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45화 (146/527)

제25장. 있어야 할 곳 (4)

뒷통수가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머리 그냥 풀고 올 걸.'

드미레아가 이렇게 잠깐 후회를 했다.

국왕을 만나러 오는 자리였기에 단정한 하얀 셔츠와 바지, 검은 색의 짧은 재킷을 걸쳤다. 거기에 조금 더 깔끔해 보이는 올림머리를 했던 터였다.

덕분에 뒷통수가 빳빳하게 곤두서는 이 느낌이 짧은 머리를 억지로 땋아서 틀어올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칼리안의 것인 듯한 엄청난 살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 후우.

르메인의 뒤에 서 있던 렌이 작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으로 보아 지금의 이 기분은 역시 살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드미레아는 르메인을 만나고 나가는 길에 칼리안을 찾아가 대련이나 한 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저 정도 살기를 느꼈음에도 저택으로 그냥 돌아갈 드미레아가 아니었다. 그 호승심만큼은 슬레이만을 꼭 닮은 것이다.

그때 르메인의 곁으로 잠시 다가온 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종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하."

칼리안의 살기가 씻은듯이 사라졌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르메인은 발칸이 저지른 사고에 대해서는 이미 알았다. 다만 그 문제에 대해 칼리안과 플란츠가 발칸의 군기를 조금 엄하게 잡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리 큰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살기를 느끼지 못하니 방금 전까지 드미레아와 렌이 어떤 기분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지난 번 칼리안 왕자의 일에 나서 준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드미레아가 살짝 웃으며 화답했다.

"어느새 긴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서로간의 어려움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비록 드미레아 역시 필요에 의해 응한 소문이라지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소문을 해명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만든' 르메인의 처사, 그리고 도움의 대가에 대해 짚고 넘어간 것이었다.

"그래."

르메인은 '서로간의 어려움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는 드미레아를 잠시 쳐다봤다. 이미 지그프리드가 칼리안의 어려움을 도와주었으니 추후 지그프리드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왕실에서 지그프리드를 돕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드미레아는 슬레이만이나 얀과 달랐다.

"당연한 일이지. 내 잊지 않으마."

결국 르메인은 이렇게 향후의 도움을 약속했다.

이미 칼리안에게도 '도움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받아내기로 했지만 그 쪽은 그 쪽이고 이 쪽은 이 쪽이니까. 아무리 르메인의 권력이 약하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국왕이 아닌가. 명분 뿐인 이름이 필요할 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흡족한 약속을 받아 낸 드미레아가 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르메인을 찾아 온 진짜 이유를 품에서 꺼내놓았다.

"공작령에서 전하께 이것을 꼭 전해드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돈이었다.

떼먹고 도망갔던 온천 여행 값을 드미레아 편에 보낸 것이다.

슬레이만의 시커먼 속내가 훤히 보인다. 그래서 웃었다.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접점을 한 번 더 만들어 주려는 속셈인 것 같아서였다.

"지그프리드 공이 3왕자를 꽤 좋게 보았나 보군."

당연하겠지만 슬레이만이 드미레아를 왕자비로 앉힐 생각은 아닐 것이다. 칼리안을 데릴사위로 삼으려는 생각일테지.

이런 생각을 한 르메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는 빚을 지지 않습니다, 전하. 그 뿐이니 다른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참 잘 포장했으나 결국은 불쾌하다는 소리다.

그냥 빌린 돈 갚으러 온 것이니 혹시라도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관계를 엮으려 들거나 착각하지 말라는, 뭐 그런 말이기도 했다.

그 단순한 슬레이만에게서 어떻게 저런 인재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에, 플란츠와 란델의 아버지인 소 같은 르메인이 짧게 웃었다.

* * *

사고를 친 놈이든.

사고 안 친 놈이든.

발칸의 마법사들은 오늘 지금껏 살아온 날 중 손에 꼽힐 수 있을 만큼은 될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아니 대다수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오늘의 일은 지금껏 겪어 본 것 중 가장 섬뜩한 경험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술집을 날려먹은 마법사들이 '이번 일은 발칸과 관련이 없습니다' 라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자상하게 웃던 칼리안이 단박에 달려와서 왕궁을 뒤흔들 만큼 화를 내며 욕설까지 뱉어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칼리안이 이렇게까지 화를 낸 근본적인 이유까지 완벽히 이해한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플란츠 뿐이었다.

'전쟁.'

칼리안은 전쟁을 겪었다.

그것은 플란츠의 머리로도 온전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체르밀 궁까지 뻗어나와 플란츠에게 경고를 전한 소름 돋는 기운이 그저 그런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플란츠도 안다.

부숴버린 마차 값을 내 주는 것, 치료비를 갚아주는 것, 가게 기물을 보상해주는 것, 궁을 부순 죄를 덮어주는 것 같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제 윗사람을 믿고 의지해야 그런 끔찍한 현실에 당면했을 때 스스럼없이 목숨을 맡기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칼리안이다.

그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칼리안이 모를 리 없다.

누군가 맡겨온 것을 완벽하게 책임져줘야 더 큰 것을 맡기는 것임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가르쳤다.

그렇게 쌓아올린 믿음이 있어야 한 명이라도 덜 죽는다는 사실을, 칼리안은 직접 겪어가며 배웠으리라.

전쟁을 치르면서.

"저도 사람이라서. 가끔 돕니다."

