리드의 검을 머리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 고스란히 담겼다.
"저래도 질 것 같아?"
칼리안이 흡족하게 웃으며 물었다.
드미레아는 맹수다.
검을 쥔 드미레아는 치밀하게 움직여 사정 없이 목을 물어뜯는, 절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선 맹수였다.
그런 드미레아로부터 맹렬하게 쇄도해오는 공격을 받아낸 플란츠도 태도를 바꾸었다.
언젠가 칼리안을 앞두었던 그 때처럼, 숨을 죄여오는 맹수를 앞에 둔 늑대와 같이.
사나움과 침착함을 모두 담은 그런 눈빛을 한 플란츠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드미레아로부터 뻗어나온 검을 막고, 내리치고, 몸을 돌려 되 찌르는 공방이 이어진다.
"그래도 레아가 이길 것 같기는 하네요."
얀의 대답에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들의 싸움을 살피던 칼리안이 웃었다. 플란츠가 평소에 좀만 더 잘 처먹었으면 칼리안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드미레아가 '이길 것 같기는' 하다고.
키리에를 구하러 갔던 도박장에서 모든 승패를 맞췄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둘이 처음으로 검을 마주댔을 때, 이미 칼리안의 머릿속에서는 승패가 결정났다. 플란츠의 검 끝이 미세하게 밀려났던 것을 보았으니까.
"드미레아가 무조건 이길 거야. 아직 내 형님은 드미레아의 상대가 못 되겠네."
드미레아는 모르겠지만 플란츠 스스로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을 터였다. 그래서 더 머리를 쓰려 한 것이리라.
- 카아앙!
둔중하면서도 예리함을 잃지 않은 굉음과 함께 두 검이 세 번째로 정면 충돌했다. 힘대 힘이 맞붙었으니 그 소리가 마른 하늘을 조각내는 천둥과도 같다.
"키리에를 부를 걸. 이런 좋은 눈요기를 놓친 걸 알면 많이 아쉬워하겠는데."
이 곳에 오기 전 키리에부터 찾은 칼리안은 빌헬름 관에서 무언가를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수련이나 하고 있으라 말했었다. 칼리안의 안전과 관련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안 우직한 키리에는 살기가 뿜어지든 말든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레아는 왕자님과 대련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이렇게, 드미레아보다 늦게 빌헬름에 도착한 얀이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칼리안과 대련을 해 보고 싶다 해서 이 곳에 칼리안이 있으리란 사실을 알려준 것이 얀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오늘 안돼."
다른 설명을 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이렇게만 말하고 웃었다.
상대가 누구든 오늘은 칼을 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바로 조금 전 '베른'에 근접할 만큼 화를 냈으니 혹시라도 키리에와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대련과 실전을 구분하지 않게 될까봐.
"그럼 따뜻한 차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조금 안정이 되실 텐데요."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를 알아들은 것일까. 얀이 어느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이렇게 물어왔다.
얀은 참 신기하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눈치가 없으면서도 칼리안의 기분 하나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잘 읽어낸다.
커피를 싫어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도 그랬다. 아무것도 티 내지 않았는데 딱 한 번 커피를 내 온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커피를 꺼내놓지 않았다.
그런 얀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 넣은 꿀차 먹고 싶어."
"네,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드미레아와 플란츠의 공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당장 더 걱정해줘야 할 것은 그 쪽의 대련이 아니었다. 드미레아가 다치거나 질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얀은 미련 없이 일어나 차를 준비하러 빌헬름 관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다시 수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카가가강! 카앙!
플란츠의 호흡이 다소 가쁘게 변한 것이 보였다.
불편할지 모를 검은 재킷 차림 그대로 대련에 들어섰던 드미레아의 얼굴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곧 드미레아가 검을 들어 수직으로 내리쳤다. 마치 거울과도 같은 검신에 반사된 햇빛이 눈부시다. 그 반짝임을 거부하듯 플란츠가 검을 올려쳤다. 어두운 밤하늘을 담은 검신이 드미레아의 공격을 막았다.
- 카아앙! 카강! 카강! 캉!
그리고 플란츠의 반격이 이어졌다.
검 끝을 밀어내듯이 되받아친 뒤 힘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빠르게 연이어 급소를 찔러나가는 공격. 마치 검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듯한 모양새를 내는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한 번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이번에는 얀 때문이 아니라 플란츠 때문이다.
"저거······ 내 껀데."
그것은 분명, 이전에 플란츠를 상대할 때 칼리안이 딱 한 번 보여줬던 공격이었다.
"형님께서 배워가신 게 생각보다 많네."
가르쳐 준 적 없는 것까지 배워간 머리 좋은 형을 향해 중얼거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플란츠를 가르치는 것이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서다.
칼리안의 이런 반응을 알 리 없을 드미레아가 넓은 검격을 펼치며 플란츠의 공격을 막아냈다.
- 쉬이익!
곧 드미레아의 검이 마지막 파공음을 냈다. 플란츠의 검이 그 앞을 가로막았고, 온 힘과 온 무게를 다한 공격을 실은 은색의 검이 묵색의 검을 저만치 먼 곳으로 날려버렸다.
- 카아앙!
- 챙강!
몇 미터를 날아간 검이 수련장 바닥에 떨궈지며 수련장을 다시 한 번 울렸다. 플란츠는 검이 날아간 쪽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 앞에서 정확히 멈춘 드미레아의 검 끝, 그리고 그 무거운 검을 지탱하며 대련을 했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손, 그만큼 굳건한 청회색의 두 눈을 차례로 쳐다봤다.
"졌군."
그리고 이렇게, 패했음을 인정했다.
드미레아가 검을 거뒀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집어넣은 드미레아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왕자님."
그리고는 날아가 떨어진 검을 주워 손잡이 쪽을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승리자의 친절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험하게 다뤄졌음에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검날을 살짝 훑은 플란츠가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드미레아가 말했다.
"아주 좋은 검입니다."
아마 이 말을 칼리안이 들었다면 미안한 얼굴을 했을 것이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 키리에에게 건넸던 또 하나의 검. 과거에서는 그 검의 본래 주인이 드미레아였던 듯 했으니까.
플란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대꾸했다.
"좋은 만큼 무겁던데."
비밀 지켜주는 값이라며 칼리안이 건넸던 검이다.
그것이 결국은 이렇게, 삶에 미련 한 줌 없던 플란츠의 발을 땅에 묶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플란츠에게는 무겁게 느껴지는 검이기도 했다.
다소 더워진 탓에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생과 사의 길을 나누어 놓는 물건인 것을요. 무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서로 다른 이유.
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이었다. 플란츠도, 드미레아도. 손에 쥔 검이 무겁지 않은 이는 없을 테니까.
물론 그들로부터 저만치 먼 곳에 앉아 꿀차를 홀짝이고 있는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 귤이네."
"레몬보다 귤을 더 좋아하시게 된 것 같아서요."
"응. 좋아."
얀은 이것을 어떻게 또 알았는지.
레몬 대신 귤을 한껏 담은 꿀차의 향이 달았다. 그 향기에, 가장 무거운 검을 쥐고 사는 칼리안이 얀과 마주보며 함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