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있어야 할 곳 (3)
하루에 이 말을 대체 몇 번을 하는지.
"미친."
빌헬름 관에 혼자 가라는 말을 들은 칼리안이 아무 말 없이 알겠다 했을 때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 마법사들이 술 마시고 사고쳐서 화난 것 아닙니다.
- 알아.
그때 플란츠는 분명 '안다'고 했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물었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 가르쳐드릴 겁니다.
그 말을 했을 때부터 이미 칼리안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정도 바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칼리안이 어떤 놈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했다.
그 가르침이 이렇게나 사나운 방식일 줄 알았다면 그 태평한 얼굴을 보며 '생각할 게 있으니 오늘은 빌헬름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럼. 쉬십시오.
조금 전, 식사가 끝나고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말한 칼리안이 나간 뒤 플란츠는 후원으로 가 산책을 했다. 고양이와 히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체르밀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지금 당장 누구 하나는 찢어죽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칼리안의 것이었다.
빌헬름 관에 있을 미친 동생놈이 체르밀 궁에서 느껴질 정도의 살기를 줄기줄기 내뻗고 있는 것이다. 플란츠는 그 길로 말에 올라 곧장 빌헬름으로 달렸다.
칼리안이 그 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발칸의 앞에 섰을지 누구에게 함께 화가 난 상태였을지 너무 늦게 알았다.
발칸을 아끼는 것이 분명하면서 관심 없어 하는 척,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 하는데도 무관심한 척, 직접적인 책임이 두 부군단장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상관 없는 척.
그런 모습을 보인 플란츠에게 함께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신경 안 쓰면 내가 다 잡아버리겠다고.
내 멋대로 화 내고 내 방식대로 다 짓눌러 버리겠다고.
말에서 내려 빌헬름 관으로 들어서는 플란츠의 악다문 이 사이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화를 낼 거면······."
화를 낼 거면 그냥 나한테 내라고.
책임감 없게 굴지 말라 그냥 말을 하라고.
그 쪽에 다 쏟아내지 말고!
* * *
집무실에 앉아 커피향을 음미하던 앨런이 순간 팔을 멈췄다.
"······ 우리 왕자님께서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나셨나."
여유롭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날카로운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항상 힘을 빼 두려 노력하고 있는 눈초리가 예리한 빛을 냈다. 살기 때문이었다.
아르피아 궁과 빌헬름 관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농도 짙은 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칼리안은 분명 살기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동안 칼리안이 이렇게 범위 없는 살기를 내보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 않나.
고개를 갸웃하던 앨런이 저도 모르게 긴장한 목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화를 내고 혼을 내는 정도로 끝낼 줄 알았는데, 너무 과한 것이 아닌지."
필요하다면 처벌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럴 권한은 충분히 있었으므로 다른 참견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굳이 빌헬름 관이 아니라 아르피아 궁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앨런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혼을 내고 처벌하는 것의 범위를 넘어섰다. 칼리안의 바로 앞에서 이 기운을 마주치고 있는 이들은 진심어린 생명의 위협을 느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앨런의 어깨가 굳었다.
얼마 전 앨런의 집무실을 찾아왔던 체이스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체이스가 아르센을 마주쳤던 날이었다.
'설마?'
설마.
칼리안이 지금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체이스조차 자기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지 않나. 게다가 오늘은 체이스가 카이리시스를 떠난 날이다. 그런 상황에서 발칸을 마주했으니.
이것을 떠올린 앨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유로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자책을 한 앨런이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만에 하나라도 앨런이 우려한 것이 맞다면 오늘 빌헬름 관에 딱 쉰한 구의 시체가 생기기 전에 빨리 가 봐야 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르메인을 호위하는 렌이 이 엄청난 살기를 느끼지 못할 리 없으니 우선 그 쪽이 함부로 빌헬름 관에 가보지 않도록 말을 해 둘 필요도 있었다.
- 벌컥!
그렇게 급히 문을 연 앨런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앨런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를 본 까닭이다.
전례 없는 칼리안의 살기에 집중하느라 누가 이 곳에 찾아왔는지를 신경쓰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아. 마나실 백작님."
동글동글한 청회색의 눈 브론즈 색의 곱슬머리.
새끼 코끼리 얀이었다.
르메인의 집무실 앞에서 시종장 라울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던 얀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앨런을 향해 간단한 목례 후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면 된다고, 왕자님께서 백작님께 얘기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다른 설명이 없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앨런이나 렌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얀을 먼저 보내 두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저 어마어마한 살기가 결코 실수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아주 잠시동안 생사를 오고 간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그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얀의 모습에 앨런은 여러 감정이 들어간 긴 한숨을 저도 모르게 내쉬었다. 칼리안을 걱정할 줄이나 알았지 여전히 칼리안이 어떤 사람인지를 종종 잊곤 한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우리 왕자님······."
칼리안은 절대로.