때문에 이렇게까지 심하게 화를 냈다는 것을 플란츠는 안다. 플란츠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아는 칼리안은 이런 말을 꺼냈다.

둘은 오늘 일에 대해 앨런에게 보고하러 간 아르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오늘 잠깐 돌았었다고.

자신도 사람이라서.

세크리티아의 왕제였을 때의 칼리안은 아마 오늘 보여준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체이스가 분명 '많이 무뎌졌다' 했으니 어쩌면 더 호전적이고 더 잔인했을지 모르지만 제 사람을 끔찍이 아끼던 놈이었으리란 것은 분명하다고.

그런 놈이 전쟁을 겪었다. 아마도 전부 죽었을 것이다.

같은 일을 또 겪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사람이니까. 그러니 돌았던 거다.

"······ 알아."

훈련장 밖 의자에 앉아있던 플란츠가 이렇게 대답하며 훈련장 쪽을 봤다. 그런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형님께 화를 낸 것은······."

"알아. 그것도."

몇 달 전.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발칸의 훈련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발칸을 맡아보겠다 마음을 먹었다. 칼리안이 먼저 의사를 묻기는 했지만 결심을 했던 것은 분명 플란츠였다.

그랬으면서 발칸을 그저 자신의 목숨 유지를 위해 잠시 빌려온 힘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책임지기를 피하려 하지 않았나.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모습이 르메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는 제 사람은 커녕 자신의 목숨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똑같이 굴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발칸의 대원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플란츠에게도 화를 냈다.

"그래야 사니까. 나도, 저 마법사들도."

플란츠가 어쩐 일로 말을 덧붙였다.

이제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칼리안의 의도를 파악했음을 제대로 확인시켜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귀찮음을 감수한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씩 웃었다.

"역시 형님은 똑똑하십니다."

"또 짖지."

분명 화를 낼 때와 완연히 다른 웃음임에도, 플란츠는 잠시 손 끝이 차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 마주봤던 칼리안의 한기가 다시 떠오른 탓이다.

아주 잠시동안 칼리안의 앞에 섰던 플란츠가 이 정도였으니 플란츠가 말을 달려 오는 동안 칼리안의 화풀이를 고스란히 감당한 마법사들은 훈련을 받을 만한 꼬락서니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때문에 플란츠와 아르센은 오늘의 훈련을 취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것은 분명 집에 가서 쉬라는 의미였다.

결코 '저런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본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 아우님은 매일 짖는 것이 일이고 저놈들은 하루 하루 미쳐가는게 일이군."

그 말에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 플란츠가 굳이 입을 열어 이렇게 긴 소리를 꺼낼만 했기 때문이다.

아르센의 분류에 따르자면 '답 없는 또라이'인 마법사들은 지금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칼리안의 동상을 먼저 세울지 아르센의 동상을 먼저 세울지 따위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라고 허락해 준 휴일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누가 보면 새로운 마법 주문식이라도 만드는 줄로 착각할 만큼 열띤 모습이었다. 지극히 마법사답게 평화로운 모습이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마법사답지 않습니까."

옆에 앉은 망할 동생놈도 마법사였음을 잠시 잊었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대답하지 않던 플란츠가 마법사들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강했겠지. 그 때에도."

갑작스러운 질문에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날의 발칸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법사를 보호하려는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의 눈에 서린 그 수많은 감정들. 그 안에 단 하나, 원망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볼 수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자신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을 알았으니까.

"······ 강했습니다. 끔찍할 만큼."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다. 칼리안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고 그 날의 일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플란츠가 얼마나 강한 집단을 만들어냈는지를.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발칸의 답 없는 또라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이 사라져버린 헤이시아 궁일지, 딸기 아이스크림일지, 체이스의 말 때문이었을지는 플란츠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여전히 앞을 쳐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발칸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일부터는 기사단도 둘러보셨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이제 슬슬 발칸의 통합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플란츠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발칸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것만 알면 될 일이니까. 생각해보아야 좋을 것 없을 기억을 꺼내놓아서 무엇하겠는가.

"부지런히 움직이셔서 발칸에 대한 훈련도 계속 하고 카렌과 라온 기사단에 가서 얼굴도 비추고 하셔야죠. 어차피 하루 아침에 합쳐질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니 저는 저대로 맹세의 인에 대해 알아보고, 형님은 형님대로 기사단을 손에 넣고.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가능한 빠르게 발칸으로 합쳤으면 해서요."

어쨌거나 플란츠가 그들의 힘을 가져오기로 한 이상 미뤄 둘 이유가 없었다.

물론 빠르게라 하더라도 시일은 걸릴 것이다.

당장 플란츠가 기사단부터 온전히 손에 쥔 뒤에 합쳐야 별 탈이 나지 않을 테니까.

때문에 안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는 오늘 보신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람을 제 것으로 만들어 다루는 방법은 오늘 칼리안이 알려줬다. 기사들에 맞추어 대응하는 것이야 플란츠가 알아서 할 일이다. 실수하면 그때 다시 알려주면 되니까.

플란츠는 이번에도 고개만 움직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한번 길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무력으로 누를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형님이 집니다. 의외로 엄청 약하시니, 싸우려 들지는 마시고 알아서 잘 처신하시면 됩니다."

"짖지 좀 말라고."

오늘도 양껏 짖은 칼리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짖을 만큼 짖었으니 그만 짖겠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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