한 가지 일에 하나의 이득만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복도의 창 밖으로 보이는 급히 달려오는 은백색의 말과 그 위에 올라 있는 이를 본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이렇게나 마음 씀씀이가 넓으셔서야."
그렇게 말한 앨런은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쿠키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르메인에게서 뺏어온 엘린느의 쿠키였다.
* * *
세상에는 바보가 있고 머저리가 있다.
괜찮은 또라이와 답 없는 또라이가 있다.
그리고 물론 똑똑한 사람과 좋은 사람도 있다.
이것이 바로 아르센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물론 저 기준으로 나눌 가치조차 없는 부류, 이를테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 같은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르센에게 있어 '사람'으로 치부되지 않으니 논외다.
참고로 레이븐은 괜찮은 또라이에 분류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센보다 똑똑하지 못했으므로 '바보와 머저리' 외의 다른 분류를 짓지 않았었지만 근래 똑똑한 사람이라는 부류를 하나 만들었다. 앨런, 그리고 앨런을 상회하는 의외의 지적 생명체 플란츠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 부류에는 딱 한 명이 있다.
칼리안이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스승의 뒤를 이어 '좋은 사람'의 분류에는 항상 칼리안만 있었다. 그렇게 구분해 둔 것에 스스로 의문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왕자님."
그리고 지금 아르센은 굉장히 불안한 눈으로 그 좋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으로는 칼리안의 움직임을 좇으면서도 손 끝에 차가운 마력이 집중되려는 것을 계속하여 참아내는 중이었다.
칼리안의 살기가 그만큼 짙었다.
'더 버티기 힘들 텐데.'
마법사들은 물론 다 정신 나간 족속들이지만 그만큼 예민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마법사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검을 들거나 마법을 쓰면 그것이 나을 것이다. 당장 죽을 듯한 것보다는 어디 한 군데 베이고 부러지는 것이 나을 테니까.
"왕자님."
때문에 아르센은 다시 한번 칼리안을 불렀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살기를 집어넣지도 않았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마법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한 아르센이 열 세 명의 마법사들 앞으로 나서기 위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제야 칼리안의 고개가 아르센을 향해 돌아갔다. 그 눈에 담긴 것이 작은 질책임을 안 아르센이 '아차'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칼리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왕궁에서 칼리안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단 세 명.
그들 중 한 명인 2왕자 플란츠가 칼리안의 앞으로 걸어와 섰다.
정확히 마법사들과 칼리안의 사이를 가로막은 채였다.
"그만하지."
칼리안이 시선을 돌려 자신과 마법사들 사이에 선 플란츠를 쳐다봤다. 살기는 감추지 않은 채였고 플란츠 역시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의 한기는 플란츠 역시 처음이었으니까.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에 선 마법사들을 쳐다봤다. 적어도 절반은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질린 얼굴이었다.
그들을 살핀 플란츠가 다시 고개를 돌려 칼리안 쪽을 쳐다봤다. 포기한 듯, 혹은 졌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았으니까."
칼리안의 얼굴에 아주 잠시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은 꽤 복잡해서 플란츠조차도 의도를 바로 파악해내기 어려웠다.
즐거움인지, 노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을. 혹은 그 모든 것이 다 섞여 있는 것 같은 얼굴. 그런 얼굴을 한 채 스치듯이 플란츠를 쳐다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네."
칼날같이 휘몰아치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죽을 때까지 발칸일 새끼들만 데리고 갈 거야. 아닌 새끼 필요 없어."
"네, 왕자님."
마법사들은 곧바로 대답했다.
살기가 사라졌음에 주저앉거나 칼리안을 원망하는 눈으로 보는 놈들은 없었다.
"술 처먹고 사고 칠 거면 내 이름 걸고 쳐."
칼리안의 이름 걸고 칠 만한 사고가 아니라면 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르센이 그러하듯이.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은 기사와 다르다.
그들의 신의는 충의와 다르다. 맹목적이며 헌신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튈 지 모르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강제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칼리안도 익히 아는 것처럼 그들은 돌아있으니까.
그러니 키리에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훈련장 몇 바퀴 뛰는 것만으로는 절대 저놈들의 인식을 바꿔놓을 수 없다. 내가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참고 있는지 모두 다 낱낱이 보여줘야 믿는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미쳐있는 마법사들 아닌가.
"내 이름 걸고 치는 사고는 내가 전부 다 막아 줄 테니까. 그러라고 가진 힘이니까."
저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검은 머리와 붉은 눈 말고. 진짜 힘. 그것을 직접 겪어봐야 믿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을 보는 마법사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돌아서다.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자신들 숨통을 죄이던 놈인 것을 아니까. 이제 정말로 믿을 터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칼리안이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렇게 시선은 플란츠에게 둔 채 마법사들을 향해 말을 맺었다.
"이런 게 진짜 책임감이라는 거다."
어줍잖게 피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한 것처럼 제대로 나서서 보호하라고.
그것이 네 위치에서 네가 가져야 할 책임감이니까.
······ 플란츠.